시간을 느리게 하는 마법, 자이언국립공원
목적지에 다와 가지만 운전대를 잡은 팔에 긴장이 가실 줄 몰랐다. 애리조나 주에서 유타 주로 넘어오는 길은 생각보다 까다롭지 않았다. 대지에 펼쳐놓은 도로엔 갈림길이 드물게 등장했다. 내비게이션은 수십 킬로미터 이후에나 좌로 우로 회전을 할 것이라고 알리니 엑셀에 발을 놓았다 떼었다 반복할 뿐이다. 그래도 익숙한 우리 차가 아닌 렌터카로 외국의 교통 환경에 맞춰 초행길을 간다는 것 자체만으로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나는 픽픽 돌아가는 가벼운 핸들을 양 손으로 묵직하게 움켜잡았다.
두 시간 가까이 잠자코 있던 내비게이션이 몇 미터 앞에서 회전하라고 안내를 한다. 곧 애리조나 사막의 초목같이 낮은 건물이 성성하게 자리 잡고 있는 작은 마을을 통과했다. 같이 마을을 지나 오던 차들도 갈림길에서 제 갈길 따라 사라졌다. 우린 외따로이 암벽 허리춤을 지나는 오르막길을 올랐다. 점차 차로가 좁아지고, 구불구불해졌다. 제한 속도 표지판이 모퉁이마다 등장했다. 목적지, 자이언이라 불리는 캐년에 가까워진 것이 분명하다.
자이언 국립공원의 입구에서 차들이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국의 톨게이트처럼 생긴 무미건조한 티켓팅 박스에서 레인저는 입장권을 확인하고 공원 지도를 건넸다. 이제 캐년의 품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눈 앞의 풍경이 단숨에 달라졌다. 내가 쥬라기 공원 어트랙션이라도 타고 있는 것인지. 입장소를 지나고부터의 공간은 나는 몰랐던 새로운 지구였다. 보지도 듣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상상으로도 그려본 적 없다.
조물주가 있다면 굉장한 예술가이실 테지. 사막 가운데에 빛나는 바위 절벽을 여러 겹 포개 놨다. 암벽 산들은 시선이 흩어질 정도로 널리 펼쳐지지도, 옹그린 느낌이 들 정도로 가깝지도 않았다. 완만한 V자를 만들어 낸 암벽 비탈면 사이로 파란 하늘이 담뿍 들어왔다.
엄청난 인상이 창밖에서 풍겨오지만 운전대를 잡고 있으니 넋 놓을 수 없다. 배경이 있는 터널을 지나는 것 같다. - 여행지에서 운전하는 사람, 리스펙트! - 대신 이 특별한 땅의 굴곡이 차의 진동을 타고 전해졌다. 자연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서 인위를 더하지 않으려는 이 공원의 신념이 도로 위에 녹아있었다.
도로는 누런 암석층 경사면 틈 사이를 요리조리 지나갔다. 30마일, 25마일... 속도 제한 표지는 굽이마다 바뀌었지만 제한 속도를 맞출 필요가 없었다. 왜냐면 이 도로는 저속 운전자를 위한 길이다. 시속 45, 50킬로 속도를 밟을(?!) 만한 구간이 길지도 않을뿐더러 이 경치를 서둘러 지나 보내고 싶은 사람도 없다.
20세기 초에 만들어진 깜깜한 터널 속으로 들어왔다. 통로 끝에서 빛이 쏟아지고, 암석 절벽이 위용 있게 서있는 계곡을 마주했다. 돌 산의 중턱엔 아치 모양 거대한 창문이 음각되어 있다. 도대체 저건 뭐야? 경이로움이 순진하고 무식스런 궁금증을 마구 몰고 들어와 머릿속을 휘저었다. 갓길의 빈자리를 찾아 차를 댔다. 드디어 자유로워진 두 손이 화끈거렸다. 건조한 햇살에 손등만 유별스럽게 탔다.
너무 멋있어서 체할 것 같다, 어떻게 소화해야 하나.
이름처럼 광대하고 복잡한 그랜드 캐년의 앞에서는 그 거대함에 도리어 공간감을 잃어버리는 데 반해 - 그랜드 캐년 계곡의 깊이는 1.8킬로미터, 계곡 사이 폭은 16킬로미터라고 한다. - 자이언 캐년은 규모는 훨씬 작지만 가득 찬 공간감을 느낀다.
가파른 암벽은 적당히 높이 솟아있어서 하늘을 넉넉하게 내어준다. 협곡 사이 완만한 구릉이 완만하게 기울어져있는데, 위엔 키 작은 나무와 관목이 희끗희끗했다. 구불구불 난 협곡을 내다보면서 한번 걸어보고 싶은 의욕이 생긴다. 자전거를 타고 지나면 얼마나 상쾌할까. 한 발자국씩 더 나갈수록 멀리 보이는 산의 정상 위에 한층 더 가까워진 상상으로 가득할 것이다. 자이언 캐년의 길은 도전해보고 싶은 용기를 준다. 넉넉한 품으로 감싸고 꿈을 꾸도록 상상력을 북돋아준다.
자이언 국립공원의 느림보 시계
자이언 국립공원은 그들의 독특한 공원 운용시스템 덕에 바깥세상과 다른 별천지에 들어온 기분이 든다.
이곳부터는 일반 차량 통행금지. 셔틀버스를 이용하십시오.
공원 한가운데 설치된 차단기 너머서부터는 방문객들의 차량이 통제된다. 십분, 십오 분마다 순환하는 두 량의 셔틀버스가 서자 차단막대가 자동으로 올라갔다. 90년대 너무 많은 차량들로 이곳은 공원보다 주차장처럼 되어버리자 관리 측은 모든 일반 차량의 유입을 금지하고, 셔틀버스 시스템을 시작했다. 이후부터 차단기 너머의 구간부터는 셔틀버스가 도로의 주인이 됐다. 그런 덕에 도로는 늘어선 차량 대열, 주차난, 소음과 매연에서 자유로워졌다. 조금은 불편하고 느리지만, 햇살과 바람을 온몸으로 받으며 자연이 주는 본연의 즐거움을 궁리하는 기회를 얻었다.
※자이언 캐년의 중심부로 들어가는 나들목에는 차량 통행 차단기가 설치되어 있다. 이곳을 지날 수 있는 차량은 천연가스 셔틀버스, 공원 내부 숙소 투숙객 차량, 사설 밴이 전부다. 숙소의 투숙객은 우편 혹은 방문객 센터에서 받은 입장 코드를 차단기에 누르고 입장할 수 있다.
그렇지만 차로 공원의 모든 구역을 다닐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투숙객은 숙소 주차장까지만 차를 이동하고, 숙소 이후부터의 구간은 셔틀버스를 이용해야 한다.
두 발이 동력인 세상이다.
셔틀버스 뒤를 느긋하게 따르는 자동차 곁으로 가족 단위의 자전거 라이더, 친구들과 삼삼오오 걸어가는 사람들이 스쳤다. 그들은 알까? 그림 같은 배경을 등지고 걷는 그들 자체가 멋진 그림이 된 것을. 풍경과 하나가 되어 유유히 움직이는 그들은 내게 다른 의미로도 환상이었다. 나에게 걸을 수 있다는 것의 의미는 그들이 가진 체력과 넉넉한 시간을 몸으로 보여주는 것과 같았다. 우리에겐 무엇보다 시간이 가장 큰 소비이자 사치다. 느린 걸음을 걷는 여유가 부러운 우리는 '휴가차' 여행자. 언젠가는 시간을 한 발자국, 두 발자국 꾹꾹 눌러 밟으며 걷는 여행을 하고 싶다.
여유로움의 환상에 취해있던 것도 잠시. 숙소 체크인을 하고 한 바탕 난리를 치렀다. 난리는 우리 부부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다. 자이언 캐년에 모인 많은 여행객들이 모두가 한 장소에 모였다. 위치는 recreation.gov 국립공원 온라인 예매 사이트.
매일 오후 4시, 여행 일정의 키를 좌우하는 셔틀버스 티켓이 풀렸다. 그 시각 즈음 공원 내 숙소, 자이언 롯지 숙박객들은 와이파이가 터지는 로비 건물 앞에 핸드폰에 몰두하고 있었다. 물론 미국 유타주의 끄트머리, 높고 깊은 계곡에 인터넷 신호가 잘 이를 리 없었다. 하지만 사흘의 짧은 일정이 어떻게 구성되느냐가 결정되는 중요한 시점이었다. 우리 둘도 서둘러 폰을 꺼내 들고, '새로고침' 버튼을 눌렀다.
십 년도 훌쩍 넘은 수강신청의 긴장감과 긴박함을 대양 건너 사막 건너 자이언 캐년에서 느낄 줄이야! 이 속도로는 도저히 티켓 전쟁에서 이길 수 없어 보였다. 우린 결국 차에 올랐다. 차단기를 건너 방문자 센터로 향했다. 모든 곳이 느린 세상의 환상은 지워지고 데이터 속도가 빵빵 터지는 세상으로 나갔다. 그리고 가까스로 하나 남아있던 셔틀 티켓을 거머쥐었다. 오랜만에 신경이 빠짝 긴장되는 경험을 했다, 그것도 자이언 캐년에서.
우리가 갔을 때에는 셔틀버스 티켓을 사전에 예약을 해야 했으며, 수량도 제한되어 있어 티켓 전쟁이 벌어졌다. 꽤 많은 시간을 티켓 구하는 데 들이고, 원치 않게 스트레스도 받았다.
하지만 5월 28일부터는 티켓팅 없이도 셔틀버스를 탑승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숙소 근처 에메랄드 풀 트레일을 짧게 걸었다. 길가에 버진 강이 얕고 가늘게 흐르고 있었고, 물에 몸 담고 있는 친구들도 보였지. 강 따라 걷는 길에 어쩐지 뭉근한 냄새가 풍겼다. 우린 온갖 추측이 난무하는 대화를 벌이기 시작했다. 강의 박테리아일 것이다 화학성분 때문일 것이다 그럴듯한 말로 의심을 해봤만, 입만 박사인 둘이서 정확한 원인을 절대 알 수 없었다. 길 건너 돌 산 정상에 지는 해가 비췄다. 주황색에서 위로 갈수록 하얘지는 암벽에 노을빛이 비추니 더 화려하게 빛났다. 그리고 우리가 선 육백 미터 골짜기 아래는 어둑한 기운이 물 들어가고 있었다. 이렇게 소중한 여행의 하루가 간다. 가는 해를 막을 수 없어서 나뭇가지를 바라봤다. 바람에 흔들리는 가지의 탄력 있는 움직임 그리고 이파리의 잔떨림을 지켜봤다.
자이언 캐년 국립공원의 시간은 느리게 흐른다. 시간이 느리게 흐른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사람은 시간을 주관적으로 읽곤 하니까 그럴듯한 착각일지도 모른다. 그곳은 사람도 차도 모두가 느리게 움직인다. 도시처럼 많은 곳을 다니고, 많은 것을 보려고 애쓸 필요가 없어 보였다. 걷고 싶으면 골짜기의 굽은 길을 걷고, 잔디밭에 볕이 들면 자리 깔고 드러눕고, 허기지면 그늘 아래에 앉아 주전부리를 꺼내 먹으면 된다. 어떻게 보면 특별할 것 없고, 자랑할 것 없는 시간들이지만 그날의 공기를 어렴풋이 떠올리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시간이 이후 우리에게 기억으로 남는 것이라면, 많은 기억을 떠올린다는 건 더 많은 시간, 깊은 시간을 누렸던 거라고 우겨도 될까. 오늘의 글은 여행의 시간이 아쉬운 한 사람의 억지로 끝을 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