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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ickypinkpiggy Sep 24. 2022

용기를 빚지고 회복을 빚지고

최은영​​ - 『밝은 밤​』

증조할머니-할머니-엄마-딸의 이야기를 통해 삶과 화해하는 과정을 다룬 소설이다. 4대에 걸쳐 이어지는 모녀 관계는 어쩐지 비슷한 갈등이 반복되는 것처럼 보인다. 이혼한 딸을 부끄러워하는 엄마의 진심과 출생의 비밀을 알려주지 않았던 할머니의 진심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은 엄마는 딸이 주변 사람들에게 손가락질받지 않길 바라는 보호의 마음이었고 할머니는 엄마가 출생의 비밀에 상처받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사랑. 그 마음 뒤에는 언제나 사랑이 있었다. 그 사랑은 자신이 겪은 지난한 과정을 딸이 반복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었을 텐데 그 진심이 왜곡되지 않고 온전히 이해되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다.


그 사랑 때문에 때로는 사실을 곧이곧대로 전달할 수 없고, 때론 진심을 알아주지 않는 상대방에 대한 서운함이 잔인한 표현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런 숱한 갈등에서도 사랑을 읽어내려면 언제나 다시 화해하려는 용기가 필요하다. 이 소설은 모녀 관계뿐 아니라 삶의 다양한 갈등을 겪고도 다시 화해하려는 인물에 관한 이야기다. 그 화해의 시도에서 읽히는 용기의 기색은 회복이 시작이 어디인지 알려준다.


남편과 이혼한 후 할머니가 계신 희령으로 이사 간 '나'. 불륜으로 자신을 배신한 남편과 그런 자신을 부끄러워하는 부모님에게서 상처받아 희령으로 도망치듯 이사를 간 것이었다. 어렸을 때 잠시 살았던 기억 말고는 딱히 연고가 없었던 희령에서 '나'는 몇십 년 만에 할머니와 재회한다. 엄마와 왕래가 없던 할머니는 '나'를 반갑게 맞이한다. '나'는 그런 할머니에게 오히려 엄마보다 더 깊은 연대감을 느끼고, 할머니가 들려주는 모녀 관계를 통해 자신의 관계를 되돌아본다. 몇 세대나 동떨어진 그 이야기는 지금 '나'의 곁에 있는 그 어느 누구보다도 깊은 위로가 된다. 세대와 시간을 초월한 관계의 공통점을 알아냈기 때문이다.


"김희자 박사에게 갈 수 있는 한 가장 멀리 가라고 했던 새비 아주머니의 말을 나는 종종 생각했다. 그 말은 단순히 물리적 거리만을 뜻하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의 딸이 다른 차원으로 가기를 바랐던 마음이었겠지. 본인이 느꼈던 현실의 중력이 더는 작용하지 않는 곳에서 자신의 딸이 더 가벼워지고, 더 자유로워지기를 바랐던 새비 아주머니의 마음을 나는 오래 생각했다."


상처받은 직후에는 어떻게 다시 삶과 화해해야 하는지 알기 어렵다. 그럴 땐 소설 속 '나'처럼 다른 관점으로 상처를 바라보려는 시도가 필요하다. 그 시도에는 분명 용기가 필요하고, 지난 삶 속에서 '나'의 할머니가 겪었던 지난한 과정은 '나'에게 그 용기의 밑거름이 되어줬다. 무언가를 골똘히 미워하다 보면 그 미움을 어떻게 소화해야 하는지 알게 되는데, 그러려면 그 미움을 미리 통과해본 사람의 이야기가 큰 도움이 된다. 그렇게 서로에게 용기를 빚지고 회복을 빚질 때 엇갈렸던 진심도 다시 이해받을 기회를 얻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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