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세은 Oct 28. 2020

"인민은 대표자를 갖는 순간 더 이상 자유롭지 않다"

장 자크 루소 <사회계약론>

제네바의 시민 장 자크 루소는 <사회계약론>의 서문을 이렇게 시작한다. “나는, 인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법을 있을 수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정당하고도 믿을 만한 통치의 법칙이 정치사회 속에 있을 수 있는지를 알아보고자 한다.” 


그의 이러한 사고실험에 가까운, 이상 정치와 정당한 권력에 대한 끈질긴 고민은 훗날 자유를 외치는 프랑스 시민 혁명의 도화선이 된다. 인간은 원래 자유로운 존재로 태어났으나, 왜 오늘날 인간은 쇠사슬에 묶인 노예처럼 살아가는가? 


사회 안에서 시민들이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모습을 꿈꾸었던 그가, 과연 현대의 정치모습을 보고 노예에서 벗어났다고 확신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적어도 나는 여전히 현대에서도 보이지 않는 쇠사슬을 느끼고 있으니까. 


전제군주와 노예제도 비판, win-win의 사회계약


인간의 자유와 평등에 대한 루소의 인식은 이전의 다른 학자들의 주장을 비판하는 대목들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루소는 1부 2장에서 흐로티위스와 홉스의 견해를 언급하며, 이들은 마치 인류가 여러 가축의 무리로 나뉘고 그 무리에 주인이 있다고 보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그리고 어떤 인간도 같은 인간에 대해 타고난 권위를 갖지 못하며, 권리를 만드는 것이 결코 힘이 아님을 들어 반박한다. 


또한, 어떤 이들은 노예가 되기 위해 태어났다고 사실상 노예제도를 인정한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해서도 결과를 원인으로 착각하는 잘못된 추론을 했다고 말한다. 최초의 노예를 만든 것이 본성이 아닌 폭력이었음을 지적한 것이다. 


이러한 루소의 주장은 현대인의 인식과 매우 가깝다. 시대인식을 고려했을 때 ‘정당한 권력’에 대한 그의 고민의 깊이는 남다르게 느껴진다. 그가 비슷한 시기의 어떤 학자들보다 민중의 편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또, 그는 전쟁과 탐욕으로 시민을 괴롭히는 전제군주에 대해서도 ‘주는 것 없이 자신을 공짜로 바치라는 것’이라며 그 불합리함을 지적한다. 루소는 한쪽에게만 권위를 주고 다른 쪽이 무한히 복종해야 하는 계약은 무의미하며, 계약을 맺는 구성원들 모두에게 이익이 있어야 진정한 의미의 사회계약이라고 규정한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사회계약의 이익은 로크처럼 개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존하는 것에 불과한가? 



루소의 ‘보편적 의지’는 실재할까

- 더 나은 사회를 위한 성숙한 시민 의식


다른 사회계약이론과 루소의 다른 부분은 계약이 가져오는 한 차원 높은 발전적 이익에 있다. 루소가 말하는 사회계약은 개인이 자신이 가진 모든 권리를 공동체에 전적으로 양도했을 때 발생한다. 자신의 권리를 모두 양도하고 백지 상태로 평등해진 개인들은 저마다 자신의 신체와 힘을 공동의 것으로 만들어, ‘보편적 의지’라는 최고 지휘권 아래 둔다. 


이 때 ‘보편적 의지’는 ‘개인의지’의 단순한 합이 아니며, 구성원 전체를 위한 공공의 이익에 부합하려는 의지다. 따라서, ‘보편적 의지’는 언제나 옳고 시민은 그에 복종해야 한다. 이것이 구체적으로 구현된 것이 바로 ‘법’이다. 


하지만 이 ‘보편적 의지’라는 개념은 현실 속에서 그 실체가 모호하다. 법에 적용해 보면 더욱 그러하다. 과연 한 사람도 빠짐없이 ‘전체를 위한’ 이익이 되는 정책이나 제도가 얼마나 될 것인가? 우리는 저마다 살고 있는 지역, 계층, 빈부, 성별 등에 따라 모두 다른 입장에 놓여 있다. 현대사회에서의 정치참여는 다양한 시민단체와 지방자치 등 더욱 분화된 집단들이 스스로의 권익을 피력하는 방향으로 이뤄지고 있는데 이러한 정치 참여 모습을 루소는 ‘개인 의지’의 충돌일 뿐이라고 생각할지 궁금해졌다. 


그렇다면 루소는 실제로는 불가능하고 이상에 불과한 ‘보편적 의지’를 내세워 그럴 듯한 몽상을 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루소에 의하면, 사회계약을 통해 자연인에서 사회인으로 발전한 시민은 동물적인 본능에서 벗어나 타인과 공동체의 이익을 고려하는 성숙한 인간의 모습을 되찾는다. (‘되찾는다’는 표현을 쓴 것은 본래 인간은 선한 본성을 가졌는데 악한 사회제도 때문에 변질되었다가 정당한 사회계약에 의해 ‘보편적 의지’로 일깨워진다는 루소의 의도를 반영한 표현이다.) 


또한, 결국 실패하지 않고 안정적으로 존속하는 좋은 정부란 시민들이 사사로운 이익을 꾀하고픈 개인 의지에서 벗어나, 루소가 말하는 ‘보편적 의지’에 가까워지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탄생한다고 생각한다.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를 위해 힘쓰는 것, 조금이라도 다 같이 잘 사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구성원들이 단결하려는 의지, 그것이 곧 ‘보편적 의지’를 뜻하는 것 아닐까. 


즉 ‘보편적 의지’라는, 한 명도 빠짐없이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정답’은 실재하지 않더라도 타인을 배려하고 타인의 이익에 협력하는 것이 곧 나의 이익으로 돌아온다는 성숙한 시민 의식을 향하는 방향성 자체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가장 좋은 정부는, 가장 강력한 감시에서 나온다 

- 무관심한 현대 시민은 자유롭다고 착각하는 노예일 뿐


독재자에 의한 군주정치는 그 잘못이 쉽게 눈에 띄지만 민주정치에서는 개인의 자유를 우선하는 것으로 포장하기 때문에 언뜻 보면 문제없어 보이는 ‘중우정치’가 되기 쉽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시민은 끊임없이 정부를 감시해야 하는데 특히, 루소는 로마를 예로 들어 다수의 시민이 행정관으로 직접 참여하는 민주정치를 이상적으로 제시한다. 


“그 수도와 주변의 그토록 많은 인민을 자주 소집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웠을지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로마 인민은 몇 주 만에 한 번씩, 아니 수차례 소집되었다. 그들은 주권자로서의 권리뿐 아니라, 정부의 일부 권리도 행사했다. 그들은 상당한 양의 국사를 다루었으며, 소송 재판도 했다. 그러므로 모든 인민은 광장에서는 대체로 시민이자 행정관이었다” - 3부 12장 中 -


루소는 정부의 자잘한 일까지도 직접 챙기고 심판하는 로마 국민을 치켜세우는 동시에 당시 영국 국민에 대해서는 이렇게 언급한다. 


“영국 인민은 자신들이 자유롭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은 크게 잘못 생각하고 있다. 그들은 의회의 의원 선출 기간에만 자유로울 뿐이다. 의원을 선출하다마자 그들은 곧 노예가 되며, 별것 아닌 존재가 되어버린다. 그 짧은 자유의 기간 동안, 그들이 자유를 행사하는 것을 보면 자유를 빼앗겨도 마땅할 정도다” - 2부 15장 中 -


이런 그의 비판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뼈아픈 지적이다. 우리는 투표일에만 자유롭고, 선거기간에만 반짝 정치에 관심을 기울이며 나머지 날들은 국가가 어떻게 돌아가고 어떤 법이 제정되는지 대체로 무관심하니까. 심지어 누가 되든 어차피 똑같다며 투표권마저 스스로 포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감시를 게을리하는 국민은 잘못된 정치에 침묵으로 동조하는 셈이고, 루소의 말에 따르면 정부가 실패하는 지름길이다. 


주권은 양도될 수 없듯이 대표될 수도 없다

-현대사회 대의 민주정치의 문제점과 근본 원인


그렇다면 우리는 왜 정치에 무관심해지는 것일까? 루소는 민주정치에 대해 언급할 때, 엄밀한 의미에서 진정한 민주정치는 존재한 적이 없다고 말한다. 다수가 지배를 하고, 소수가 지배를 받는다는 것은 자연의 질서에 어긋나며, 인민이 공무를 위해 끊임없이 소집되는 것 자체가 불가능에 가깝다고 본 것이다. 


루소는 민주정치가 아주 특별한 경우에만 가능한데 첫째, 국가가 아주 작아서 국민이 잘 모일 수 있어야 하고 둘째, 풍습이 단순해 공무가 간단해야 하며 셋째, 지위와 재산상에 평등하고, 넷째 사치가 아주 적든지 없어야 한다. 즉 모든 시민이 사욕이 아닌 공익을 위해 자주 모여 나랏일에 적극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는, 불가능에 가까운 전제다. 


루소가 민주정치에 이렇게 까다로운 전제조건을 단 것은 그가 가장 이상적인 정치 형태를 직접민주정치로 보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오늘날 어떤 나라도 이처럼 직접민주주의를 제대로 실현한 나라는 없다. 일을 효율적으로 처리하기 위해 대부분이 간접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는데, 이는 루소 입장에서 보면 이상적인 모습은 아닐 것이다. 루소는 국민들이 정치나 공공업무에 무관심하고 오직 자기 일에만 신경 쓰게 되면 국가가 멸망한다고 단언한다. 그가 생각한 대의(간접) 민주주의의 폐단은 심각했다. 


“조국애의 약화, 사익을 위한 활동, 국가의 거대화, 정복, 정부의 권력 남용은 총회에서 인민의 대의원, 혹은 대표자를 생각해 내게 만들었다. (...) 주권은 양도할 수 없는 이유와 마찬가지로 대표될 수 없다. (...) 인민은 대표자를 갖는 순간 더 이상 자유롭지 않다.” - 3부 15장 中 


나는 이러한 루소의 의견에 공감하는 바가 적지 않았다. 실제로 국회의원들의 공무행위 중 많은 부분이 나와 의견이 불일치하거나 만족스럽지 않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로마와 달리 직접민주정치를 행할 수 없는 이유는 시민 의식이 부족하기 때문일까. 


물론 국가의 규모와 시민의 인구가 급격히 확대된 것도 있지만, 나는 가장 근본적으로 자본주의로 인해 물질 추구와 생업행위가 지나치게 삶의 많은 부분을 차지해버린 데에 원인이 있다고 생각한다. 고대 도시국가에서 시민들이 정치 토론을 벌일 수 있었던 것은 그 만큼 한가했기 때문이다. 정치에 참여하는 동안 노예들이 생업을 위한 노동을 대신했으니까. 하지만 오늘날 시민들은 한가하지 않다. 노예제는 사라졌으나 그 덕에, 시민들은 스스로 자본을 생산하기 위한 노동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않은 몸이 되었다. 


따라서, 루소가 가장 이상적으로 제시한 민주정치에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우리는 정치에 충분히 참여할 수 있을 만큼 노동에서 자유로워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곧 최저임금제나 노동자 복지제도의 개선과도 직결되는 문제일 것이다. 


더 이상 돈이 우리를 완전히 자유롭게 하지 않는다는 데에는 다수가 동의할 것이다. (돈을 벌어 수많은 물건들을 사들이는 일이 공동체를 위한 일보다 가치 있고, 즐거우며, 나에게 이익이 된다고 국민 다수가 생각한다면 루소의 말처럼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미래는 더 이상 없는지도 모른다.) 



편견과 제약, 관습을 뛰어넘는 진정한 자유를 위하여 

- 우리는 가능한 것만 꿈꾸지는 않는다


루소가 마지막 챕터에서 시민 종교를 다룬 것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실제로 루소는 이 때문에 남은 생애를 쫓겨 다니며 보내야 했다고 한다. 기독교 주류의 시대에서 가장 민감한 부분을 건드린 셈이다. 


하지만 그가 이런 결과를 예측하지 못했을까. 다신교를 인정하지 않는 기독교의 강경한 태도가 다른 민족이나 종교집단과의 마찰을 불러일으켜 사회 통합에 방해가 된다는 그의 주장은 매우 날카롭고도 용기 있는 지적이었다. 종교 갈등은 현대에도 여전히 해소되지 않는 민감한 현실 문제이고, 그가 시민 종교의 가장 필수적 요소로 꼽은 ‘관용’은 이 시대에도 여전히 절실한 가치다. 


그가 강조한 ‘관용’적 태도는 종교 문제뿐 아니라 현대 사회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집단 간의 갈등에서도 유의미하다. 사회 갈등을 해소하는 첫 걸음이 타인의 입장을 이해하고 인정하는 태도이며, 가장 빠른 길은 타협과 협력을 위한 소통과 토론이기 때문이다. 


이 ‘관용’이라는 간단한 단어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알기에 많은 이들이 평화적인 사회 문제 해결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말하는지도 모르겠다. ‘관용’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은 거대한 편견의 벽에 맨몸을 부딪치는 지난한 싸움의 여정일 것이다. 하지만 불가능에 가깝다고 해서 꿈꾸는 것을 포기할 것인가. 


문득 언젠가 이효리가 손석희와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 떠오른다. “유명하지만 조용히 살고 싶고, 조용히 살지만 잊혀지기는 싫다는 말을 했는데, 그건 가능하지 않은 꿈이 아니냐”는 손석희의 물음에 그녀는 “우리가 가능한 것만 꿈꾸지는 않지 않느냐”고 되물었다. 그녀의 그 당연한 듯한 말이 쉽게 잊히지 않는다. 우리는 늘 꿈을 꾸었지만, 그것이 가능하기 때문에 꿈꿔온 것은 아니었다. 


나는 루소의 ‘보편적 의지’를 향한 믿음이나 인간 본성에 대한 그의 선한 시선이 결국 현대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고 믿는다. 그의 이상적 정치에 대한 주장을 ‘실제로는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유토피아적 망상으로 치부하는 것은 미래에 대한 이른 패배 선언이다. 


그는 이상주의자였을지는 모르지만 그 이상을 실현하는 것이야말로 편견과 제약, 관습을 뛰어넘어 인간이 진정한 자유에 이르는 길이다. 인간의 잠재력은 무한하고, 노동에서 자유로워진 성숙한 사회인들이 공동체를 위해 다 같이 협력하는 날이 온다면 그 국가가 완벽한 모습이 아닐 이유는 또 무엇이겠는가. 루소의 후예들이 수많은 사람들의 꿈을 모아 늘 새로운 역사로 부단히, 그리고 묵묵히 나아갈 것이다. 


꿈을 혼자서 꾸면 꿈에 지나지 않지만 

꿈을 모두 함께 나누어 꾸면 반드시 현실이 된다 


꿈을 머리나 입으로만 꾼다면 꿈에 지나지 않지만 

몸으로 자기 몫의 고통으로 받아 나가면 반드시 현실이 된다 


꿈을 젊어서 한때 반짝 꾸고 말면 꿈에 지나지 않지만 

생을 두고 끝까지 꾸어 나간다면 반드시 현실이 된다. 


- 박노해, <꿈을 모두 함께 나눈다면> 中 -






이전 03화 "국가는 나의 재산을 보존하기 위해 출발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