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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무형 May 27. 2020

나의 친애하는 괴작

 <사이보그지만 괜찮아>, <전우치>, <감독 만세> 

 6월 항쟁이후, 90년대가 개막했을 때 한국문화계에 들이닥친 것은 ‘포스트모던’ 열풍이었다. 하지만, 도대체 ‘포스트모던’이 무엇인지 제대로 답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것을 문학에서 상징적으로 그려낸 작가는 하일지다. 하일지는 <경마장 가는 길>을 통해 90년대의 키워드가 되는 ‘무력감’과 ‘포스트모던’을 그려낸다. 우리가 알고 있던 문학의 무게감이 사라진 자리에 인스턴트 섹스와 공허한 언어로 채워 넣은 이 문제작을 영화화 한 감독은 장선우였다. 장선우는 <경마장 가는 길>을 통해 단숨에 거장으로서의 지위를 획득한다. 뒤이어 발표한 <화엄경>과 <너에게 나를 보낸다>의 연이은 비평적 성공으로 인해 장선우는 대체 불가능한 감독으로서의 지위를 공고히 한다.


                               (상영 극장이름이 적혀있던 옛날 신문광고를 보니 기분이 참 묘하다)


 그런데, 장선우는 갑자기 이상한 방식으로 영화 찍기의 궤도를 수정한다. <나쁜 영화>와 <거짓말>은 포스트모던 이라 하기엔 조악하고 실험이라 하기엔 지루했지만 보통 영화라 하기엔 너무 다른 형태를 띠고 있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장선우가 본인의 영화세계를 새로이 조립하기 위한 과도기로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그리고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이 몰고 온 재앙을 통해 장선우는 영화계에서 반강제로 은퇴 당했다.

 

 분명, 고인 물은 썩고 구르는 돌에는 이끼가 끼지 않는다. 거장이라 할지라도 본인의 세계를 끊임없이 부수고 다시 조립하고 새로이 구축하는 부지런함이 없다면 점점 밑천이 드러나고 그 끝은 비극으로 종결된다. 자신의 세계를 새로 구축하는 그 과정 중에 나온 과도기적 작품들은 그것을 보는 관객들로 하여금 당혹감과 생경함을 느끼게 한다. 거장은 그 자신의 이름으로 사람을 기대하게 만든다. 이미 상영관에 들어오는 그 순간 그 감독에게 기대하는 것은 명확하다. 그런데 그 기대를 배신하고 관객의 예상치를 벗어난 곳에 위치하는 작품을 내놓았을 때, 그 작품은 어떻게 보아야 하는 것일까. 실패작일까, 혹은 괴작 일까. 어쩌면, 더 나은 작품을 만들기 위한 시행착오로 보아야 하는 것일까.


<사이보그지만 괜찮아> - 행위의 주체행위의 객체     

 

 박찬욱의 영화에서 여성은 어떤 의미인 것일까. 한국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이자 영원히 풀리지 않을 미스터리인 <올드보이>의 마지막 장면. 혀를 잘라버린 오대수(최민식)가 딸 미도(강혜정)를 만나 끌어안은 뒤 보여주는 저 기묘하고도 서글픈 표정은 오대수가 기억을 잃어버렸다는 증거일까 아니면 기억을 되찾지 못했다는 의미일까. <친절한 금자씨>에서 금자(이영애)는 정말 백선생(최민식)을 사랑했던 것일까? 


  <사이보그지만 괜찮아>는 박찬욱이 복수3부작을 마무리 짓고 2006년 발표한 작품이다. 박찬욱의 영화중에서 멜로를 표방한 현재까지의 유일한 작품이며 비(정지훈)가 스크린에 등장한 최초의 작품이다. 그리고 이 영화는 큰 반향 없이 사라졌다. 이 작품이후 박찬욱은 3년간의 공백기를 갖고 2009년 <박쥐>를 발표한다. 영화의 표면적인 특징만을 놓고 보자면 <박쥐>는 그 이전 복수3부작과 궤를 같이 한다고 볼 수 있지만, 사실은 <사이보그지만 괜찮아>라는 중간다리가 없다면 설명되지 않는 특징이 하나 있다. 박찬욱은 영화에서 멜로를 중심서사건, 부수서사건 간에 중요하게 설정하지만 ‘여성’의 지위를 설정하는 데 있어서는 주저했다. <올드보이>에서 이우진(유지태)이 오대수에게 복수하려 하는 이유는 물론 누나 이수아(윤진서)의 죽음 때문이다. ‘이우진의 자지가 아니라, 오대수의 혀’가 이수아를 죽였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수아는 이우진의 회상에서만 등장한다. 이수아는 자의적으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이우진이 ‘회상’하는 객체로서만 가치를 지닌다. 그것은 오대수에게 미도 역시 마찬가지다. 미도는 물론 이수아에 비하면 능동적인 인물이지만 오대수가 ‘보호하고 싶은’ 대상에 머문다. 바꾸어 말하면 미도는 오대수라는 인물이 없다면 존재할 수가 없다.

 

 <친절한 금자씨>는 여성의 ‘복수’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지만 사실 금자는 계속 복수의 희열에서 미끄러진다. 천신만고 끝에 백선생을 붙잡는 데 성공하지만 금자는 그 자신의 손으로 복수를 마무리 짓지 못한다. 그리고 그 복수의 클라이맥스를 백선생에게 혈육을 잃은 다른 유가족에게 양보한다. 그리고 박찬욱은 이 유가족들을 자칫 비호감으로 보이게 할 대사들을 배분한다. (‘저거 장갑 끼고 하는 거 보세요. 피 안 묻히려고’. ‘아 눈 온다. 차 막히겠네’) 게다가 백선생에게 빼앗긴 돈을 받기 위해 금자에게 계좌번호를 주는 부모들의 모습은, 사실 조금은 기괴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 안에서 금자는 완벽한 성녀가 되어버린다. <친절한 금자씨>에서 금자는 이미지 적으로나 서사적으로 성녀가 되어버리고, 혼자만 반성하는 인물이 된다. 딸 앞에서 케이크에 얼굴을 박아버리는, 차라리 케이크에 머리를 처박음으로써 딸의 시선을 피하고픈 금자의 모습은 분명 인상적이지만 어딘가 막혀있다.


 

 하지만 <사이보그지만 괜찮아>의 영군(임수정)은 박찬욱의 복수극에서 보여주었던 캐릭터와는 전혀 다르다. 영군은 그 자신이 무려 ‘사이보그’가 되고 싶어 하며 할머니에 대한 복수를 하고 싶어 한다. <사이보그지만 괜찮아>는 물론 복수극이라고 부르기엔 무리가 있다만 영군은 자기가 지금 뭘 하고 싶은지 뭘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다. 단지 그게 우리가 보기에 이상할 뿐이다. 가벼운 멜로를 표방한 <사이보그지만 괜찮아>에는 하지만 박찬욱의 영화를 통틀어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라 할 만한 대학살 장면이 등장한다. 사이보그가 된 영군은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를 박살내버린다. 박찬욱은 이 살육의 쾌감을 영군에게 부여함으로써 드디어 여성을 행위의 주체로 격상시킨다. 그 이후 작품인 <박쥐>에서 태주(김옥빈)는 차라리 뱀파이어가 되어 자기를 둘러싼 남편과 시어머니에게서 탈출하고 싶어 하며 <스토커>의 인디아(미아 와시코브스카)는 ‘사이코패스’가 된다. 이 극단적인 변화를 이해하기 위해선 <사이보그지만 괜찮아>는 하나의 참고사례가 되기에 충분하다.      


<전우치> - 무협을 전유하기무협으로 진입하기     

 

 감독 최동훈에게 있어 무협은 그의 상상력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을 차지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리고 그 ‘무협’이라는 장르를 만들어내고 발전시켜온 중국-홍콩 영화의 잔영은 최동훈의 영화들을 지배하는 이미지였다. 데뷔작 <범죄의 재구성>은 ‘범죄 영화’의 전통이 끊어져 버린 한국영화사에 새로운 활력을 전달했다. 하나의 사건을 놓고 수많은 인물이 맞물리고 설계자와 실행자들이 끊임없이 배신하면서 아귀다툼을 벌이는 이 영화는 하지만 아예 새로운 영화라고 하긴 힘들다. 그것은 이미 홍콩 느와르에서 반복적으로 다루는 소재다. 그리고 그 ‘홍콩 느와르’는 거칠게 말하면 무협의 칼을 총으로 치환한 장르다. <영웅본색>에서 오우삼은 이렇게 일갈하지 않던가. “강호의 도가 땅에 떨어졌군!”. 

 

 차기작 <타짜>를 통해 최동훈은 한국식 ‘케이퍼 필름’의 한 전형을 만든다. 그런데, 갑자기 2009년에 발표한 <전우치>를 통해 최동훈은 사극을 시도한다. 그리고 이 작품은 보는 내내 관객을 갸웃거리게 만든다. 하지만, 사실 최동훈은 늘 무협의 내러티브와 이미지를 차용해 왔다. 무협에서 가장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테마는 ‘복수’다. 스승님의 복수, 혹은 형제에 대한 복수. 물론 무협이 진화한 장르라 볼 수 있는 홍콩 느와르 역시 마찬가지다. <범죄의 재구성>은 죽은 형의 원한을 갚기 위한 동생의 복수극이며 <타짜>는 누나의 돈을 날린 고니가 타짜가 되고 스승의 복수를 하는 이야기로 마무리 된다. 즉, <범죄의 재구성>이나 <타짜>나 기본적인 틀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고색창연한 무협의 내러티브다. 하지만 최동훈은 무협을 관객의 시대로 접속시킬 때 무협의 이미지가 선뜻 떠오르지 않도록 ‘설계’한다. 무협의 세계에 동의하는 사람에게 그 세계는 심금을 울리는 세계지만 그것에 동의하지 못하면 ‘유치’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최동훈은 절묘하다고 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대사와 시간대를 뒤섞어버리는 편집을 위시한 장치들을 통해 끊임없이 이 영화가 ‘모던 시네마’라고 착각하도록 유도한다.

 

 그런데, <전우치>에 이르면 이 전술을 사용하기가 곤란해진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애초에 무협의 세계가 배경이기 때문이다. 



 <범죄의 재구성>과 <타짜>가 무협을 ‘차용’해 그 각자의 세계관 안 에서 활용했을 때는 그것이 매력적인 지점이 되지만, 아예 무협의 세계 그 자체로 최동훈이 들어와 버리는 순간 본인이 보여준 창조적인 활력은 크게 감소한다. 그러다 보니 이 작품을 만들 때 최동훈이 택한 전략은 홍콩식 무협이 아니라 한국식 ‘도술’의 세계로 건너가는 것이다. 하지만, 도술이라 할지라도 사람이 축지법을 쓰고 바람을 일으키는 순간 필연적으로 무협의 세계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오히려 최동훈이 더 본격적으로 더 직접적이고 더 노골적으로 무협의 내러티브와 클리셰를 구사했다면 더 새로운 활력이 생겼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범죄의 재구성>은 그것을 한국식으로 변용하기보다 ‘케이퍼 필름’이 주는 재미를 극단으로 밀고 나갔다. 씨네21의 박평식은 이것을 ‘창조적 아류’로 표현했다. <전우치>를 차라리 완벽한 무협활극으로 만들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결국 최동훈은 전우치 이후 3년간의 공백을 갖는다. 그리고 <도둑들>로 돌아와 1000만 관객을 돌파한다. <도둑들>은 최동훈이 가장 잘하는 장르인 ‘무협을 차용한 케이퍼 필름’이다.       


<감독만세!> - 아아위대한 감독이여!     


 “이 무지한 감독은, 국내외의 인터뷰에서 다시는 조폭영화를 만들지 않겠다고 선언해 버렸다. …… 절대로 만들지 않겠다고 선언해 버린 이상, 다시 조폭영화를 만드는 일은 힘들었다.”     

                                                           <기타노 다케시, 감독만세!>     

 

 물론 기타노 다케시는 2010년 <아웃레이지>라는 조폭영화로 컴백하지만, 2007년 개봉된 <감독만세!>에서 다케시는 영화 만들기의 고충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기타노 다케시가 누구인가. 세계가 사랑한 거장이자 일본 최고의 코미디언이면서 동시에 ‘폭력미학’이라는 용어를 계승한 인물이다. 하지만 그도 점점 흥행에 시달리고 창작력이 떨어지면서 영화 만들기가 힘겨운 지경에 이른다.

 

 <감독만세!>는 다케시의 작품에서도 가장 ‘짠한’ 감성을 자아낸다. 그가 만든 새로운 스타일의 조폭영화는 다케시를 상징하는 작품이 되었지만 동시에 ‘조폭영화나 찍는 감독’으로 굳어져 버린다. 다케시는 자신에게 따라붙는 조폭영화 감독 이미지를 벗기 위해 수많은 작품들을 구상한다. <감독만세!>는 다케시가 수많은 영화들을 구상하고 하나같이 슬프게 실패하는 과정을 다룬다. 오즈 야스지로처럼 서민적인 일본인의 생활을 다루는 영화를 찍어보려 하지만 “요즘 시대에 ‘서민’, ‘정서’와 같은 애매한 단어는 낡아 없어져서” 진부하며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가 비교되면서 ‘품격이 없다’는 평가를 받는다.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으려면 러브스토리” 라서 운전사와 부티크 점원사이의 멜로드라마를 만들지만 또다시 조폭이 나와 버린다. 다케시는 ‘진짜 30년대를 보여주지!’하는 다짐으로 시대극을 찍지만 부인에게 무시무시한 폭력을 자행하는 폭력범 다케시가 나오는 막장드라마로(그런데 어딘가 모르게 자기가 직접 주인공으로 출연했던 최양일의 <피와 뼈>를 패러디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귀결된다. 공포영화를 만들면 “그냥 코미디영화 잖아” 같은 비아냥을 듣는다. 막판에 가면 이제 다케시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거대규모의 SF를 찍는데 이쯤 되면 더 이상 눈뜨고 보기 불쌍한 지경에 이른다.



  <감독만세!>를 보면, 한 가지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는 다케시의 영화의 어떤 부분을 사랑하는 것일까. 다케시는 “편집실에서 영화를 구원”하는 감독이다. 되는대로, 찍고 싶은 대로, 영화적인 테크닉, 기교, 법칙에 구애받지 않고 일단 찍어놓고 편집실에서 어떻게든 오려붙여 영화를 구출한다. 그 이상한 작업방식의 결과물들은 보는 사람에게 심정적인 충격을 전달한다. 폭력적인 장면 뒤에 갑자기 코미디 장면이 나오고 정적인 장면 뒤에 갑자기 총격전이 발생하는 방식의 다케시적 편집법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잊을 수 없는 장면들을 선사했다. 다케시는 자신이 ‘거장’이라거나 ‘아티스트’라는 자의식을 잘 내보이지 않는다. 솔직하게 본인의 한계를 인정하고 자기가 좋아하고 찍고 싶은 영화를 찍는다. 흥행에 내몰려 이러저러한 영화들을 구상해보지만 그 안에서 다케시는 자신의 스타일을 지켜나가고 포기하려 들지 않는다. <감독만세!>는 한 감독이 자신을 둘러싼 세계와 끊임없이 싸워나가는 기록처럼 보인다. 그 처절한 싸움을 다케시는 유머러스하게 전달한다. 그 유머러스함은 다케시의 영화를 끊임없이 기대하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2010년의 컴백작 <아웃레이지>에서 다케시는 같은 조폭영화를 찍지만 조금 다른 방식으로 접근한다. 이제 더 이상 휴머니티 없는 완벽한 ‘나쁜 놈들’ 의 세계로 새로이 조폭을 정의한다. 따라서 엄청난 폭발력이 있는 조폭영화로 완성되었다. <감독만세!>는 다케시의 영화가 조금 달라질 것을 예고한 서막과도 같았다.     


그럼에도 우리는 기다리리라     

 

 여전히 나는 장선우의 신작이 궁금하다. 장선우는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이후’에 어떤 영화를 찍을까. 실패의 경험과 반성은 분명 감독을 진화하게 만든다. 그 진화의 과정 중에 몇몇 작품들은 외면을 받고 비판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사람들의 신작을 기다린다. 그가 시행착오를 거치고 그 기억을 갈무리 한 뒤 새로이 만들어낸 세계는 분명 매력적일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그 매력적인 세계를 보기 위한 통과의례로써의 괴작은 그 자체로 어떤 가치를 지닌다. 진화는 실패를 경험해야만 비로소 가능하기 때문이다. 결국, 도전하지 않으면 진화도 없는 셈이다. 거장들의 괴작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메시지는 결국 시도와 도전이 그 만큼 어렵지만 소중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은 아닐까.               


※ 이 글은 2014년, 한국예술종합학교 매거진 <K-ARTS>를 위해 썼다. 6년이 지나 다시 보니, 박찬욱은 <아가씨>에서 탈주하는 여성캐릭터의 전복적 서사를 더욱 완성도 있게 보여주었고. 최동훈은 <암살>을 통해 만주웨스턴과 누아르의 세계에 천착했고, 기타노 다케시는 <아웃레이지> 3부작을 통해 올드스쿨 낭만 야쿠자의 몰락을 처연하게 그렸음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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