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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무형 May 30. 2020

영화 <삼포가는 길>

세미나 발제문

 오늘 우리가 함께 본 영화는 이만희의 <삼포 가는 길>입니다. 이 영화는 1975년 영화입니다. 지난시간에 본 영화 <바보들의 행진>과 같은 해, 같은 달에 개봉했습니다. <삼포가는 길>이 75년 5월 23일, <바보들의 행진>은 5월 31일에 개봉했습니다. 고작 8일차이로 개봉한거죠. 조금 더 재밌는 우연은 <삼포가는 길>의 원작소설인 황석영의 동명 단편은 1973년 9월호 ‘신동아’에 실렸습니다. 그리고 최인호 작가가 쓴 <바보들의 행진>은 1973년에 일간스포츠에 연재되었습니다. 같은 해에 공개된 작품인 셈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보았다시피 두 작품은 완연히 다릅니다. 한 작품은 근대화, 도시화의 열매를 온전히 누리고 있는. 동시에 노동에서 완전히 해방된 유일한 특권계급 대학생들의 정서적 퇴행, 유아기적 태도, 정체성의 혼란을 그리고 있다면 다른 작품은 근대화와 도시화의 물결에 내쳐진 사람들이 겪는 며칠간의 짧은 동행을 그리고 있습니다. 지난시간에 잠시 말씀드렸던 것 처럼, 1970년에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는 외침을 남기고 분신했지만 시대의 요구는 더 많은 노동 더 많은 희생의 강요였습니다. 동시에 전 국민의 ‘숙련공’ 화 였습니다. 숙련공이 되지 못하거나 숙련공이 되었어도 T.O가 모자라면 일자리를 갖지 못하는. 우리가 지금 이야기하는 자본주의적 경제체제가 확립되기 시작한 시기도 70년대입니다. <삼포 가는 길> 속의 세 주인공들은 이렇게 도태된. 현대 자본주의가 확립되던 70년대 한국을 보여주던 자화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영화의 태도, 영화가 다루는 인물이 보여주는 풍경이 이렇게 다른 것은, 원작소설을 쓴 작가들의 성향과 그들이 그린 그 시대 한국의 풍경이 달랐기 때문인 이유도 있을 것입니다. <바보들의 행진>을 쓴 작가 최인호는 당시에 ‘부업 없이 글만 써서 먹고살던’ 거의 유일한 작가입니다. <바보들의 행진>을 쓰기 전에 썼던 연재소설 <별들의 고향>은 전국민적 관심거리였습니다. 지난시간에 이 작품이 어떤 내용인지 잠깐 말씀드렸었죠. 결국 주인공 여성이 호스티스로 전락하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리고 <바보들의 행진>은 당대의 대학생 문화를 그린 작품입니다. 최인호는 고등학교 2학년, 1963년에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등단했고 20대 초반이던 1967년에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한번 더 당선된, 시대의 문장가입니다. 동시에 ‘순수문학’과 ‘대중문학’의 경계를 끊임없이 ‘왔다갔다’ 하던 작가이기도 합니다. 최인호의 70년대~80년대 문학은 이른바 ‘순수문학’이라기 보다는 당대의 세태를 자신의 관점에서 바라본 풍속소설, 대중소설에 더 가까웠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별들의 고향>이나 <바보들의 행진>이 대표적이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최인호의 소설이 언제나 이런 연재소설, 풍속소설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1982년에는 순수문학에 주는, 아마도 가장 사이즈가 큰 상인 <이상문학상>을 <깊고 푸른 밤>이라는 단편으로 수상했습니다. 이때 최인호가 반복적으로 그리는 건 도시 엘리트, 도시 청년, 도시거주민들이 느끼는 공허함, 염세주의적 태도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최인호가 쓴 작품들은 대부분 ‘도시’에서 전개됩니다.


 그런데, <삼포가는 길>의 원작작가 황석영은 조금 다릅니다. 황석영은 역시 고등학교를 자퇴한 19세때 <입석부근>이라는 작품으로 등단했습니다. 신문사 신춘문예로 데뷔한 최인호와 달리 황석영은 <사상계>라는 월간 시사잡지로 등단했는데, 이 잡지는 당시 가장 높은 수위의 사회비판을 담고 있던. 음. 그 결이 완전히 똑같지는 않겠고 밀도도 다르겠지만. 태도만 놓고 보자면 오늘날의 <시사인>에 가까운 잡지였습니다. 이 잡지에서 70년대의 청년작가들. 김지하나 이청준이 등단하기도 합니다. <사상계>는 1970년에 김지하의 시 <오적>을 실었다가 완전히 박살이 납니다. 김지하가 이 시에서 지적한 ‘오적’, 다섯명의 ‘나쁜놈’들은 재벌, 장관, 국회의원, 군장성, 공무원이었습니다. 그리고 김지하는 매우 크게 고초를 겪죠. 물론 황석영도 ‘사상계’에 등단한 이후 활발하게 활동한 것은 아니고, 1970년에 다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본격적인 작가 활동을 합니다. 


 하여튼, 황석영은 최인호에 비해 대학생도 아니었고, 훗날에도 황석영은 대학생이었던 적이 없습니다. 황석영은 베트남 전쟁에 파병갔었던 작가입니다. 첫 등단과 이후 본격적인 활동간의 공백이 설명되는 순간이죠. 이때의 경험으로 쓴 작품이 황석영의 대표작인 <무기의 그늘>이죠. 하여튼. 최인호가 도시거주민들이 겪는 공허함과 혼란을 주로 그렸다면. 최인호의 이 시기 대표작인 <타인의 방> 같은 작품이 대표적인데요. 황석영은 하층민들의 삶, 내쳐진 노동자들의 삶을 주로 그렸습니다. 훗날, 황석영은 광주에 내려가 광주 민주화 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70년대 후반부터 광주에서 활동했고 80년 5월 광주에 대한 사료적 가치를 지닌 서적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를 대표 집필하기도 했습니다. 최인호와 황석영이 어디를 관찰하면 작품활동을 하는 지를 알려주는 사례겠죠. 그리고 <삼포 가는 길>은 <객지>와 더불어 황석영의 대표작으로 꼽힙니다. <객지>와 <삼포 가는 길> 모두. 도시화, 근대화의 그늘을 조명하는 작품들이니. 이것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 <삼포 가는 길>이 <바보들의 행진>과 다를 수 밖에 없을 겁니다.    


 <바보들의 행진>의 감독 하길종은 60년대에 대학시절을, 그것도 미국유학으로 보내고 70년대에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청년세대의 감독이었습니다. 70년대 중반에 시작한 <영상세대> 동인들의 활동을 지난시간에 잠시 말씀드렸었습니다. 비슷한 나이대, 비슷한 학력을 가진. 젊은 엘리트 세대들의 선언이었는데, <삼포가는 길>을 만든 이만희는 이 젊은 세대 감독이 아닙니다. 이만희는 1931년에 태어났고 1961년에 찍은 <주마등>을 데뷔작으로 칩니다. 즉 영상세대 동인들의 입장에서 보기엔 한 세대 전의 감독입니다. 동시에, 한국영화의 전성기이기도 했던 60년대에 활발히 활동했던 감독입니다. 특히나, 60년대에 활발히 만들어졌던 ‘반공영화’. 국군이 나오고 북한군은 나쁜놈으로 나오는. 국방부가 지원하는. 일련의 ‘반공영화’에서 마저 작품성을 심어낸 끈기있는 감독이기도 합니다. <돌아오지 않는 해병>이나 <싸리골의 신화> 같은 작품이죠. 동시에 장르영화. 한국식 초기 스릴러 영화의 원형을 세운 감독이기도 합니다. <삼각의 함정> 같은 작품이 대표적인데요. 물론 히치콕의 영화를 적절히 오마주한. 나쁘게 말하면 갖다 베낀 요소들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말이죠.


 그런 이만희는 70년대에 이르러. 서서히 돈이 떨어지고 영화를 찍기 어려운 상황에 내몰립니다. 이미 <7인의 여포로> 라는 영화를 찍을 때 북한군을 너무 온정적으로 그렸다고 남산에 한번 갔다왔을 정도였으니 요시찰 대상이었고. 흥행에서도 크게 성공하지 못하면서 어려운 상황에 내몰렸습니다.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건강도 크게 상했고요. 왠지 지난시간에 말한 하길종과 비슷한 스토리죠? 여기서 알 수 있는 것. 술은 백해무익 합니다. 


 여담으로. 이만희 영화 중에 이런 영화가 있습니다. 이만희는 7인의 여포로에 얽힌 고충을 겪으면서 감옥도 한번 갔다왔는데. 이때 ‘모범수’에게 특별휴가를 준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이 사연을 가진 여죄수가 특별휴가를 통해 밖에 나갔다가, 어느 한량 같은 남자를 만나고 이 남자와 아주 짧은 시간 동안 불꽃 같은 사랑을 느낀다는 내용의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왠지 이런 내용의 영화를 어디서 본 것 같으실 겁니다. 몇 년전에, 탕웨이와 현빈이 나왔던 영화 <만추>가 바로 이런 내용입니다. 그리고 이 영화는 이만희의 <만추> 리메이크 입니다. 당시 이만희의 영화가 개봉했을 때. 강렬한 이미지가 내용을 압도하는. 서사가 아니라 이미지가 영화를 끌고나가는 독특한 시도로 인해 말 그대로 한국영화의 수준을 끌어올린 센세이션한 작품으로 평가받았습니다. 그리고 이 영화는 현재 볼 수 없습니다. 필름이 완전히 유실되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영화필름을 ‘보관한다’는 개념이 없었고 상영이 끝난 영화필름들은 ‘밀짚모자’에 두르는 테이프의 주요소재로 사용되어 헐값에 마구 팔려나가던 시절입니다. 국내 상영용 프린트는 없는 게 확실하고, 해외영화제 상영용 프린트도 우여곡절끝에 사라졌다는 게 정설입니다. 그래서 이 영화는 오늘날엔 전혀 볼 수 없는 영화가 되었습니다. <만추>는 1966년 영화인데, 훗날 1975년에 김기영이라는. 한국영화사에 길이남을 괴인이 만든 영화 <육체의 약속>으로 리메이크 됩니다. 원작하고는 대략 지구와 안드로메다 행성간의 차이가 있는 영화입니다. 그리고 1981년에는 김수용이 <만추>라는 제목으로 리메이크 했습니다. 그나마 원작을 잘 살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어쨌든, 이만희는 이 <삼포가는 길> 작업에 매우 열정적으로 임했던 것 같습니다. 아 참고로 ‘삼포’는 실존하지 않는 지명입니다. 아마도 ‘목포’를 염두에 두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점점 건강이 안 좋아지고 자신의 마지막이 다가온다는 것을 인지한 상태에서 작품에 임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촬영을 마치고 후반편집을 하다가 사망했습니다. <삼포 가는 길>은 감독이 사망한 뒤에 개봉한 영화인 셈입니다.   


 너무 이상한 마지막 엔딩장면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죠. 남해대교 건설은 당시 정부의 대표적인 치적이었습니다. 이걸 홍보해야 한다는 정권의 부탁에 이만희는 어떻게든 이걸 거부하려 했다고 합니다. 실제 원작에서도 ‘신작로’에 대한 언급이 나옵니다만 주인공 장씨는 매우 떨떠름해 합니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떨떠름해 하는 장씨의 표정에 희망찬 음악이 깔리면서 마치 신작로를 찬양하는 것 처럼 보입니다. 당대의 필름검열이 어떻게 작품에 개입했는지를 알 수 있는 장면이 아닐 수 없죠. 이 후반 편집은 감독의 후배이자,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를 연출한 감독 정진우가 맡았습니다. 어떻게든 영화는 완성을 시켜야 했고, 검열은 피할 수 없었던 상황에서 결국 장씨의 씁쓸해하는 표정과 희망찬 음악을 집어넣어서 검열을 통과해 이만희의 유작을 상영할 수 있게 된 셈 입니다. 이만희는 완성을 못 보고 죽었는데, 이때 ‘긴급조치’로 인해 사람들이 모이는 집회가 금지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만희의 죽음은 당시 편의를 봐주었던 경찰서장의 배려로, 한 쓰레기 하치장에서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모인 채 신속하게 장례절차가 진행되었습니다. 유작도, 그의 죽음도. 시대적 그늘을 증명하는 셈입니다. 


※ 이 발제문은 2018년, 예술인파견지원사업의 일환으로 진행된 인천의 <대안공간 듬>에서 진행된 세미나 <한국영화의 뉴웨이브_돌연변이들>을 위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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