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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서를 Jun 01. 2020

유튜브 해야 되는데

(허언 아님)

‘또 물건이 그 가치를 조금도 잃지 않고 분실되는 운명을 갖는 경우도 있는데, 그것은 다른 두려운 손실을 막기 위해 어떤 물건을 운명의 희생으로 바치려는 의도가 있을 때이다. 그러므로 분실이라는 것은 흔히 우리가 희망하던 희생이다.’



- 정신분석입문, 프로이트





요즘 문득 간절히 유튜브를 하고 싶어졌다. 전국 모든 회사원들의 2대 허언이 ‘퇴사해야지’와 ‘유튜브 해야지’라는 것도 이제 지겹도록 진부한 얘기인데 혼자서 무슨 늦바람이 불었는지 모를 일이다. 3의 배수 년차마다 한 번씩 찾아온다는 퇴사 충동이나 월급쟁이 딜레마가 이런 것인가 스스로도 의아할 지경이다.



아침 출근길 지하철에서 카톡창을 켰다. 예닐곱 해 전쯤 함께 취업 준비를 하던 친구에게 연락을 했다. 신년 안부를 주고 받을 때쯤 그녀가 새해 다짐으로 올해는 꼭 유튜브를 시작하겠다고 선언했던 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너 그래서 유튜브 시작했니? 어. 근데 나 왜 계정 안 가르쳐줘. 대답은 단순했다. 아니, 보려면 봐도 되는데, 하다 보니까 너무 이것 저것 컨셉도 없이 아무거나 올리는 것 같아서 좀 민망하지. 그런 반응쯤은 보는 사람이 혹여 별로라고 할까봐 으레 자기검열을 하는 문명인의 습관적 방어 기제이므로 한 귀로 흘리고 받아쳤다. 야, 브이로그라는 게 다 그렇지 뭐 별 거 있냐. 채널 이름 빨리 말해봐. 아니나 다를까 링크로 받은 채널 속의 내가 아는 이 초심자 유튜버는, 평소에 워낙 글빨과 말솜씨가 받쳐주는 덕에 별 것 아닌 영상마저도 웃긴 자막으로 기가 막히게 살리고 있었다. 남편이랑 에어프라이어에 홈런볼 돌려먹은 얘기, 명동에 생긴 허니버터맛 아몬드 플래그십 스토어 가본 얘기, 야근하고 정신 나가서 모범택시 불러서 집 간 얘기, 지극히 소소하고 평범한 일상이지만 ‘나의‘ ‘웃긴’ 친구가 편집해서 올리니 안 볼 이유가 없었다. 3호선 지하철 안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재생 목록 영상들 다 보니 내릴 역에 도착해 있었다. 그녀는 카톡으로 명언을 남겼다. 야 내가 해보니까, 내 유튜브 내가 제일 재밌어.



그렇단 말이지? 어차피 지금도 내 인스타 내가 제일 재밌고, 누구나 SNS 계정 하나쯤은 다 갖고 있으니 그냥 이렇게 조용히 유튜브 시작해도 별로 욕 안 먹을 듯한 자신감이 몰려오는 거다. 사실 주변에 유튜브 시작한 사람 중 좀 잘 하는 것 같은 이들은 처음부터 아이템이 좋거나 아니면 그냥 꾸준히 하거나, 둘 중 하나다. 스무 살 때부터 만년필을 사 모으기 시작했다는 변호사인 지인은 현재의 재력이 덕력을 빵빵하게 받쳐주는 덕에 퀄리티 좋고 감각적인 만년필·잉크 리뷰 콘텐츠를 시작해 주위의 부러움을 사고 있다. 이건 아이템이 좋은 사례. 고양이를 키우는 고등학교 동창은 고양이 비주얼도 평범, 집사 센스도 그닥인데 어쨌거나 매일같이 새 장난감이랑 신제품 간식 언박싱해가며 부지런히 편집해 영상 업로드한 덕에 팔로워가 꽤 모였다. 이건 묵묵해서 잘 된 케이스. 그러니 나도 그 동안 야심차게 숨겨온 대단한 무기가 있는 게 아니라면, 아니, 아니니, 일단 시작부터 하고 어떻게든 지속해야 한다. 역시 내 유튜브가 세상에서 제일 재밌다며 금지옥엽 애지중지 아껴주면서. 찍느라 들이는 품에 비해 당장은 ROI가 한참 안 나와도 언젠가는 성공하리라 믿고 꾹 참으면서. 그러고 보니 나는 반려동물은 없지만 내 월셋방은 나름 공들여 꾸며놓고 사는 편이고, 자랑할 애인은 없지만 메이크업 튜토리얼 찍을 화장품은 많다. 남들 그렇게 귀찮아 하던 싸이월드 블로그 시절도 나는 싫증 한 번 안 내고 꿋꿋하게 버텼다.



희망회로를 풀가동시키다 부풀어오른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며 회사에 도착하자, 옆 자리 박 과장이 갑자기 호들갑을 떨며 다가온다. 언제나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나와 더 친하다고 착각하는 이들 중 하나다. 최 대리, 인스타 해킹 당했어? 에, 그럴 리가요. 아니야, 지금 빨리 들어가서 봐봐. 자기 스토리에 이상한 거 올라오구, 자기 계정 들어가니까 사진 막 하나도 없고 난리 났어. 그녀의 말이 사실이다. 나의 소중한 1,413개 포스팅이 하루 아침에 전부 사라졌다. 아아, 그렇다면 더더욱 하루 빨리 유튜브를 시작해야겠다.



말 나온 김에 괜히 업무 메일함보다 먼저 구글 계정 로그인 창을 띄워본다. 아, 내 채널 이름 뭘로 하지? 최 대리, 잠깐만 들어와봐. 아침부터 본부장이 찾는다. 최 대리, 날벼락일텐데, 요즘 시국이 시국이라 회사가 많이 어렵잖아. 이런 건 상상도 못하긴 했을 텐데… 어, 미안하지만 우리 말이야, 스텝 부서부터 3개월씩 돌아가면서 무급휴직하기로 했어. 곧 공식 지침문서 내려올거야. 최 대리가 이해 좀 해줘야겠다. 뭐라고요, 본부장님? 네, 뭐. 일단 알겠습니다. 세부 내용 보내주시면 검토할게요… 아아, 더더욱 유튜브를 하루 빨리 시작해야겠다. 아, 채널 이름 뭐 하기로 했더라? 아니, 그 전에 내 구글 비번 뭐였더라? 눈 앞은 갑자기 왜 이렇게 뿌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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