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덮고 문득 ‘신은 죽었다’라는 니체의 청천벽력과도 같은 명제가 어떤 짙은 허무주의를 가져왔을지 상상해본다.
언제나 한 시대의 문이 닫히고 새로운 시대의 문이 열리는 것은 그 시대를 맞이한 사람들의 의지나 소망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격하게 과장한다면 칼을 든 강도와 같이 갑작스러운 침략과도 같고, 새 시대의 거친 흙발은 오랜 세월 견고히 보살펴 온 안온한 옛 시대를 과감히 밟고 부순다.
혼동의 격변기를 냉철하게 관찰하고 분석한 막스 베버의 통찰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관통하는 명쾌한, 그러나 혹독한 성찰과 각성이었다. 그가 남긴 두 권의 강의록을 읽는 동안 마치 거인의 어깨에 앉아 멀리 세상을 조망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베버의 어깨를 빌어 나는 목도했다. 근대라는 거대한 새가 알을 깨고 나오는 광경을.
근대의 문이 열리고: 급속한 관료화와 자본주의화
베버의 학문과 직업에 대한 성찰은 근대에서 일어나기 시작한 급속한 관료화와 자본주의화에 대한 분석에서 비롯되고 있다. 대학이 자본에 의해 기업화되고, 정치 조직은 관료화되어 영혼 없는 관리자들이 정치 정책들을 기계적으로 수행하는 현실. 베버는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직업(소명)으로서’ 행위하는 것으로 답을 이끌어낸다.
학문은 오늘날에는 <자기성찰>과 사실관계의 인식에 기여하기 위해 전문적으로 행해지는 <직업>이지, 구원재(求援財)와 계시를 희사(喜捨)하는 심령가나 예언자의 은총의 선물이 아니며 또한, 세계의 의미에 대한 현인과 철학자의 사색의 일부분도 아닙니다. - 막스 베버 <직업으로서의 학문> 中에서 -
자본에 학문의 연구 가치가 함몰되어서는 안 되고, 관료주의로 인해 정치가 영혼을 잃어서도 안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위해 학문을 해야 하는가? 그리고 어떻게 영혼이 있는 정치가가 탄생할 수 있는가? 베버가 말하는 ‘직업(소명)으로서’ 한다는 것의 의미에 그 해답이 있지 않을까.
‘직업(소명)으로서’ 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베버가 말하는 ‘직업으로서의’ 정치나 학문은 그렇지 않은 정치가나 학자와의 차별성에 주목하게 했다. 이것을 ‘직업’ 대신 ‘소명’으로 번역한 책도 많은데 나는 개인적으로 두 단어의 함의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흔히 ‘프로의식’이라는 말을 쓴다. 나는 직장생활과 여러 일을 배우고 경력을 쌓아가면서 ‘프로의식’이라는 말이 급료를 받고 일하는 이상으로 나의 쓸모를 실적으로 입증하려는 정신자세와, 과도한 요구나 불합리한 시스템과 마주했을 때 이것들과 적절히 타협하고, 더 나아가 이것을 적절히 역이용할 줄 아는 처세술,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결과에 대해 깔끔하게 책임지고 때로는 머리 숙일 줄 아는 태도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았다.
베버 또한 두 강의록을 통해 ‘직업으로서’ 한다는 것은 때로는 ‘악과도 손잡는 것’이라는 것을 강조하는데 이것이 오늘날의 프로의식과 비슷하게 느껴졌다. 특히 정치가가 신념윤리와 함께 책임윤리를 가져야 한다는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일반적으로 정치를 하고자 하는 사람, 특히 정치를 직업으로 삼고자 하는 사람은 (...) 모든 강제력 속에 숨어 있는 악마적인 힘과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정치는 전혀 다른 과제, 즉 폭력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는 과제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 막스 베버, <직업으로서의 정치> 中에서 -
한편, 베버는 학문을 하는 사람은 그의 모든 열정과 능력을 바쳐서 ‘헌신’하는 태도로 임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정치를 하는 사람도 “열정과 균형감각을 가지고 단단한 널빤지를 강하게, 서서히 구멍을 뚫듯이”해야 한다고 말한다.
베버는 학자가 추구하는 궁극적인 진리나 정치가의 이상 정치의 실현을 향한 길은 평생을 헌신하고 자신의 운명을 거기에 내던지는 어떤 ‘장인정신’과 같은 모습으로 그려내는데 이는 ‘소명으로서의’ 모습이라고 번역하기 알맞은 모습이다. 학문이든 정치든 뜻대로 되지 않는 비극성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그 모든 것을 ‘내가 가야하고 감내할 길’, 즉 ‘소명’으로서 받아들이는 태도를 강조한 것이 아닐까.
‘악’은 영원한 동반자일까: 악과의 관계 청산 가능성 여부
베버는 근대국가가 폭력이나 공권력을 독점하는 방식으로 성립되었고, 사적인 폭력이 공적인 폭력으로 넘겨지면서 정치가 가지는 ‘폭력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또한, 직업으로서 학문을 하는 사강사가 ‘요행’으로 좋은 직책을 얻게 되는 것이 흔한 일이라고 말하면서 이러한 불합리성과 폭력성을 피할 길 없는 동반자처럼 설명한다.
하지만 과연 이러한 ‘악’은 감내하거나 역이용하면서 어쩔 수 없이 함께 가야할, 영원한 동반자일까?
SBS 드라마 <추적자>
간혹 정치드라마를 보면 시스템의 모순이나 비열한 책략, 공권력을 앞세운 폭력의 행사 등을 그 자체가 정치적인 성질인 것처럼 묘사한다. 그러나 정말 그런 뒷공작이나 폭력이 동전의 앞뒷면처럼 정치에는 존재할 수밖에 없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근대국가에게 주어진 공권력 또한 감시를 통한 적극적인 비판과 평가가 이루어지고, 학문을 하는 사람들 간에 학연, 지연이 아닌 합리적인 선발과 진급 체제를 갖추는 일이 불가능한 일일까. 나는 이 일이야말로 ‘널빤지에 구멍을 뚫듯이’ 인내심을 가지고 언젠가는 해내야 하는 일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학문은, 의미의 폐허에서 ‘유의미’한 오솔길을 찾아내는 투쟁
베버는 근대 과학의 발전이 신의 절대적인 신비의 영역을 없애고 그 미지의 공간을 앎의 공간으로 바꾸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우리가 원하기만 하면 언제라도 삶을 둘러싼 지식을 얻을 수 있고, 어떤 힘도 원래부터 신비스럽고 예측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 오히려 모든 사물이 계산을 통해 지배될 수 있다는 확신은 커져 갔다. 세계의 탈주술화야말로 주지주의화가 낳은 의미 있는 진보였다고.
하지만 삶을 지배하기 시작한 학문은 비합리적인 것마저 주지주의로 분해하며 새로운 권력을 얻기 시작했다고 베버는 지적한다. 과학 기술을 종교처럼 숭상하는 재주술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학문이 알 가치가 있다는 이러한 전제 자체는 결코 증명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학문들이 서술하는 이 세계가 존재할 가치가 있는 것인지, 그 세계가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인지, 그 세계에서 사는 것이 의미가 있는 것인지는 더 더욱 증명될 수 없습니다. - 막스 베버 <직업으로서의 학문> 中에서 -
그가 단연코 말하는 ‘학문은 의미가 없다’는 말은 곱씹을수록 주지주의의 참의미를 깨닫게 한다. 학문을 하는 사람들은 일종의 예언가처럼 신자들을 끌어모으듯이 자신의 학문에 가치부여를 하는 것을 경계한다. 하지만 학문에서 가치와 의미를 찾는 것이 아니라면 의미의 폐허에서 우리는 무엇을 찾아야 하는가? 또한, ‘의미가 없다’는 말이 학문(과학)의 가치중립성을 의미하게 되는가?
나는 베버가 살았던 근대를 고려했을 때 그는 막 거대한 종교의 힘에서 가까스로 빠져나와 힘들게 얻게된 학문의 ‘합리성’이 또다시 재주술화로 위협받는 것을 경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과학에서 가치를 도출하고자 하는 것을 비판한 것이지, 과학적 행위가 가치로부터 자유롭다는 ‘가치중립’으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고 본다.
나는 그의 학문에 ‘합리성’에 대한 강한 수호의지는 ‘범비판주의적’ 성격을 띠며 모든 학문을 ‘상상할 수 있는 한 가장 엄격하고 객관적인 비판’을 통해 가장 알 가치가 있는 지식으로 제련해야 함을 말하고 있다고 느꼈다. 이것이야말로 의미의 폐허에서 ‘유의미’를 발견해내는 투쟁이자, 이 과정에서 자신의 신념이 깨어지기도 하고 평생에 걸친 헌신이 요구되기도 하기에 ‘소명’으로서의 학문이라 할 만하다.
베버의 강의는 보수적인 동시에 진보적이고, 이상적인 동시에 현실적인 모순을 모두 담아내면서도 명쾌하고 명징했다. 근대에 대한 막스 베버의 통찰도 놀라웠지만, 그의 관념에 그치지 않는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방법론에 더욱 마음이 끌렸다.
그는 달콤한 꿈만 꾸면서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것도, 자기 현실에 도취되어 지나친 가치 부여를 하는 것도 엄중히 비판하고 있었다. 이러한 경고를 새겨들어야 할 대상이 비단 학문이나 정치를 하는 사람뿐일까.
현실을 직시하는 힘, 그러면서도 진정 나아가야 할 방향을 놓지 않게 하는 도도한 ‘맑은 정신’이 막스 베버에게는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