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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세은 Oct 25. 2020

"기술이 진품(Original)의 아우라를 파괴한다"

발터 벤야민 <기술적 복제시대의 예술작품>

나는 고흐전을 중심으로 최근 유행했던 이른바 ‘체험전’에 가본 적이 없다. 거기에 화가의 진품(Original)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에 배신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심지어 당당히 전시회 이름에 ‘레플리카 전’이라고 명명한 전시도 생겼다. 아마 나처럼 진품을 기대하고 간 관람객의 불만을 사전에 예방하기 위한 타이틀이 아니었을까. 


발터 벤야민이 이런 체험전을 본다면 뭐라고 생각할까. 진품의 아우라 없이 화려한 모습으로 변주되어 진품을 압도하는 복제품들에 둘러싸인 대중을 보며, 자신이 예측한 ‘예술의 대중화’라며 감격할까.


"기술적 복제가 예술작품의 아우라를 파괴한다"


발터 벤야민은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를 통해 예술작품이 복제기술의 발전으로 ‘아우라’를 잃고 대중과 새로운 관계를 맺는 것에 대해 긍정적인 해석을 내리는 듯하다. 예술을 하나의 영역에 가두지 않고 예술이 가지는 정치적 영향력을 크게 해석한 그의 예견은 그가 살았던 시대를 고려하면 놀라운 통찰이지만 과격한 측면도 있다. 


예술작품의 기술적 복제가 가능한 사회에서 위축되고 있는 것은 예술작품의 아우라이다.(...) 예술작품이 진품성(Originality)을 잃게 되는 바로 그 순간, 예술의 모든 사회적 기능 또한 변혁을 겪게 된다. 예술이 의식에 바탕을 두었었는데 이제 예술은 다른 실천, 즉 정치에 바탕을 두게 된다.

- 발터 벤야민 <기술적 복제시대의 예술작품> 中에서 -  


예술이 일부 상류층의 전유물에서 대중들의 삶 가까이로 복제되고 그 복제 과정에 적극 참여하거나 비평할 수 있게 됐다고 해서 그 흐름을 정치적인 성과로 평가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또, 진품(Original)의 가치를 따져가며 예술가와 예술의 위상에 대해 여전히 올려다보며 감상하고 싶어하는 나 같은 관람객들도 존재하기에. 그런 관객들은 아무리 자신의 집안을 고흐의 레플리카나 모네의 그림퍼즐로 장식해놨더라도 그것에 원본만큼의 가치가 있다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음질 좋은 디지털 음원으로 좋아하는 가수의 음악을 듣다가도 그의 콘서트 소식이 들리면 주저 없이 달려갈 것이 분명하다. 그들이 원본의 아우라를 결코 잊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날 오리지널은 정말 아우라를 잃었을까 


예전에도 복제기술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필사나 판화에 의한 복제는 원본과 복제본의 확연한 구분이 있었다. 복제본에 번호를 붙인다면 그 번호의 차이가 유의미했다. 


그러나 카메라가 개발되면서 필름에 의한 복제는 몇 번을 현상하더라도 그 결과 간의 유의미한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다. 첫 번째로 현상하거나, 첫 번째로 상영했다는 사실이 사진이나 영화에서는 전혀 의미 있지 않으므로 그 복제본들 사이에는 우열이 없다.


하지만 오늘날 오리지널의 개념은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다. 기술적으로 복제할 수 있다고 해서 누구에게나 얼마든지 ‘복제할 권리’를 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최초 창작자에게만 그 복제와 공유가 가능한 ‘저작권’이 생겨났고, 누군가가 저작권을 무시하고 불법적으로 복제한다면 그 복제본과 최초의 창작물 간의 차이는 없으나, 그것은 유통되거나 타인에게 전시될 수 없다. 



그것을 창작한 사람으로서의 명예나 인정이 따르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불법복제된 작품의 예술적 생명력은 없다고 볼 수 있다. 오로지 최초 창작자가 소유하거나 유통한 작품에만 생명력이 인정된다면 아우라는 보존되는 것이 아닐까. 나머지는 존재하더라도 그저 불법 카피 표절작일 뿐이니까.


또한, 오늘날에도 여전히 기술적으로 복제될 수 없는 전통적인 회화나 조각이 창작되고 있으므로 그것들의 아우라는 사라지지 않았다. 또한 현대에 각광받기 시작한 설치미술은 어디에 어떻게 전시되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기 때문에 현장성이 중요해졌고 전시 공간의 아우라는 보존된다. 


앤디 워홀은 60년대 실크스크린 기법으로 반복적인 이미지의 작품들을 제작했고, 예술의 대중화를 이끌었다고 평가받지만 그의 작품을 변주해 상품화된 무수한 굿즈들이 그의 원본과 동일한 가치로 평가되지는 않는다. 실제로 그것을 찍어내는 작업도 누구나 할 수 있는 기술적인 것이기에 당시 제작에 제자들이 동원됐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을 제자들의 작품이라고는 평가하지 않는다. 


물리적 기술로 복제하는 것이 대단한 것이 아니게 된 만큼, 현대 예술은 최초 아이디어의 출처가 더욱 중요해졌고, 그것이 ‘저작권’이라는 법적 권리로 보호되면서 오늘날 예술가와 그의 작품들이 아우라를 지킬 수 있게 된 것이 아닐까.


아우라를 위협하는 최종보스, 인공지능 예술가


지금까지는 ‘저작권’에 의해 최초 창작자와 작품의 아우라가 유지됐다면 이 또한 위협하는 새로운 기술이 있다. 창작 과정에서 어떤 인간의 참여도 없이 기계가 자체 기술을 통해 스스로 작품을 탄생시키는 인공지능 예술가의 등장이다. 인공지능에게 저작권이 부여될 수 있을지, 또 인공지능이 창작한 예술작품이 인간이 창작한 것과 동일한 예술적 가치를 가지는지는 의문이다. 


이쯤 되면 ‘예술을 어떻게 정의내려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에 이른다. 무엇이든 예술이 될 수 있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적어도 저작권의 개념 적용을 어디까지 해야 하느냐는 고민은 필요해 보인다. 현재 예술이라는 형태 자체는 인간의 개입 없이 기계기술만으로도 구현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인간의 모든 영역을 차례로 기계가 대체해갈 AI시대에, 예술이 적어도 인간의 창작활동이어야 한다고 규정하는 것은 편협한 생각일지도 모른다.



발터 벤야민은 기술복제시대가 예술의 대중화를 가져올 것이라고 보았고, 실제로 예술가와 일반인들의 경계는 이제 무의미해졌다. 수많은 일반인들이 웹소설을 발표하고, 블로그에 자신의 글을 매일같이 전시한다. 사운드클라우드에서는 누구나 자신이 작업한 음악을 올리고 다른 사람의 음악을 들을 수 있다. 


그들은 일반인이이지만 독자나 팬이 생기는 순간, 예술가의 아우라도 얻는다. 벤야민은 세계대전 시대에 파시즘이 복제기술을 통해 전쟁을 미화하고 대중을 선동하는 것에 우려를 표했지만, 오늘날은 기술 자체가 워낙 대중에게 보편화됐기 때문에 매체가 대중을 선동하는 도구가 되는 것은 힘들어 보인다.


대형기획사로부터 소외됐던 보이그룹 방탄소년탄이 SNS와 유튜브를 통해 세계적 스타가 된 과정은 대중이 예술을 소비하는 적극적인 태도를 잘 보여준다. 유튜브에는 방탄소년단을 비롯해 이러한 대중문화를 즐기는 방식으로 무수한 2차 창작물들이 만들어지고 있다. 


다만 새로운 매체도 일부 권력층에 의해 대중 선동 도구로 악용될 우려가 없지는 않다. 자본이 대중을 동원하여 가짜뉴스를 양산하거나 조작된 댓글, 조작된 리뷰를 만들어내는 것, 대형기획사가 음원차트의 순위조작을 하는 사례도 공공연히 일어난다고 한다. 그런 선동 행위들이 실질적인 대중들의 비판과 평가를 결국 막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지만 일부 여론층을 움직이는 데는 충분히 작용할 수 있을 것이다.


뉴트로 열풍과 디지털 기술의 파괴력


최근 문화 전반에서 뉴트로에 대한 대중의 수요와 관심이 나날이 커지고 있는데 이때 예술문화와 관련된 매체 기술도 과거로 회귀하는 것들이 있다. 디지털 카메라에서 필름 카메라로, 디지털 음원에서 LP판으로, 디지털게임에서 보드게임으로 관심을 돌리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고 한다. 


물론 단순한 향수나 일시적 문화 현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디지털 기술이 생활 문화 전반을 장악하면서 예술은 물론이고 모든 것들이 유일무이한 가치를 잃어버리는 것에 대한 반작용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디지털 기술은 단순한 복제 기술이 아니라 실체가 없는 비물리적인 세계에 인간을 길들였다. 덕분에 현실과 비현실, 실재와 가상이 디지털 안에서 경계를 잃어가고 있고, 예술 문화 영역 뿐만 아니라 전 생활영역에서 모든 것들이 아우라를 잃어가고 있다. 심지어 인간의 존재도 인공지능이나 유전자복제 기술과 같은 새로운 기술에 의해 그 존재 가치를 위협받고 있지 않은가.


벤야민은 전통예술에서 현대 매체 기술의 발달로 사진과 영화가 등장하자, 이것을 긍정적인 대중의 예술화라고 보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대중이 기술을 이용하는 입장에 있을 때까지가 아닐까. 미래의 기술이 인간을 소외시키고 인간을 압도하며 독자적으로 발전해간다면, 반대로 기술이 전 인류를 통제하는 시대가 올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테크노-파시즘’이라 불리우는 기술독재의 시대가.


그럼 그때 테크노-파시즘의 주도자와 찬동자는, 과연 누구라고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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