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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세은 Oct 27. 2020

"국가는 나의 재산을 보존하기 위해 출발했다"

로크 <통치론>

로크의 <통치론> 속에서 기술되는 인간의 모습은 매우 이성적이며 또한, 개인적이어서 현대인의 그것과 매우 닮아 있었다. 그리고 그 내용 또한 300여 년 전을 훌쩍 넘어왔다는 점만 아니라면 전혀 놀랍지 않을 정도로 친숙했다. 


그의 저서로부터 현대인의 역사와 사고방식이 그대로 뻗어 자라온 것처럼 그의 자유주의 사상은 현대의 정치, 경제, 문화 전반에 여전히 녹아 있다. 그래서 로크의 <통치론>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보다 훨씬 가깝고, 쉽게 납득이 갔다. 다만 지금은 너무 당연한 것들을 역으로 당위성이 어디에서 왔는가로 거슬러 올라가는 그의 설득 과정이 낯설고 흥미로웠다. 


과연 내가 왜 자유롭고, 왜 재산을 당연한 듯 소유할 수 있으며, 잘못된 정치에 비판하고 국가의 수장을 향해 탄핵을 외치는 것을 나는 왜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가? 


국가 이전의 상태로 거슬러 올라가 로크가 상정하는 ‘자유상태’는 인간의 자연적(원시적) 상태에 대해 내가 가지고 있던 빈약한 상상력을 반성하게 했다. 국가를 형성하지 않은 인간들이 마치 흄이 말한 ‘만인 대 만인의 투쟁’처럼 거칠고 탐욕적인 이미지일거라고 생각했던 나는 로크가 말한 ‘자유상태’가 반대로 평화롭고 질서 있는 모습이라는 것에 의외성을 느꼈다. 


여기에는 자연을 지배하는 자연법도 존재해서 그 안에서 인간들은 다른 사람의 생명, 자유, 소유물에 위해를 가하지 않으려는 이성적 삶을 영위한다. 하지만 로크에 따르면 개인의 ‘자연 상태’는 타인의 자연법 위배 행위를 통해 간단하게 ‘전쟁 상태’로 바뀌게 된다는 큰 위험을 안고 있다. 


로크는 소유권, 즉 ‘사유재산권의 침해’를 가장 큰 갈등 요소로 보고 있는데 이를 보다 안전하고 효율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시민사회를 형성했다고 본다. 로크의 이러한 노골적이고 단순한 목적 설정은 그 어떤 관념적인 설명보다 설득력이 강하다. 공동체는 결국 ‘나의 재산을 보존’하기 위해서 출발했다는 것이다. 

1. 인민의 합의에 의한 사회 형성, 현대인들에게도 여전히 사회는 ‘합의의 산물’인가? 


로크는 ‘자연상태’의 위험을 벗어나 자신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공동체를 결성하는 데 ‘합의’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이 사회 구성 시기에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물론 내 스스로 ‘합의’한 기억도 없다. 이는 로크 또한 이미 예상한 반론으로 “모든 인간은 이미 존재하는 정부 하에서 태어나고, 그 정부에 복종하며, 따라서 새로운 정부를 창설할 만큼 자유롭지 못하다”는 주장이 가능함을 제시하고 있다. 나는 오히려 이러한 반론이 더 설득력 있어 보인다.   


우리는 가정과 학교에서 ‘사회화’라는 과정을 거치며 이미 속한 사회에 ‘적응’할 것을 강요받게 된다. 이미 형성되어 있는 사회는 그 이후 태어난 후손들에게까지 다시금 새로운 사회를 구성할 선택권을 주지 않는다. 


물론 국가 안에서 개인은 시민단체를 구성하거나 정치적 활동에 참여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사회를 ‘표현’할 권리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동의하고 합의하는 사회를 애초에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것과는 매우 다르다. 로크는 이미 합의된 공동체에 동의하지 않는 개인은 얼마든지 새로운 국가나 공동체를 창설할 수도 있다고 반박했지만, 태어나면서부터 내가 속한 공동체의 규율을 관습과 문화로서 습득하는 현대인들에게 애초에 그것을 ‘선택’할 수 있는 것으로 ‘인식’하는 것 자체가 힘든 일이 아닐까. 


오늘날 현대인들은 ‘상식(사회화)’이라는 이름으로 이 사회의 당위성과, 이 사회를 지탱하게 하는 정치적, 경제적 사상에 동조하는 것을 강요받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들었다. 



2. 노동에 의한 사유재산의 발생, 그렇다면 ‘화폐’는 과연 노동의 표지인가?  

- ‘불로소득’과 ‘임금 노동’의 문제 


로크는 ‘자연’이라는 공유지에서 어떻게 ‘소유’와 ‘재산권’이 발생하는가를 설명하면서 ‘노동’의 가치를 강조한다. 자연은 ‘노동’을 첨가해야만 재물이 되며, 대지는 그것을 개간하고, 파종하고, 개량하고, 재배한 자만이 그것을 소유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이 때 로크는 한 개인의 소유가 다른 개인이 소유할 권리를 침해하지 않도록 소유권의 한도를 제한하는데,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만큼 즉, ‘사용되지 않아 상하는 일이 없는 정도’라고 규정한다. 하지만 문제는 이러한 제한 기준이 ‘화폐’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소유의 한계가 소유물의 크기가 아니라, 상해서 무익한 것이 되었는가로 규정함으로써 결코 상하지 않는 ‘화폐’의 무한한 축적을 쉽게 용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화폐’가 무한하게 보존되는 잉여생산물임을 생각할 때 사회적 불평등이 심화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로크는 이 문제를 자각하고 있으면서도 인간이 화폐사용에 암묵적으로 동의했으므로 이 또한 재산권으로서 법률에 의해 보호받을 수 있다고 설명함으로써 사회불평등의 문제를 묵인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가 살았던 시대가 산업혁명으로 경제력이 급성장한 부르주아가 강력한 세력으로 등장하던 때임을 고려할 때, 당시 ‘화폐’의 힘은 일정부분 절대왕정으로부터 시민으로 권력이 이동하게 하는 평등에 기여했을 것이다. 그러나 ‘화폐’에 의한 재산이 온전히 보호받을 때 그것은 세대를 걸친 상속을 통해 현대에 이르러서는 거대한 자본이 되고, 이는 로크가 그토록 강조했던 ‘노동’을 무력하게 하는 ‘불로소득’이나 ‘임금노동’의 기반이 되어버린다.   


그렇다면 오늘날 노동하지 않아도 돈을 버는 사람들과, 노동을 아무리 열심히 해도 자신의 임금 수준을 노동에 합당하게 높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존재하는데도 로크의 주장대로 ‘화폐’를 노동에 의한 사유재산의 하나로 여전히 규정할 수 있을까? 


만약 로크의 기본 주장대로 소유가 ‘노동’에 의해서만 발생한다면 썩지 않는 ‘화폐’는 자연물과는 전혀 다른 규정으로 제한돼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노동을 했던 사람이 사망한다면 화폐는 그 노동에 기여하지 않은 자손에게 세습되는 것이 아니라 몰수, 환원되는 것이 맞지 않을까. 사용되지 않으면서 끝없이 세습되는 ‘화폐’의 어마어마한 힘은 오늘날 단순히 타인의 재산권이 아니라 생존권까지 침해하는 폭력적인 ‘갑질’의 모습을 하고 있다. 

3. 현대사회에서 법률은 가진 자의 재산권을 유지하는 데에도 기능하는 동시에, 못 가진 자의 재산권을 쟁취하기 위해서도 기능할 수 있는가? 


로크는 소유권을 이야기하면서 자신의 몫 이상을 취한다면, 다른 사람에게서 빼앗은 셈이 되고, 그가 사용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저장하는 것은 부정의한 일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화폐’는 위에서도 말했지만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많이 가졌다고 해서 그것이 썩어 무익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다른 자연물과는 성격이 다른 소유물이다. 


만약 많은 ‘화폐’를 정당한 노동을 통해 축적했다면 그 부유층의 재산권 또한 보장되어야 할 것이고, 반면 현재 노동의 양에 비해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받고 있지 못한 빈곤층이 있다면 그의 재산권도 보장해주어야 한다. 그렇다면 현대 사회에서 가진 자와 못 가진자의 관계가 ‘갑-을’의 관계, ‘고용자-피고용인’의 관계로 대부분 설정되어 있다고 할 때 이 둘의 재산권을 모두 보장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이것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현대 정치권력이 소수 부유층에 기여하거나, 다수 빈곤층에 기여하는 상반된 정책의 한쪽만을 선택함으로써 지지기반을 획득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또한, 선진국이 행하는 적극적인 복지는 일종의 투자로 절대적으로 많은 세원 확보가 요구되는데 이 과정에서 개인의 재산권을 침해한다고 해석될 여지가 있다. 예를 들어 스웨덴과 같은 복지선진국에서 시행하는 ‘연대임금제’는 수익이 높은 노동자들이 그렇지 못한 노동자들을 배려해 급여를 양보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이러한 연대는 개인의 재산권보다 사회공동체의 유지가 더 우선한다고 볼 수 있고, 로크의 사회계약 목적에 위배된다. 


그렇다면 결국 사회 시스템은 어떤 식으로든 일정 계층이 재산권 면에서 더 불리할 수밖에 없으므로 모든 시민의 재산권을 지키는 데에는 기능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4. 현대 시민사회의 역할, 여전히 개인의 재산권 수호가 최우선인가? 
- 이제는 개인주의 아닌 ‘연대’로 나아가야 할 때 

스웨덴의 연대임금제가 ‘더 가진 자’ 쪽의 재산권을 분명히 침해하는 데에도 시민이 이러한 정부에 동의하고 받아들임으로써 사회가 유지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로크의 주장에 의하면 이러한 사회는 개인의 재산권을 수호하려는 정당한 저항권에 의해 해체되어야 마땅하다. 그 누가 자신의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고 자신의 재산이 줄어드는 것을 기꺼이 찬성할 수 있을까. 최근의 보편적 복지와 연대의식에 대한 관심은 현대에 이르러 전 세계적으로 나타난 사회문제들이 개인주의와 파편화로 인한 불평등 심화와 공동체의식 상실로 인한 것임을 깨달은 데 대한 반작용이라 할 수 있다. 

과연 현대사회에서 진정한 ‘복지’란 무엇일까. 


만약 사회 속에서 살아가면서도 기본적인 생계조차 위협을 받으며 살아간다면 그것은 로크가 말한 정부 이전의 자유상태, 아니 ‘전쟁상태’에 가깝다. 로크가 주장한 사회공동체의 존재 이유를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회는 현대에도 여전히 공공의 선, 모든 시민의 최상의 복지를 위해 존재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를 위해서 현대사회의 복지제도는 빈곤층을 여전히 빈곤층으로 버려둠으로써 격차해소에 기여하지 못하는 선별적 복지가 아닌 빈곤층을 빈곤층에서 벗어나게 하는 보편적 복지의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러한 적극적인 연대가 결국에는 가진 자의 일방적인 손해가 아닌 가진 자를 포함한 사회 전체의 삶의 질 향상으로 실질적으로 기여한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복지선진국으로 알려진 북유럽의 국가들이 삶의 질 또한 세계적으로 높다는 인식을 이미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17세기의 로크는 산업 발전 속에서 급성장한 ‘노동’과 ‘재화’의 가치, 그로 인해 발생한 ‘시민의 재산권’ 수호, 그리고 이를 위협하는 왕정 체제의 전복과 공정한 법 집행이 실현되는 시민사회를 꿈꿨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노동’의 가치는 사라졌고, ‘재산권’은 시민 전체가 아닌 일부 계층에게만 더 강력하게 작용하며, 법은 오히려 그들에게 봉사하는 수단처럼 보인다. 과연 로크가 이 시대에 살아 있다면 이러한 사회의 모습을 두고 시민 모두가 합의한 공동체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 로크의 사상은 오늘날 급격히 변한 사회모습 만큼 현대적 변용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제 사회는 로크 수준의 개인주의적 목적에서 벗어나 인류 전체의 삶의 질 향상을 목적으로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진정으로 모든 시민이 행복한 사회란 나만 행복해서는 안 되며, 모두가 행복한 사회여야 한다. 기아, 전쟁, 실업이 난무한 사회에서는 그 누구도 진정으로 행복할 수 없다. 그것이 21세기의 내가 생각하는 현대 사회가 ‘자유 지상주의’를 버리고 ‘연대’의 슬로건을 들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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