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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세은 Oct 27. 2020

"쉽게 용인하고 충분히 만족하는, 우매한 민중들"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내가 속해 있는 이 사회는 크게는 정치 체제, 작게는 국방, 경제, 의료, 교육, 노동 체제 등의 하위 체제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정치는 이 모든 하위 시스템의 성격과 특징을 결정하는 데 막대한 영향을 끼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학창 시절뿐 아니라 그 이후 선거권을 가지는 성인이 된 이후에도 이상적인 정치 실현을 위해 개인이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배울 기회가 거의 없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관심을 가지면 가질수록 학교 사회 시간에 배운 교과서적인 지식들이 얼마나 단편적이고 현실정치와 거리가 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과연 우리는 우리의 삶의 근간을 바꿀 수 있는 이상적인 정치 실현,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국가를 만들기 위해 무엇을 고민해야 할까? 그리고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은 정치란 무엇이고, 정치 체제로서 성립 가능한 다양한 모습들 중에서 이상적인 정치 체제를 모색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준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크다. 나 또한 내가 속한 사회의 역사나 문화에 의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 오늘날 대한민국의 정치 체제에 대해 근원적인 비판의식을 가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과연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이상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가 하고.  

차등적 계급과 수직적 질서, 탁월한 1인에 대한 시각 차이 

일단 시대적 차이(노예제도가 존재했음)를 고려하더라도 가장 거슬리는 부분은 차등적 계급을 인정하고 그들의 능력이나 자질 또한 이에 대해 차별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시각이다. 


가정 내에서는 특히 수직적 질서를 강조했는데, 가부장적 권위와 주인과 노예의 관계를 명확히 구분하여 제시했다. 그러나 그 당시의 사회적 관습을 고려해 그런 부분을 넘어간다고 해도 의문이 남는 것은 재산(富)을 기준으로 빈부에 따라 권력과 권한에 차등을 두려는 부분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오늘날 금수저라고 할 수 있는 선천적인 부유의 대물림을 그대로 인정하고 그것이 마치 하나의 자질과도 같은 자연적 탁월함으로 보는 것 같다. 그리고 본성적인 면에서도 탁월하고 뛰어난 자질을 갖춘 자가 따로 있을 수 있다고 보았고, 그러한 1인이 이끄는 정체는 다수가 이끄는 정체보다 더 이상적일 수 있다고도 말한다. 


과거 왕정 시대에 현명한 왕이 이끌었던 시대의 업적을 돌아본다면 진정으로 탁월하게 뛰어난 1인이 이끄는 국가가 과연 오늘날의 민주정체보다 나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중산계급에 대한 예찬, 정치에도 ‘중용’이 통할까? 


두 번째로 아리스토텔레스가 가장 이상적인 정체로 제시한 민주정과 과두정의 혼합 정체에 대한 의문이다. 일단 그는 상대적으로 오늘날 현대인들의 인식에 비해 왕정이나 귀족정에 우호적이고, 혼합정이나 민주정에 부정적인 것으로 느껴진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국가의 정체가 다수에 의한 혼합정이나 민주정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가 어쩔 수 없이 내린 결론으로 보인다.) 


그는 정체에도 윤리학의 핵심인 ‘중용’을 그대로 적용해 지나치게 부유하거나 가난하지 않은 중산계급이 이끄는 혼합정을 강조하는데 과연 그들이 부의 편재 면에서 중간에 위치한다고 해서 가장 이성적이고, 가장 공익적인 태도를 가질 수 있다는 그의 생각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 마치 재산에 대한 개별인간이 가지는 각기 다른 욕구들을 질서정연하게 줄 세울 수 있다는 말로 들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부정적으로 바라 본 빈민에 의한 민주정과 부자들에 의한 과두정은 오늘날 현대 민주주의 내부의 갈등 요소와 매우 닮은 부분이 있다고 생각되었고, 그가 비판한 지적들이 의미 있게 다가왔다. 


특히 민주정체에서 변혁이 일어나는 원인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민중선동가들의 무절제’를 지적했는데 부자들을 공격하도록 대중을 공공연하게 부추겨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려는 시도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민중선동가들의 사주를 받아 민중이 부유층을 지나치게 박해하면 부자들은 다시 민주정체에 맞서 단결하여 과두정체로 이행될 수 있다고도 했다. 

현대 사회에서도 부자는 소수이고 다수의 민중이 상대적으로 가난하기 때문에 민주 정체 아래 다수의 민중의 인기에 영합하기 위한 포퓰리즘은 성행한다. 가난한 사람들의 1표들이 모여 수적으로 우세한 권력을 획득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대중 영합적인 정책은 일시적으로 통화를 팽창시키거나 경기를 인위적으로 활성화하기 위한 극단적 정책으로 나아가 미래에 더 큰 경제 위기를 불러오기도 한다. 민중은 당장의 이익이 아닌 미래에도 지속 성장가능한 국가경제를 위해 올바른 정책이 무엇인지 판별하는 눈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이상적인 정체는 구성원들의 빈부 격차를 더 벌리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어야 한다. 

또한, 중용의 미덕을 사회적으로 구현한 것으로 ‘법’을 강조했는데 오늘날의 법치주의는 헌법이 가장 우선하며 헌법은 시민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기에 시민에 의해 ‘법’ 또한 어떻게든 변화하고 재해석되거나 폐기될 수 있다고 본다. 


이러한 법치주의를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에도 여전히 현대에 의미 있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고 생각된다. 실제로 ‘법’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태도는 현대 시민들 사이에서도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법치주의가 법에 따른 기본 질서의 수호인지, 절차적 정당성에 의한 상대적인 법 적용인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문제다. 

“우매한 민중들”, 다수의 침묵하는 시민을 향한 일침  

마지막으로 아리스토텔레스가 으뜸가는 민중을 ‘농민’으로 꼽으면서 ‘직공, 상인, 품팔이꾼’은 질이 떨어지는 열등한 계층으로 정치를 방해하는 민중으로 지적한 점이 인상적이다. 


물론 농민들조차 민회에 자주 참석하지 않으면서 정체를 용인하고, 공직자로 선출되지 않더라도 심의권으로 충분히 만족하는 우매한 민중으로 봤다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오늘날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다수의 시민들이 생업에 바쁘고 당장 자신의 이익과 직결되지 않는다고 해서 많은 중요한 사회 현안에 침묵하는 것을 생각할 때 그의 이러한 지적은 충분히 받아들여야 할 부분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대다수 민중들이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을 전제함으로써 포퓰리즘의 위험성이나 우매한 민중들이 만들어내는 다수결의 실패를 사전에 차단한 것이 아니었을까. 

결국 현대 민주주의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깨어 있는 시민들이 필요하다. 선거기간만 달콤한 유혹으로 선동하는 민중선동가들을 가려내고, 중장기적으로 발전적인 정책을 내세우는 정당을 지지하는 일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 바탕에는 건강한 민주 시민이 되기 위한 시민의 역할에 대해 현실적이고도 구체적으로 가르침을 주는 교육이 기반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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