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세은 Oct 23. 2020

"모든 예술은 전적으로 무용(無用)하다"

오스카 와일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아름다움이 때론 악마적이라고 생각해본 적 없는가?


아름다움은 그 어떤 규범이나 가치체계도 쉽게 뒤흔들며, 그 무엇을 생산하지도, 피력하지도 않고, 그 무엇에도 봉사하지 않으면서 존재 자체만으로도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힘을 가졌다. 우리는 아름다운 사람이나, 예술작품 앞에서 그 어떤 논리적 과정을 거치지 않고 직관적으로 그 위력을 납득하곤 한다. 도덕적 잣대도, 묻고 따질 필요도 없이 스스로 존재 가치를 설득시키는, 압도적인 그 힘. 아름다움.


문득, 학원에서 국어 문법을 가르쳤을 때의 일이 생각난다. 


겹문장의 앞 뒤 의미가 대등적, 종속적으로 잘 연결되었는지 구분하는 객관식 문제에서 보기 중 이런 문장이 있었다. "그녀는 예뻐서 마음씨가 착하다." 나는 그 문장이 인과관계가 성립할 수 없는 잘못된 문장이라고 설명했지만, 대다수의 아이들이 쉽게 납득하지 못했다.

"선생님, 얼굴이 예쁜 게 착한 거잖아요?" 

"아니지, 외모만 보고 그걸 어떻게 판단하니." 

그러자 쏟아지던 야유.

아, 그러고보니 사람들이 "얼굴이 착하다"거나 "몸매가 착하다"는 말을 곧잘 쓰는 게 생각났다. 그리고 속으로만. '그래, 잘생긴 게 착한 거라고 나도 말해본 적 있는 것 같아, 얘들아.'


 
오스카 와일드, "모든 예술은 전적으로 무용하다."

책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의 서문에서 오스카 와일드는 '예술의 무용성'에 대해 언급한다. 실제로 예술이란 합리성의 영역에서 바라보자면 얼마나 쓸모없으며 비생산적인가. 그렇지만 그 무용함이야말로 예술의 존재 의미를 순수하고 숭고하게 만드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 역시도 예술은 평론가나 언론, 대중의 시끄러운 소음과 잡음으로부터 차단되어 온전히 고요한 영역에서 소비되고 감상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누구에게나 철저히 고요한 자신만의 감상의 영역이 보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오스카 와일드가 ‘예술을 위한 예술’을 주장했듯이, 예술은 그 무엇에도 봉사하지 않아야 하며, 단지 존재 그 자체를 목적으로 창조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19세기 말, 도덕에 대한 환멸과 욕망의 틈입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은 19세기 후반, 종교가 무너진 자리에 도덕 대신 피어난 쾌락주의와 악의 꽃으로 타락해가는 ‘도리안 그레이’의 생애를 처절하게 그려낸다. 도리언 그레이의 젊음과 아름다움은 바질에게는 놀라운 예술적 영감을 주고, 헨리에게는 쾌락을 부추기는 자극적인 실험체가 된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도리언은 헨리의 감미롭고 자극적인 말들에 이끌려 쾌락에 서서히 눈을 뜬다.


"유혹을 없애는 유일한 방법은 유혹에 굴복하는 것이야."(...) 도리언은 갑자기 삶이 그에게 활활 타는 불처럼 강렬한 색채로 느껴졌다. 마치 자신의 불길 속을 걸어온 것만 같았다. 왜 예전엔 이 사실을 몰랐을까?

- 오스카 와일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中에서 -


도리언 그레이를 두고 대척점에 서서 설전을 벌이는 두 남자, 바질과 헨리는 각각 당대 유럽에 남아 있던 보수적 도덕주의와 새롭게 등장한 쾌락주의를 대변한다. 또한, 바질의 만류에도 도리언이 헨리에게 쉽게 매료되는 것은 도리언 개인적 선택이라기보다는 종교가 힘을 잃고 윤리 규범이 크게 흔들리던 당대의 시대적 분위기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헨리는 인간의 본성마저 실험대 위에 올려놓으며 도덕을 초월한 쾌락의 추구가 완벽한 인간성을 완성할 것으로 믿는데, 이는 종교가 힘을 잃은 세계에서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처하는 현실적인 대처방식이었는지도 모른다. 

쾌락에의 탐닉, 그 허무한 결말 

흥미로운 것은 소설의 결말이다. 오스카 와일드는 동성애라는 부도덕성을 근거로 비난받고 홀로 쓸쓸히 여생을 보내야 했던 자신의 생을 마치 예감하고 투영한 것처럼, 쾌락을 추구한 도리언 그레이의 마지막을 허무하고 초라하게 그린다. 

영화 <도리안 그레이> 中 한 장면


그는 자신을 향한 숭배의 구절을 여러 번 반복해서 되뇌었다. 그러던 중에 자신의 미모에 혐오감을 느껴, 거울을 바닥에 내던지고는 발꿈치로 짓이겨 산산조각을 냈다. (...) 그를 파멸시킨 것은 바로 그의 미모, 즉 그가 간절히 기도했던 미모와 젊음이었다.  - 오스카 와일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中에서 -


결국 타락마저 아름다운 악의 꽃은 없다는 것일까. 아니면 단지 유미주의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기존 가치체계와의 괴리에서 올 수 있는 혼란과 불안을 경고한 것일까. 도리언 그레이의 최후는 비참하지만, 동시에 아주 인간답기도 했다. 아름다움은 모두에게 찰나의 기쁨이기에, 의미가 있는 건지도 모른다.


오스카 와일드는 “도리언 그레이는 내가 되고 싶었던 존재고, 헨리 워튼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자신이며, 바질 홀워드는 실제 내 모습”이라고 말했다. 그의 유미주의는 실제 삶에서는 사회적 관념이나 도덕적 규범에서 끝내 자유롭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인간이 결국 사회적 존재이듯이, 그 또한 자신이 사랑하는 것(결혼 이후에 사랑에 빠진 어리고 아름다운 동성연인, 화려한 패션 등)들을 주변의 관계 속에서 인정받으며 추구하고 살기를 원했을지 모른다. 도리언이 자신의 타락해가는 영혼을 들키기 두려워했던 것처럼, 오스카 와일드 또한 사회적으로 허용받지 못하는 쾌락에의 탐닉은 결국 허무한 몰락을 가져올 뿐이라는 것을 내심 한탄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아름다움은 원래, 그 아름다움을 가장 사랑하는 이에게 가장 잔인한 법이다.






이전 05화 "직업으로 한다는 것은 때로는 악과 손잡는 것"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