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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 YHEE Jean May 27. 2020

코로나와 갈라파고스 증후군

코로나 민주주의 ②

오리엔탈리즘이라는 메커니즘이 실패한 것이 아니라 성공적으로 작동했기에 
유럽 선진국들이 휘청거렸다


(앞의 코로나 민주주의 ①  '헬조선'에서 '국뽕'으로 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 다소 길었던 글 분량에 대한 좋은 지적이 있어 기존의 글을 나누고 내용도 보완하여 다시 발행합니다 (5월 29일)


목차

코로나 민주주의 ① '헬조선'에서 '국뽕'으로 (링크)

코로나 민주주의 ② 코로나와 갈라파고스 증후군

코로나 민주주의 ③ 코로나와 열린 사회 (링크)

코로나 민주주의  코로나 속 차별과 혐오

코로나 민주주의 ⑤ 보편적 연대와 코로나 민주주의




코로나 민주주의 ②: 코로나와 갈라파고스 증후군


예상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니라,
예상할 수 있었는데도 준비하지 않았기에 코로나 위기는 더욱 뼈아팠다


코로나19가 도착하기 전에, '선진국' 들에 팬데믹 대처 매뉴얼이 없던 것도 아니었다. 예를 들어 독일에는 사스 그리고 신종플루 이후 수립된 '독일 팬데믹 국가 계획'(Nationale Pandemieplan für Deutschland: NPP - 2020년 3월 4일 개정)이 있었다. 2020년에 한국의 사례가 돋보였던 것은, 매뉴얼대로 준비되어 있었던 것도 아니요, 뒤늦은 수습을 하면서도 우왕좌왕하는 그들의 모습이 여기저기서 불거졌기 때문이다. 그것은 '미리' 예상하고 '이미' 대처하고 있는 우리와는 너무나도 대조되는 광경이었다.   


'서구 선진국'들은 왜 그토록 혼란스럽게 대처했던 것일까? 이를 설명하는 하나의 요인으로 아시아에 대한 서구의 오리엔탈리즘을 꼽을 수 있다. 오리엔탈리즘은 서양의 시선대로 아시아적인 것을 타율적으로 규정해버리는 문화 및 제도를 말한다. 이 시선 속에서 (역사/문화적으로 다양하고 지리적으로 거대한 공간인) 아시아는 '신비하거나' '예의 바르며' '화합을 중시한다고', 또는 '여성적'이자 '유아적'이고, '수동적'이거나 '발전이 정체되어 있으며', '집단주의적'이며 '권위에 순종적'인 곳으로 단순화된다. 심지어는 아시아인이 그러한 설명 방식과 개념을 차용하는 경우까지 보인다.


기존에 사용하던 편리한 설명에 의존하는 것이 새로운 해명에 공을 들이는 것보다 쉬웠다. 긴 세월 몸을 불린 인습적 사고의 틀에 맞지 않는 일들이 아무리 일어나도 말이다. 하지만 코로나 위기라는 현실화된 위험 속에서 종전까지 현실을 규정하던 오리엔탈리즘의 비현실성이 마침내 드러났다. 오리엔탈리즘이라는 렌즈로 본 현실은 진짜 현실과는 너무도 동떨어져 있는 것이었다. 편리한 사고방식에 의존하던 습관은 중국 우한이라는 곳에서 발행한 위험이 유럽 혹은 미국이라는 ‘우리 서구인’에게도 미칠 것이라는 당연한 예상도, 한국의 성공적인 방역 모델이 자신들에게도 성공을 가져다줄 것인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도 방해하고 말았다.



유럽은 스스로를 섬으로 만들었기에 불필요한 희생을 치뤘다


이와 관련하여 4월 말 독일언론 크라우트레포터에 글쓴이의 인터뷰가 실렸다(링크). 이곳은 뉴미디어 환경에서 독일어권 언론의 대안으로 손꼽히는 곳이다 (크라우트레포터를 다룬 한국 언론의 기사 / 다른 링크). 예상보다도 오래 2시간에 걸쳐 진행된 인터뷰 이후에도 이후 1주일 간의 촘촘한 논의를 거쳐 기사가 나왔다. 유럽의 오리엔털리즘, 한국과 독일의 방역 시스템, 마스크 쓰기와 코로나 동선추적앱, 정보 공개의 방식과 한계, 한국의 민주주의 문화 및 최근의 독일내 아시아인에 대한 인종주의 사건에 대한 논의를 망라한 인터뷰 내용 전부를 지금 여기 소개하기에는 그 분량이 다소 많다. 


그중 특히 인터뷰에서는 한국이 대처를 신속하게 한 이유가 혹시 전염병의 발원지인 중국과 가까운 거리 때문(에 더 경각심을 가졌기 때문)은 아닌가라는 질문이 미끼처럼 던져졌다. 여기에 "(중국부터) 비행기로 (한국까지) 2시간이냐 (유럽 까지) 12시간이냐의 차이"는 결정적인 요인이 될 수 없다 대답했다. 그 거리라는 말이 지리적 거리를 의미하건 경제적·문화적 관계를 의미하건 간에, 세계의 모든 국가가 '지구'라는 한 배를 타고 있다는 사실은 처음부터 명백했다. 그 명백한 사실을 보지 못했던 맹점이 노출된 것이다. 


사실 글쓴이와 우호적인 분위기에서 진행된 인터뷰 보다는 훨씬 더 노골적으로 한국의 성공의 비결을 '유교적 집단주의' 문화로 뭉뚱그리거나, 현재 중국의 전방위적 감시체제와 동일선상에 놓는 보도들이 적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독일 보수 일간지 프랑크푸르트알게마이네(FAZ) 소속 기자의 기사가 그 좋(지 않)은 예였다. 독일의 진보진영까지도 정론지라고 인정하는 해당 신문에서 이 정도의 글이 나온다는 것 자체가 동아시아에 대한 선입관이 유럽 내에 얼마나 공고하게 존재하는지를 더욱 잘 보여준다.* (*그가 일본 특파원 신분으로 한국 상황에 대해 글을 쓴다는 것 자체에도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많은 서구인들은 세계화라는 말을 쓰면서도 그 현상의 일부('노동력과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 '가치의 사슬 value chain', 난민 '문제')만을 세계화의 전부인 것처럼 오인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형적 경계나 국경으로도, 정치체제와 문화의 차이로도, 어떤 낡은 혹은 새로운 장벽으로도 완전히 갈라놓을 수 없는 것, 그것이 바로 세계화 혹은 지구화(globalizastion)로 통칭되는 현재이다. 이점은 포스트 코로나와 세계화의 종말을 예언하는 요즘도 크게 달라진 것 같지 않다. 아무리 공항을 오가는 인파가 줄었다고는 해도, 지금처럼 세계 각국에서 남의 나라 소식에 귀를 기울였던 때는 흔했을 것 같지 않다. 아무리 고립주의와 국경 봉쇄를 외쳐도 말이다. 심지어 지리적 고립이 초래하는 현상인 '갈라파고스 증후군'이라는 표현의 주인공, 갈라파고스 섬조차 코로나를 피해갈 수 없었다(링크).

갈라파고스 제도(보라색 원 안)가 왜 고립된 지역의 대명사가 되었는지는 지도로 보는 것이 가장 쉽다.


오리엔탈리즘은 아시아적인 것과 유럽적인 것을 나누고 이들이 서로 전혀 호환되지 않는 상반된 것인양 간주했다. 하지만 그로써 섬이 된 것은 아시아 뿐만이 아니었다. 유럽 역시도 하나의 섬이 되었다. 그 섬을 채운 것이 노골적인 '유럽중심주의'였든, 아니면 (독일인이나 프랑스인이라는 민족주의적 정체성을 뛰어넘고자 했지만 유럽이라는 생각의 경계를 넘지는 못한) '좋은 유럽인'이었든 간에 말이다. 그러한 선입관은 스스로 열려있고 유럽중심주의를 극복했다고 생각하던 유럽의 진보 정치에도 종종 확인된다


사실 여태까지 유럽인은 그렇게 고안된 울타리 안에서 불편할 일이 별로 없었다. 오리엔탈리즘의 1차적 피해자는 통상 단순화와 타율성을 강요받던 아시아 지역 출신이거나 혹은 심지어 아시아적 외모를 지닌 유럽인 중 일부였을 뿐이다. 그런데 코로나 위기를 맞아서 이 구도가 전복되었다. 오리엔탈리즘이라는 메커니즘이 실패한 것이 아니라 성공적으로 작동했기에 유유자적하던 유럽 선진국들이 휘청거렸다. 전통적 가해자가 오히려 그 때문에 피할 수도 있었던 큰 희생을 치룬 2020년 전반기의 기억은 코로나 위기가 남긴 또 하나의 반어적 상황으로 기록될 것이다.


그렇다고 유럽 사회가 앞으로도 현재의 모습에만 머무를 것이라고 오해해서는 안된다. 이미 일어나고 있는 변화에도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은 우리 스스로를 또 다른 섬에 가두는 일에 다름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 글 코로나 민주주의 ③ 코로나와 열린 사회에서 이어집니다)


#코로나민주주의


이진

독일 정치+문화연구소 소장

Dr. Yhee, Jean

Direktor, Institut Politik+Kultur (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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