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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 YHEE Jean May 29. 2020

코로나와 열린 사회

코로나 민주주의 ③

우리가 2015년 메르스의 실패 속에서도 해외의 비판을 경청했던 것처럼,
2020년의 실패에서 이제라도 교훈을 얻고자 그들은 바삐 움직이고 있다


(앞의 코로나 민주주의  코로나와 갈라파고스 증후군에서 이어집니다)

 * 다소   분량에 대한 좋은 지적이 있어 기존의 글을 2개로 나누고 내용을 보완하여 다시 발행합니다 (5월 29)

 

목차

코로나 민주주의 '헬조선'에서 '국뽕'으로 (링크)

코로나 민주주의  코로나와 갈라파고스 증후군 (링크)

코로나 민주주의  코로나와 열린 사회

코로나 민주주의  코로나  차별과 혐오

코로나 민주주의  보편적 연대와 코로나 민주주의


서방 선진국의 민낯을 발견했다고 내심 흐뭇해하고 말 일이 아니다


정말 말하려는 것은 이것이다. 서구의 오리엔탈리즘의 경과를 우리의 타산지석으로 삼자는 것이다. '결국  것도 아니었던' 서방 선진국의 민낯을 발견했다고 내심 흐뭇해하는  그쳐서는  된다.* (*  그동안 우리가 그들에게는 ' ' 있으리라 생각했는지는 별도의 글에서 적는다) 우월의식은 스스로에 독이 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는 제안이다.

 

이제는 한국의 지상파에서까지 웃음거리의 소재로 쓰이곤 하는 코로나 사태에 대한 일본  대응들도 이러한 맥락에서 다시 생각해 볼만 하다.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경계를 넘나드는 일본의 대처 방식은 처음에는 웃음을 준다. 하지만  드는 의문은,  그토록 이해되지 않는 결정을 내리는 것인지하는 것인지, 사회와 언론의 비판적 기능은  그리 미약한 것인가 하는 답답함이다. 지지부진한 논란이 길어지며 불필요한 희생을 감수할지도 모를 일본 시민들을 생각하면, 마지막에 남는 것은 안타까움이다.   없는 일본의 상황을 풀어내는 여러가지 설명과 분석이 있겠으나   중요한 요인으로 일본에서도 또 다른 갈라파고스화 현상이 진행되었다는 점을 꼽지 않을  없다. 일본식이라면 충분하다는 버블시대의 자부심은 이후의 혁신에 오랜 기간 장애물이 되었다.

 

우리는  이상 배울 것이 없다’라는 주장 말고는 다른 목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는 것야말로 ‘갈라파고스화’의  징후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갈라파고스 증후군은 정치·사회적 현상이다. 지금의 자부심 때문에 미래의 변화가 가로막히기 전에, 국뽕의 치사량이 가까워졌다는 신호를 느낄 필요가 있다.  점에 있어서는 유럽과 일본, 미국("America first!") 한국이 다를  없다. 외부의 칭찬은 즐거이 듣다가도, 간혹 진지한 문제제기까지 고깝게 느끼고 눈을 돌리던 경우는 혹시라도 없었을까? 그들에게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사회를 한층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마땅히 지속해야  고민에 게을러졌던 적은 없었을까? 아니, 앞서 코로나 민주주의   '헬조선'에서 '국뽕'으로에서도 적었듯 시민들은 자제력을 보이는데, 오히려 정치권과 미디어가 으레 대중이 원하는 것을 성급하게 재단하며 사회적 의제의 폭과 깊이를 제한하고 있었지는 않았는가?

 


그런데 지금 독일에선 '배우자'라는 말이 유행어가 되었다

 

거듭되는 외신의 칭찬 사례는 우리를 기쁘게 하지만, 사실  이면에는 절치부심하는 각국의 노력이 숨겨져 있다. 초기에는 단순화와 단편적인 묘사가 제대로  이해를 방해하기도 했다. 앞서 글에서도 인용했던 '유교적 집단주의' 한국 방역의 성공원인을 뭉뚱그리던 독일 일간지 소속 '도쿄 ' 기사  좋(지 않)은 사례였다. 하지만 지금은 한국에서 고안되고 시행되는 구체적인 조치들에 대한 광범위한 분석과 비교 그리고 토론이 뒤따르고 있다. 우리가 2015 메르스의 실패 속에서도 해외의 비판을 경청했던 것처럼, 2020년의 실패에서 이제라도 교훈을 얻고자 그들은 바삐 움직이고 있다.  

 

그렇게 유럽, 특히 독일 사회에는 지금 '국뽕'이라는  대신 '배우자(lernen)'라는 말이 유행어가 되었다. 다른 색채의 언론사들은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 '독일이 한국으로부터, 싱가포르로부터, 대만으로부터, 홍콩으로부터, 스위스로부터, 그리스 부터, 체코로부터 배울  있는 ' 무엇인지 분석하고 토론한다. "Was Deutschland von XXX lernen kann(독일은 XXX로부터 무엇을 배울  있는가)"라는 식으로 변주가 이어지는  '독일의 배우기' 시리즈에는 외부의 실패도 성공도  이상 남의 일이 아니라는 깨달음이 담겼다.

 

의외로 둔감해 보였던 독일 시민 사회에서도 변화의 조짐이 보인다. 마스크 쓰는 문제로 답답할 만큼 왈가왈부 하던 시민들은 이제는  한국식 마스크 착용 문화가 상호존중과 연대의 표현인지, 왜 그것을 과거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것인지에 대해 열띄게 토론하고 있다 (페이스북 링크).


코로나19 시대 이전, 일본이나 한국에 멀리 비행기를 타고 도착한 서구인에게 겨울과 봄철 마스크를 쓴 사람들로 가득한 거리의 모습은 커다란 문화적 충격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마스크를 쓴 모습이 기억에 남았을 뿐, 마스크 이면에 감춰진 사람들의 생각까지 전달이 되지 않았었다. 바로 그랬던 유럽인들이 마스크 쓰기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남을 지키려는 생각에서 만들어진 문화적 습관이라는 점을 뼈저리게 깨닫게 된 것이다. 위기 속에서 집단적으로 이루어진 인식의 전환은 이들에게 앞으로도 쉽게 잊혀지지 않을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물론 그 변화의 시작은 늦었으며 변화의 움직임은 여전히 일부 몰이해에 부딪히기도 한다. 여전히 음모론과 가짜뉴스 그리고 극우주의의 결합 속에 퍼져나가는 코로나 조치 반대 시위도 보이지만,  시민 대부분은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조사 결과가 나온다 (관련 독일 기사 링크/ 이 특별한 주제에 대해서는 별도의 글에서 다룬다). 무엇보다 과거에는 아시아적인 문화를 빈약하게 상징했던 마스크 쓰기가 이제 서구 사회 많은 곳에서 연대의 문화적 상징이 되었다는 것이 이채롭다. 2~3월경 마스크가 있는데도 주위의 시선 때문에 쓰지 못하던 아시아계 시민들의 난감함도 사실이고, 그런 상황에 대해 이렇게 늦게 나마 성찰하고 반성하고 동아시아인과 연대하고자 하는 독일 사회의 모습도 사실인 것이다.


그러한 문화적 가치 평가와 인식의 변화는 독일  정치·사회·방역제도뿐만 아니라 언론 환경의 구조적 변화로 이어진다. 실제로도 독일 연방정부에서 통합  차별 문제를 총괄하는 차관급 비트만-마우츠(Annette Widmann-Mauz)연방정부 통합특임관은 독일의 정론지 SZ, 공영방송 그리고 트위터에서 '코로나 위기  아시아인 차별 문제' 앞장서 거론하고 있다. 이미 독일연방내무부는 내부 정책문서에서 한국의 사례를 정밀하게 분석하며 교훈과 대안을 고민한 도 있다(동 정책문서 PDF 링크).

 

과거 아시아에 대해 말하면서도 아시아인의 목소리가 직접 전달되는 일은 드물었던 환경에도 변화가 일고 있다. 언론도 그간의 유럽의 치명적인 오만(링크) 반성하며, 아시아의 시민의 목소리와 전문가의 발언권을 강화한다. 글쓴이의 인터뷰가 단독 인터뷰 형식으로 이루어진 것 역시도 이러한 배경이 있다. '동아시아인에 대해' 쓰는 것이 아니라, 동아시아인이 동아시아에 대해 직접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공감이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쓴 소리를 독일 사회에 더욱 선명하게 전달하고자 하는 의욕에 크라우트레포터의 편집자는 인터뷰 기사를 Die westliche Ignoranz hat unnötige Opfer gefordert ('서구의 무지로 불필요한 희생이 초래되었다')라는   제목으로 올렸다. 아직 완전히 위기를 벗어 나지 못한 독일 사회에 던지는 기사 안에 빼곡하게 담긴 오리엔탈리즘과 일상의 인종주의에 대한 글쓴이의 지적이 불편할 수도 있었겠지만, 독일의 독자들은 그에 반발하기보다는 전반적으로 차분하고도 진정성이 담긴 반응을 보여주었다. (아직도 토론이 트위터에서 진행되고 있다: 링크)

 

독일 사회에는 느리지만 전향적인 움직임이 느껴진다. 표면적인 현상에 일희일비해서도 안되겠으나, 불과   사이에 이루어진 변화라는 점에서 적어도 이를 평가할  하다. (관련 연합뉴스 기사)

   


위기 이후 삶에 대한 고민과 토론은 민주주의 시민의 몫이다

 

우리 역시 비판에 경청하는 것을 멈추고 당연한 것을 되묻는데 게을러진다면, 다음의   위기 앞에서  다른 실패를 경험할 수도 있다. 그것은 기후변화일 수도, 에너지 자원 파동일 수도, 그로 인한 새로운 대규모 난민 사태일 수도, 아니면 지금으로서는 예상할  없는 전혀 다른 차원의 위기일 수도 있다. 심지어 코로나 사태 대응에 성공적이라고 평가되었던 한국식 방역 모델이  다른 시험대에 오르는 상황이  수도 있다( 점에 대해서는 전혀 다른 글이 필요할  같다). '과거의 성공 때문에 패러다임을 바꾸거나 개선하는 것이 오히려  어려워질  있다' 성공한 자의 역설이 갈라파고스 증후군과 결합될 수도 있는 것이다.

 

특히 그중 독일이 초기의 혼란과 편견을 극복하고 앞서 한국 모델을 연구했을 뿐만 아니라, 이를 넘어 우리가 포착하지 못한 문제에도 이미 해결책을 모색하고 있는 상황은 구체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다. 위기가 장기화하고 또 반복될 수 있는 상황에서 적용될 수 있고 적용가능한 원칙에 대한 고민들은 우리에게도 의미가 있을텐데 말이다. 무엇보다 위기를 겪은 이후 변화될 사회의 모습에 대해 일부 전문가 들 뿐만 아니라 시민들간에 토론이 이루어지고 합의를 지향하는 모습에 대해서는 더더욱 알려지지 못했다. 각자의 섬에서 벗어나 지구적 위기의 본질을 인식하고 열린 자세로 고민과 해법을 나누는 새로운 의미의 연대가 필요하다.

 

국제적 위기 속에서 개방성과 투명성을 강조했던 방역과 외교의 원칙은 옳았다. 방역과 전염학에 대한 전문가의 조언에 귀를 기울였던 것도 훌륭했다. 다만 이제는 장기화되는 코로나 그리고  이후의 삶에 대한 계획은 일부 전문가에 맡겨 놓아도 좋은 것이 아니다. 그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토론하고 합의해야  당사자는 다름 아닌 시민들 자신이다. 민주주의의 시간이다.


(다음 글 코로나 민주주의 ④ 코로나 속 차별과 혐오에서 이어집니다)

#코로나민주주의


이진

독일 정치+문화연구소 소장

Dr. Yhee, Jean

Direktor, Institut Politik+Kultur (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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