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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무형 May 26. 2020

<라 라 랜드>가 색감을 활용하는 법

영향 아래의 연인들

<라라랜드>에서 주인공 미아에게 주어진 주된 색깔은 푸른색이다. 관객의 시선을 붙잡기 위해 직조된 프로덕션 넘버 “Another Day Of The Sun”이 끝나고, 우리가 보기로는 첫 번째인 미아의 오디션 장면부터 미아는 푸른색 문과 푸른색 벽지로 채워진 공간에서 푸른색 점퍼를 입고 연기한다. 그리고 떨어진다.


 할리우드에서 배우로 성공하기 위해 오디션을 보러 다녀야 하고 문화계 인사들이 모이는 파티에 참석해야 하는 미아의 상황을 알려주는 기능적인 역할과 동시에 영화에 다시 한번 활기를 끌어올리는 넘버인 “Someone In The Crowd”가 흘러나올 때도 미아는 계속 푸른색 계통의 옷을 입고 있다. 붉은색 조명이 드리운 욕실(미아와 함께 사는 룸메이트들과 공유하고 있는 공간)에서 푸른색이 칠해진 통로를 통해 미아의 방으로 돌아가면 미아의 방에도 역시 푸른색의 조명이 보인다. 미아는 푸른색 옷을 입고 역시 푸른색 옷을 입은 잉그리드 버그만의 그림으로 벽면을 채운 공간에 앉아있다. “Someone In The Crowd”의 초반부는 파티장에 가자고 꼬시는 친구들의 제안이고 미아는 이 노래에서 후반부에 이를 때까지 ‘집에 있겠다’라는 한 마디 밖에는 가사가 없다. 거절하던 미아가 결국 보무도 당당하게 집 앞으로 걸어 나와 친구들과 합류할 때도 역시 푸른색 드레스를 입고 있다. 미아가 처음 소개될 때. 계속 미아를 따라다니는 색은 푸른색이다. 



 이에 비해 세바스찬의 색은 붉은색이다. ‘봄’ 장면의 시작. 재즈 클럽에서의 그 인상적인 첫 만남(미아를 무시하고 지나갔었다.) 이후 어느 파티장에서 다시 만났을 때 세바스찬은 붉은색 재킷을 입고 파티장에서 연주하고 있는 밴드에서 ‘A-ha’의 “Take On Me”를 연주하고 있다. 노래가 발표되었던 1985년에나 입고 다녔을 것 같은. 물론 세바스찬을 연기한 라이언 고슬링이 입었기 때문에 ‘레트로’한 감성이 터지는 옷처럼 보이지만, 어쨌든 촌스러운 붉은색 재킷을 입고 건반을 연주하고 있다. 재즈 피아니스트인 세바스찬에게는 지금 연주하고 있는 뉴웨이브 댄스 팝이 맞지 않는 옷임을 ‘옷’으로. ‘비유적 표현’을 실체적 이미지로 보여주는 재미있는 장면이다. 


 그리고 그런 세바스찬을 발견한 미아는 신청곡을 받는 밴드에게 세바스찬을 놀리듯이 ‘A Flock Of Seagulls’(A-Ha와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뉴웨이브 록밴드)의 “I Ran”을 신청한다. 

‘A Flock Of Seagulls’는 원색의 무대의상으로 유명한 밴드였고 세바스찬이 연주하고 있는 밴드 멤버들 역시 휘황찬란한 원색을 입고 있으니 미아의 신청곡은 아주 센스있는 선택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연주 후에 미아에게 다가온 세바스찬이 프로연주자한테 “I Ran”은 너무 한다고 투덜거리자 (그런데 A Flock Of Seagulls는 1982년에 그래미 시상식에서 최우수 록 연주상을 받은 적도 있는 밴드다), 미아는 한 번 더 아주 명확하게, 붉은 옷을 입은 세바스찬을 놀린다. 


“옷 좀 빌릴까요? 다음 주 오디션에서 프로 소방관 역 이거든요”



 재밌는 부분은 지금부터다. <라라랜드>는 인물에게 색을 부여한 다음. 인물의 감정, 혹은 관계의 진전을 색을 조합해 화면에 배치함으로써 보여준다. 물론 <라라랜드>는 다채롭고 화려한 원색이 가득한 영화이고 세바스찬과 미아 역시 붉은색과 푸른색만 입고 나오는 건 아니지만, 이 색깔들. 특히 붉은색과 푸른색은 영화의 이미지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주고 인상적인 오브제로 기능한다. 


 세바스찬의 셀프디스에 따르면 그들의 첫 만남에서 세바스찬은 ‘밥맛’이었고. 두 번째 만남에서 그들은 제목과 가사의 심각한 부조화가 압권인 “Lovely Night”(제목은 아름다운 밤이지만, 우린 서로에게 아무 감정이 없다는 내용이다)을 부른다. 그렇게 헤어진 다음 장면에서부터. 미아의 공간에는 붉은색이 서서히 끼어들기 시작한다. <사랑은 비를 타고>에 대한 명백한 오마주로 보이는 미아의 출근길 장면에서 푸른색 벽 사이에 붉은색 소화전과 붉은색 자동차가 보이기 시작하고 미아의 동선에 붉은색 망토를 두른 로마군 병사 옷을 입은 보조출연자들의 무리가 겹친다. 


 다른 색의 의상을 입고 세바스찬을 만났을 때도 화면 어딘가엔 붉은색이 계속 걸린다(미아의 가방끈, 미아가 마시는 음료의 빨대, 그들이 함께 간 극장의 의자). 세바스찬이 재즈클럽에서 피아노를 연주할 때 미아는 붉은색 블라우스(세바스찬의 색)와 푸른색 치마를 입고 있다. 미아가 세바스찬의 집에서 세바스찬이 훗날 개업하고 싶어 하는 재즈클럽의 간판 디자인을 보여주는 장면에서 미아는 붉은색 간접등 아래 서 있다. 


 

 

 

 푸른색으로 칠해진 미아의 세계에 붉은색의 기운이 드리워지는 일련의 장면들은 말 그대로 누군가가 나의 세계 안으로 스며들어 왔음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효과를 발생시킨다. 데이미언 셔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설명하기 어려운 어떤 ‘감정’들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하는 데 탁월한 재능을 입증한 작가이고 그때마다 실로 영화는 ‘시네마틱’해진다. 그런데, 영화가 중반부까지는 미아와 세바스찬 사이의 낭만적인 사랑을 이미지화시켰다면 후반부부터는 사랑이 그들을 할퀴고 가는 순간들을 이미지화시킨다. 이 때 색감은 한 번 더 위력을 발휘한다. 붉은색과 푸른색은 한 번은 낭만적으로, 다른 한 번은 비극적으로 쓰인다.


 존 레전드가 연기한 ‘키이스’의 밴드 ‘메신저스’에 합류한 세바스찬이 상업적 성공을 거두기 시작하면서 서로의 틈새가 벌어지고, 어렵사리 만나서 함께 하려다 재앙이 된 저녁 식사 이후 붉은색과 푸른색은 서서히 슬픔의 정조로 바뀌기 시작한다. 세바스찬이 ‘메신저스’의 투어를 진행하는 동안 미아는 혼자 희곡을 써서 <볼더시티여 안녕>이라는 1인극을 상연한다. <볼더시티여 안녕>의 포스터에는 붉은색과 푸른색이 섞여 있다. 미아가 ‘연극’을 직접 쓰고 연기하기까지 세바스찬은 미아에게 용기와 의지를 북돋우는 존재였으니 세바스찬 역시 미아의 연극이 만들어지기까지 나름의 역할을 해냈고 포스터에는 세바스찬의 색이 들어있다. 




 미아는 무대 뒤 붉은 조명을 받으며 세바스찬이 오기를 기대하지만, 세바스찬은 잡지 화보 촬영으로 인해 미아의 연극을 보러오지 못한다. 세바스찬이 화보 촬영에서 소품으로 쓰고 있는 건반은 백건 자리에 검정색, 흑건 자리에 붉은색으로 칠해놓은 커스텀 건반이고 세바스찬은 ‘붉은색’ 건반을 두드려 “Mia&Sebastian's Theme”의 주선율을 연주한다. 본인이 인정하지 않던 ‘키이스’의 밴드 ‘메신저스’에 합류하게 된 결정에는 미아와의 안정된 삶(정확하게는 타인이 ‘보았을 때’ 안정적인)이라는 목표가 있었다. 하지만 그럼으로서 미아와 점점 벌어진 거리를 느끼고 씁쓸해하는 세바스찬이 붉은색 건반으로 연인의 테마를 연주하는 장면은 아이러니하다. 비약의 가능성을 인정하지만, 미아와의 관계가 아닌 자신이 지금 해야 할 일을 선택한(혹은 할 수밖에 없었던) 세바스찬의 상태에 대한 비유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영화 초반에 등장한 세바스찬의 집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세바스찬은 사는 집의 짐도 제대로 풀지 않았고, 여기 오래 있지 않을 것처럼 이야기했다. 미아가 세바스찬의 집에 들어오면서 서서히 세바스찬의 집에는 조명과 생활의 기운이 스며들었다. 그리고 ‘색’이 풍성해졌다. 마지막에 이르러, 그들의 사랑이 더는 현존하지 않을 때 각자가 각자의 삶으로 떠나간 이후 미아와 세바스찬의 집을 짧게 보여줄 때마저도 <라라랜드>는 집요하게 색의 대비를 보여준다. 


 미아가 남편과 아이와 사는 집에는 인상적인 붉은색 오브제(그러니까, 세바스찬의 색)가 여기저기 날카롭게 배치되어 있다(꽃다발 사이의 붉은 장미, 붉은색 소파). 그리고 세바스찬의 집에는 푸른색 오브제(그러니까, 미아의 색)가 역시 날카롭게 배치되어 있다(냉장고, 푸른 병, 푸른 접시). 이미 끝나버린 시간. 하지만 여전히 영향 아래 있는 연인들. 우연히 미아가 남편과 방문한 클럽의 간판엔 은은한 푸른색 조명 아래, 미아가 디자인해주었던 그대로. ‘Seb♩s’라고 적혀있다. 세바스찬이 앉아 연주하는 피아노 뒤엔 마치 5년 만에 한 공간에서 마주한 그들의 모습을 비유하듯 푸른 조명과 붉은 휘장으로 나뉘어있다. 그야말로 집요하게 <라라랜드>는 색의 대비를 통해 연인들이 서로에게 어떤 의미가 되었는지 시각적으로 구성해 보인다. 


 


 그들의 사랑은 결국 그렇게 끝났다. 물리적이고 육체적이며 사회적인 구분법에 따르자면. 그렇다. 그러나 여전히. 그들이 함께 공유했던 시간의 흔적들은 색깔의 형태로 그들의 남은 삶에 존재한다. 어쩌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사랑은 영속적이지 않았지만 사랑의 영향은 소멸되지 않는 것이라고.


※  이 글은 2018년 가을, 계간 영화잡지 <프리즘 오브> 를 위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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