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독서 클럽에서 물리학자인 김상욱 교수님을 클럽장으로 처음 만나뵀던 날의 일이다. 과학에 쉽게 접근가능한 개론서로 첫 시간을 연 클럽의 멤버들 중에는 과학 분야 전공자나 관련 직종자들도 있었지만 나 같은 문과 출신이나 과학책을 읽는다는 것 자체가 낯선 사람들도 꽤 있었다.
토론이 시작되자 다소 엉뚱하거나 비과학적이고, 인문학적 시선의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우리는 덕분에 와르르 웃기도 했다. 하지만 교수님은 단 한 번도 웃어넘긴다든지 단답형으로 일축하지 않고 그들의 관점에서 문제를 바라보기 위해 오래 듣고, 오래 이야기하셨다. 의외였다. 불쾌함이나 답답함을 숨기고 계신 것은 아닐까 내심 걱정스러웠다.
나는 쉬는 시간이 되자마자 당돌하게도 “과학 초보자들이 엉뚱한 질문을 던지는 게 답답하시죠?”하고 웃으며 물었더랬다. (아마 교수님은 기억하지 못하시겠지만) 그 때 교수님은 마치 화를 내듯이 정색을 하며 “전혀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시고는, “그들의 질문이 답답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내가 생각해보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해줘서 새로운 자극을 받고 있고, 내 분야에서 적용해볼 것들이 많다”고 말하셨다.
그 때 나는 교수님의 정색하는 얼굴이 그렇게 멋져 보일 수가 없었다. 이 짧은 대화를 지금까지도 강렬하게 기억하는 이유다.
김상욱, 장하석 교수님의 공통점이 있다면, 한 분야의 연구자로서 다른 분야와 이론에 대해 강렬한 호기심을 가지고 열린 태도로 접근하는 학자라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옳다는 상대주의로 판단을 유보하는 것도 아니다. 새로운 의견에 대해 강렬하게 빨아들이고 치열하게 고민하고 적용해본 후 그것의 의미를 모두와 이야기하고 싶어 한다.
나는 두 학자의 이런 태도를 접하면서 이것이 인간에게 있어 진정한 앎의 자유를 극대화한 형태, 가장 짜릿한 형태로 탐닉과 소통을 하는 삶의 방식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노이랏의 은유와 ‘진보적 정합주의’
- 비과학적 발상은 진상 규명에 무의미할까
과학이 진리가 아니라는 저자의 말에 동감한다. 장하석 교수는 인간이 진리를 갈구하는 것은 종교적 열망이며, 종교와 과학은 추구하는 목표가 다르다고 말한다.
과학이 진리를 알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는 말은 언뜻 허무감과 배신감을 주기도 하는데, 그는 과학이 자연에 대한 ‘진상’의 규명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저자가 6장에서 언급한 노이랏은 지식에 확고한 토대가 없으며, 절대적 진리 같은 개념은 형이상학의 영역이지 과학의 영역이 아니고 형이상학은 실증적 의미가 없기 때문에 학문으로서 논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것이 비트겐슈타인과 통하는 부분이 있어 흥미로웠고, 무엇보다 노이랏의 은유에 매우 공감했다.
“지식은 물이 약간 새지만 떠다니는 배와 같다. 과학자들은 그 배를 타고 가면서 조금씩 고쳐서 더 짜임새 있고 물이 새지 않게 할 수밖에 없다.” - <장하석의 과학, 철학을 만나다> 中 노이랏의 은유 -
이에 대한 저자의 입장은 ‘진보적 정합주의’로 요약된다. 과학은 확실하지 않은 토대를 기반으로 시작하여 연구를 통해 점진적으로 지식의 체계를 더 크게 늘려가고 더 정합성 있게 재구성할 수 있게 한다는 입장이다. 그렇기에 서로 다른 주장은 하나가 선택되고 하나가 폐기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보완해주거나 새로운 발견을 위해 필요한 것이 되기도 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과학은 진리를 추구해서가 아니라, 개별 인간의 다양한 인식과 체험의 영역 중에서 그나마 다수가 공통적으로 수긍하고 자신의 삶에 적용해볼 만한 영역을 다루기 때문에 방법론적 면에서 많은 지지를 받았던 것 같다. 하지만 저자가 말하는 ‘진상’을 규명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흔히 비과학적이라고 말하는 분야는 어떻게 취급되어야 하는지 궁금해졌다.
포퍼의 반증주의에 의해 비과학으로 판명난 것들은 저자의 다원주의적 과학에서는 배제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고실험이나 은유와 같은 것들은 실증적인 과학적 방법론이 아님에도 언급되고 있다. 다원주의적 과학이라고 할 때, 다양한 이론의 수용 범위는 어디까지 허락해야할까.
“과학지식에도 은유가 필요하다”
저자는 과학의 전부를 전문가만의 영역이라고 보지 말자고 하면서, ‘물은 항상 100도에서 끓는다’고 암기하는 것이야말로 주입식 교육의 허점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말한다. (그가 강의 중에 실제로 물을 끓이며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과학 지식을 반박하는 장면은 꽤 인상적이다.)
또, 일반인들의 아마추어적 연구가 전기화학의 발전을 가져 온 사례는 대중의 실천적인 접근을 흥미롭고 보여주고, 역사적으로 잊혀진 과학 실험을 재현하며 새로운 탐구 과제를 발견하는 창의적인 발상을 가능케 한다.
이 책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을 하나만 꼽으라면 “과학지식에도 은유가 필요하다”는 문장이었다. 비유는 문학적인 방법으로 매우 개인적인 정서 표현의 방법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아직 밝혀지지 않은 현상을 설명하거나 공유하려할 때 가장 직관적으로 와 닿는 방법이다.
나도 내 생각이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은유를 즐겨 쓴다. 은유는 독립된 인식 체계에 일시적인 공감의 영역을 만들어주는 멋진 스킬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통하는 이유가 새로운 개념을 설명하거나 이해하기 위한 인간 나름의 인식 체계이기 때문인지, 실제로 세계가 어떤 본질적인 공통점(이데아)이나 통하는 진리를 공유하고 있어서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은유’가 가장 간결하면서도 효과적으로 앎을 확장하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트랙을 달리는 경주마에서, 대지를 달리는 야생마로
- ‘모난 돌이 정 맞지 않는’ 사회를 꿈꾸며
책에는 실려 있지 않지만, 강의의 마지막 13강에서는 청중의 질의응답이 이루어진다. 획일적이고 권위적인 과학 교육을 받았고, 정책적이고 운영적인 측면에서 합리성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 각 분야의 실무책임자들(기관 관계자, 교사, 교수 등)이 다원주의에 대한 우려와 의심을 제기한다.
이에 대한 장 교수님의 답변이 인상적이었고, 한 분야에 집중하는 과학자들이나 사회 시스템의 한계를 현장에서 느낄 수밖에 없는 관련 업무자들과는 다른 과학 철학자로서의 어떤 임무나 역할 같은 것을 거기서 느낄 수 있었다.
이 책의 마지막 문단에서 저자는 다원주의에 입각해서 본 철학의 임무에 대해 짤막하게 언급한다. 철학자는 남들이 하지 않는 생각을 대신 함으로써 사회 발전을 돕는 역할을 하며, 사회의 경직화를 막고 다양화를 촉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가 던지는 ‘다원주의적 과학’, ‘겸허의 과학’은 현실적인 어려움 이전에 가장 이상적인 방향을 제시하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토마스 모어가 현실 비판에 기반해 그린 이상향에 대해 ‘어디에도 없는 곳’이라는 유토피아를 명명했듯이, 철학자로서 그의 주장 역시 비판과 이상을 함께 담아내고 있다고 본다. 현재 획일적인 과학 교육과 편중된 과학 정책에 대한 비판과 함께, 앞으로 개선 방향에 대한 시사점을 준다.
현재 공교육에서 길러내는 인간형은 트랙을 잘 달리는 경주마다. 자신의 트랙을 잘 달리기 위해 시야를 가리고 다른 트랙은 생각하지도 않으며 뒤도 돌아다보지 않는다. 저자는 우리가 트랙을 달리는 경주마로 살아오면서 느끼지 못했던 앎의 행복과, 소통의 짜릿함을 대지를 달리는 야생마가 됨으로써 느낄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듯하다.
우리는 경주마로 성장하면서 자유롭게 달리는 방법이나 소통하는 방법, 달리다 부딪치는 문제들을 해결하는 방법조차 배우지 못한 것 같다. 우리가 자랐던 환경은 모난 돌이 정을 맞고, 트랙을 벗어난 말이 채찍질을 당하는 획일적이고 권위적인 사회였기 때문이다. (그런 환경이 익숙한 독자이자, 어린 시절부터 독특한 생각이나 비 주류적 취향으로 정을 맞아온 당사자로서, 장하석 교수의 주장은 개인적으로 큰 위안과 힘이 됐다.)
“국가에서 주는 과학 예산의 1 퍼센트만 나처럼 별난 사람들에게 주면, 거기서 유용한 무언가가 탄생할 것이다.” - <장하석의 과학, 철학을 만나다> 中 러블럭의 엉뚱한 착상
나는 예전부터 진정 행복한 사회란 ‘덕후들이 행복한 사회’라고 생각해왔다.
애초에 현실 삶의 문제에서 단 하나의 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각자의 방식으로 각자의 답을 찾아나서는 삶의 방식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단지 과학 분야에 국한하지 않고, 전체 구성원들이 각자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마음껏 심취하고, 서로 심취한 것들에 대해 거리낌 없이 소통하면서 서로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인간으로서 가장 행복한 이상 사회이지 않을까.
망망대해에서 망가진 배를 고치는 데에는 과학자도, 예술가도, 축구선수도, 전업주부도 각자의 방식으로 힘을 보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