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로라

‘일기예보에 따르면, 머무시는 동안 90% 이상의 확률로 보실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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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사에서 보낸 이메일에는 확신에 찬 문장이 있었다. 세영은 안심했다. 함께 오로라를 보다니,연규와 헤어지기 전 마지막 여행지로 손색 없는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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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둘은 교환 대학 캠퍼스의 기숙사 세탁실에서 만났다. 한국 학생들과 좀처럼 어울리고 싶지 않았던 세영은 처음 봤을 때 연규가 자신처럼 서울서 온 교환학생인 줄 모르고 말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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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여자들은 자기한테 어울리는 스타일링을 너무 잘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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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세영이 이 말을 했을 때 연규는 피식 웃었다. 세탁소에서 마주친 날 연규는 뭐랄까, 그렇게 스스로에게 잘 어울리도록 꾸몄으면서도 전형적인 구석이 눈에 띄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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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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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영이 부르자 길다란 검은 머리를 질끈 묶은 채 빨래를 꺼내던 연규가 돌아봤다. 살면서 염색이나 펌 따위는 한번도 한 적이 없는 건가, 세영은 속으로 생각했다. 스모키한 메이크업을 얹은 연규의 눈이 생긋, 하고 달처럼 휘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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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안녕하세요. 비교 문학 수업 듣는 비토르랑 친구죠? 지난 번 파티 때 같이 있는 거 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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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한국 분이셨구나. 저 비토르랑 친구 아니에요. 그냥 걔 잘생겨서 제가 좀 쫓아다닌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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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이미 알고 있다니, 세영은 조금 묘한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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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세영이 하루 종일 극심한 생리통에 시달리며 기숙사 방에서 데굴데굴 구르던 날, 연규에게서 연락이 왔다. 세영은 수화기에 대고 대체 왜 현대 의학은 생리통의 원인조차 밝혀내지 못하는 거냐고 고래고래 욕을 해댔다. 연규는 금세 강도 높은 애드빌과 핫팩과 꿀물을 가지고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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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학계 정설은 아닌데, 환경 호르몬이 여성 호르몬이랑 유사한 형질을 띠기 때문에 우리 몸이 착각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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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플라스틱이나 유해물질을 줄이면 에스트로겐 과다가 완화되는 것처럼 보여서 생리통이 줄 수도 있다고, 연규는 말했다. 대체 그런 논문은 어디서 읽은 거야, 세영은 기가 막히면서도 밑져야 본전이다 싶어 전자레인지랑 페트병 사용을 줄여봤다. 기분 탓인가, 몇 달이 지나자 정말로 생리 때마다 허리가 끊어질 듯 아프던 게 조금 덜해진 것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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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세영이 한동안 만나던 남자가 있었다. 190도 넘는 키에 쇼핑몰 경비원 출신이며, 겉모습으로는 누구에게도 위협받지 않을 것만 같은 제1세계 백인이었다. 세영은 어느 날 그와 함께 클럽엘 갔고, 화장실에서 나오다 그가 어떤 여자에게 말 거는 모습을 목격한다. 익숙한 얼굴에 세영은 목소리를 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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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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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망해진 연규는 혼자 술 한잔 하고 싶었을 뿐인데 장소를 잘 못 고른 것 같다고 세영에게 말한다. 세영은 남자의 눈은 쳐다보지 않고 연규를 향해 익살스럽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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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됐어. 네가 변명을 왜 해? 나가서 둘이 데낄라 샷이나 마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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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숨에 기숙사 옥상으로 데낄라를 병째 들고 올라온 둘은 오래도록 깔깔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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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간 눈꼬리 좀 길게 빼서 아이라인 그리면 그렇게 만만해 보이나 보지? 재수 없는 놈들 거르기 딱 좋은 필터였다. 너 앞으로 계속 그러고 다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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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연규가 갑작스레 커밍아웃하던 날을 세영은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처음 마주친 날처럼 세탁실에서 빨래를 돌려놓고 차를 마시던 일요일 저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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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 때 말한 동아리 있잖아, 실은 그게, 그냥 여성주의 동아리가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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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여대를 다니고 있던 연규의 소속 동아리는 옆 학교인 세영도 그 이름을 들어본 적 있었다. 세영의 지난 주말 데이트 상대 이야기도 능숙히 맞장구 쳐주던 연규여서 남자한테 전혀 관심이 없다는 건 꿈에도 상상 못 한 일이었지만, 세영은 짐짓 놀라지 않은 척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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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구나, 알려줘서 고마워. 나한테 정말 소중한 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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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영은 머그잔을 쥐고 있던 연규의 손을 꼭 잡아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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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나 진짜 창피한 얘기 하나 해줄까. 이 나이 먹도록 자위 한 번 제대로 안 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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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서가에서 책을 꽂아두다 놀란 연규가 화들짝 세영을 돌아봤다. 세영의 표정은 막 낯 부끄러운 고백을 한 사람의 그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해맑게 낄낄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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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미친 거 아냐?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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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남자랑 섹스할 때도 맨날 내가 콕 집어서 뭘 원하는지 모르잖아. 진짜 한심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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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내가 투머치니까 자세하게 가르쳐주진 못한다. 샤워기를 써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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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워할 때 내 몸에 집중하는 게 제일 효율적이라고? 다음 날 아침, 일어나자마자 세영은 오래 오래 샤워를 해보았다. 물줄기들이 그 어느 때보다 보드랍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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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규의 귀국 날이 한 달 여 밖에 남지 않았을 때 두 사람은 옐로나이프(Yellow Knife)라는 캐나다 그레이트슬레이브호(湖) 근처의 위도 높은 마을로 함께 여행을 떠나왔다. 연규는 늘 오로라를 보고 싶어 했다. 세영은 연규만큼 오로라 자체에 갈증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아메리칸 원주민들이 사는 곳의 문화인류학적 가치를 얕게나마 목도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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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영하 30도까지 떨어지고 가는 곳마다 눈이 무릎까지 쌓여 방한 부츠가 필수인 그 곳에서, 밤이 되자 두 사람은 오로라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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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만약에 여기서 진짜로 오로라 보면, 기념으로 각자 지극히 개인적인 선언 하나씩 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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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민들의 텐트인 티피 속 모닥불을 가만히 지켜보다 세영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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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말 꺼냈으니까 먼저 해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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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규가 부추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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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나는 쓸 데 없는 감정노동이랑 쓸 데 없는 인간관계에서 해방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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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야. 그거 말이 쉽지, 은근 제일 어려운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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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 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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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영이 연이어 묻자 연규는 흐릿한 미소를 머금은 채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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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좀 뜬금없는데… 음. 이번에 한국 돌아가면 가족들한테 커밍아웃하려고. 뭐 좀… 대차게 살아보겠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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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너 웃으면서 왜 그렇게 센 거 걸어. 진짜 오로라 보면 어쩌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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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어때, 보면 진짜로 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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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동안 정적이 흘렀고 밤하늘은 내내 한결 같이 어두웠다. 세영은 문득, 오로라가 나타날 거라던 여행사의 호언장담을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모닥불 그림자가 연규의 새카만 머릿결에 일렁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