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역사는 늘 살아남은 승자들의 것이었다. 그래서 역사는 승자들이 독식하는 세계였고, 특히 인류는 지구상에서 가장 독보적으로 군림해오며 자신들만의 역사를 써내려왔다.
하지만 유발 하라리는 인류가 스스로를 기만하면서까지 유지해 온, 때로는 무자비하고 때로는 어리석은 선택과 진화의 발자취를 가감없이 폭로하며 인간중심적 인식에 비판의 날을 세운다. 이 책의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바로 저자의 시선이다. 마치 자신은 외계의 다른 생명체인 듯 인류의 역사를 논하면서도 인류애적이고 인간중심적인 시각은 철저히 배제한다.
인류라는 종족을 변호할 생각은 조금도 없는 듯한 냉혹한 시선. 그 차가운 균형감각이야말로 독자에게 그간 의문조차 던지지 않았던 ‘우월한 종족 인류’에 대해 의심과 비판의 균열을 만드는 유효한 일격이 되고 있다.
사피엔스, 형제를 살해하는 무자비한 파괴본능
135억 년 전 빅뱅으로 시작해 물리학과 화학, 생물학, 문화와 역사를 엮어내기 시작하는 이 책의 서두는 저자 유발 하라리의 ‘빅 히스토리’적 관점을 잘 드러낸다. 학문간 융합을 강조하는 최근 더욱 주목받고 있는 빅 히스토리는 자연과 인간을 둘러싼 역사 전체에 흐르는 하나의 흐름을 과학적 근거를 통해 포착하려는 시도다.
이 방대한 이야기의 첫 파트의 타이틀이 ‘별로 중요치 않은 동물’이라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그는 인류가 다른 종에 비해 특별하거나 우월하다는 인식의 틀을 깨는 것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인간이 반딧불이, 해파리에 비해 그다지 대단치 않았다는 것으로 자존심이 상하는 것은 시작에 불과하고, 이어지는 그의 폭로는 꽤 충격을 안겨준다. 현생 인류의 조상인 호모 사피엔스를 두고 저자는 ‘형제 살해범’이라고 칭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우리는 살아남은 현생 인류 호모 사피엔스를 다른 인류와는 동시대에 살지 않은 직선적인 출연방식으로 최종 진화한 인류로 알고 있다. 하지만 하라리는 같은 인류인 네안데르탈인과 데니소바인이 사피엔스와 동시대에 살고 있었으며, 그들을 전멸시킨 주범이 사피엔스라고 주장한다.
어쩌면 우리 조상들이 네안데르탈인을 전멸시킨 이유가 바로 이것인지 모른다. 그들이 우리가 무시하기에는 너무 친숙하고 관용하기에는 너무 달랐다는 것. 사피엔스의 탓이든 아니든, 사피엔스가 새로운 지역에 도착하자마자 그곳의 토착 인류가 멸종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中 -
이쯤 되면 인류가 다른 생물종과 특별하게 다른 부분은 생존을 목적으로 하는 것 이상의 약탈과 파괴의 본능뿐인 게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든다. 오늘날까지 끊이지 않고 반복되는 인종차별과 종교전쟁, 식민지 쟁탈과 노예제도 등이 이를 여실히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 인류는 애초에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고 ‘공존’이 불가능한 종족인 게 아닐까.
역사상 최대의 사기, 그것은 바로 '농업 혁명'
인류 역사의 의미 있는 세 번의 혁명 중에서 저자가 가장 가혹하게 기술하고 있는 것은 ‘농업 혁명’이다. 농업 혁명이 마치 위대한 도약이자, 고달픈 떠돌이 생활을 청산하고 정착의 안락함을 누리기 시작한 새로운 시작이었다고 인식해 온 나로서는 꽤 충격적인 해석이었다. 하지만 빅 히스토리적 관점에서 역사를 바라보는 방식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역사에서 흔히 말하는 ‘진보’가 ‘삶의 질 향상’이나 ‘행복의 추구’가 아니라 번식과 생존에 더 유리한 ‘생물학적 진화’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인식의 전환이 바로 그것이다.
“밀 경작은 단위 토지당 식량생산을 크게 늘렸고, 그 덕분에 호모 사피엔스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수 있었다. (…) 어느 종이 성공적으로 진화했느냐의 여부는 굶주림이나 고통의 정도가 아니라 DNA 이중나선 복사본의 개수로 측정된다. (…) 농업혁명의 핵심이 이것이다. 더욱 많은 사람들을 더욱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 있게 만드는 능력. (…) 그런 거래에 동의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농업혁명은 덫이었다.” -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中 -
또한, 농업혁명에서 나아가 사람들이 흔히 치명적인 계산오류를 범한다는 것, 즉 자신의 결정이 가져올 결과를 전체적으로 파악하는 능력을 갖고 있지 않다는 지적이 인상적이었다. 우리는 삶의 질을 추구하고 행복하기 위해 노력하며 나아가고 있다고 믿고 있지만 그 결과는 엉뚱하게도 우리의 삶을 더욱 어둡고 힘들게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선택들이 과학 혁명이후 기술과 기계가 개입되면서 그 영향력은 인류만이 아닌 지구 전체로 확대되었다. 우리는 ‘진보’나 ‘행복’이라는 환상으로 스스로를 속이며 이길 확률이 아주 낮은 위험한 도박을 벌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상상의 질서, 전 지구적 융합을 만들어낸 교집합
인류는 농업혁명 이래 개체 수가 급증하는데 성공하면서 점점 더 규모가 크고 복잡해졌다. 따라서 그 사회질서를 지탱하는 데는 상상의 질서들이 더욱 정교해져야 했고, 공통신화나 계급, 법과 같은 질서들에서 출발해 수백만 명이 효과적으로 협력하는 인공적 본능을 창조하기에 이른다. 그것이 바로 ‘문화’라고 저자는 말한다.
하지만 이것 또한 국가마다의 ‘고유성’이라는 것은 발견하기 힘들며 하나의 거대한 근대 문화로 지구적 통일을 이루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것을 가능케 한 보편적인 질서로 언급한 세 가지가 있는데, 화폐와 제국, 보편종교가 바로 그것이다.
이 중에서도 흥미로웠던 부분은 ‘제국’을 바라보는 관점이었다. 우리는 흔히 제국주의를 약자를 억압하거나 착취하여 자신의 지배질서를 확대해가는 탐욕적이고 부도덕한 것으로 이해하곤 하는데, 그는 ‘역사에 정의란 없다’며 이러한 가치 개입을 차단한다.
그는 21세기를 사는 거의 모든 사람들은 어찌됐든 ‘제국의 후예’이며(살아남은 자들의 후손이므로), 문화의 다양성과 영토의 탄력성이라는 제국의 특성이 인류와 지구를 하나로 융합하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평가한다. 유발 하라리는 마치 과학자의 시선이 그러하듯 원인과 결과를 분석할 뿐이다. ‘제국’이라는 거대한 힘이 수많은 소수 민족의 독특한 특징을 지워버리고 훨씬 더 크고 새로운 집단을 만들어 오늘에 이르게 했다는 것만을 인정할 뿐이다.
더 큰 힘이 더 큰 영향을 끼치는 물리적 세계가 그러하듯 ‘제국’이 지구를 통합해간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었으며, 이를 비난할 필요도, 제국의 후예임을 부끄러워할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러할까. 질문은 여전히 남는다. 우리는 도덕적인 판단력이나 자유의지를 개입해 역사를 비판 평가할 수 없는 걸까. 역사에 ‘정의’의 원동력은 정녕 없는 것일까. (있다고 믿고 싶은 것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길가메시 프로젝트, 인류는 무엇을 원하는가?
과거의 인류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시도를 멸망을 초래할 두려운 것으로 인식했으나, 최근에 들어와 인류의 생각은 변했다. 우리가 아직 모를 뿐이라는 ‘무지의 인정’과 함께 새로운 과학적 발견들이 우리에게 새로운 힘을 줄 수 있다는 생각과 결합해 무한한 진보를 꿈꾸기 시작한 것이다.
몇몇 진지한 학자들은 2050년이 되면 일부 인류는 죽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한다.
-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中 -
가장 극복할 수 없다고 믿어 온 ‘죽음’마저도 극복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스스로를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 이전에 우리가 해야 할 질문이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과연 인류는 무엇을 원하는 것인가?
유발 하라리가 기술하는 인류역사는 매우 객관적이고 과학적으로 보이지만 한편 인간의 자유의지나, 평화수호, 정의구현에 대한 갈망을 무시한다는 점에서 지나치게 비인간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인간의 역사에 인간을 배제한다는 느낌이 낯선 동시에 불편하고 무기력함과 자괴감을 안겨주기도 한다.
하지만 신의 영역을 넘보려는 단계에 서 있는 인류에게 더 약이 되는 것은 자만이나 자축보다는 반성적이고 비판적인 자아성찰일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브레이크 없이 빠르게 질주하는 디스토피아행 열차의 비참한 추락을 막아줄 어떤 유의미한 브레이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라리는 이 책으로 전 세계적 주목을 끌었다. 하지만, 미래 인류에 대해 더욱 확장된 문제의식을 보여주는 하라리의 다음 책 ‘호모데우스’의 출간을 생각해보면, 이 책은 일종의 예고편이었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