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발 하라리 <호모데우스>
나쁜 꿈을 꾸고 난 기분이다. 이렇게까지 극단적인 예언이 설마 적중하지 않겠지 싶은 것은 너무 천진한 발상인 걸까.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가 인류가 정점에 오르는 폭력적인 과정을 가감 없이 기술했다면, ‘호모데우스’는 미래에 대한 가혹한 상상력을 발휘해 인류의 추락을 예고하고 있다. 전작에서도 나타났던 저자의 차가운 시선은 SF적 상상력이 더해져 한층 더 잔혹해졌다.
그의 예측에 따르면, 세 가지 혁명을 통해 여타의 동물종으로부터 자신을 특별한 지위로 끌어올린 인간은 이에 결코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인류 역사에 사피엔스는 종착역이 아니며, 인간은 불멸과 행복, 신성을 향한 열망으로 신이 되려 할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리고 그가 예고한 사피엔스의 미래는 그다지 밝지 않다.
다가올 몇십 년 동안 우리는 유전공학, 인공지능, 나노기술을 이용해 천국 또는 지옥을 건설할 수 있을 것이다. (...) 현명하지 못한 결정의 대가는 인류 자체를 소멸에 이르게 할 것이다.
- 유발 하라리, <호모데우스> 中 -
하지만 여기서 도리어 나는(특유의 반골 기질 때문인지) 반작용의 ‘아날로그적’ 욕망이 꿈틀대는 것을 느낀다. 우리가 과연 이 불길한 예언을 뻔히 알면서도 이 어두운 터널로 가는 기차에 속수무책으로 몸을 맡길 만큼 어리석을까.
기아와 질병, 전쟁의 시대는 과연 끝났을까
저자는 가장 첫 파트에서 인류의 의제가 새롭게 바뀔 거라고 확신한다. 기아와 질병, 전쟁의 시대가 종식되었고 우리는 새롭게 ‘불멸과 행복, 신성’이라는 의제에 골몰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 말은 언뜻 보면 맞는 말처럼 보인다. 하지만 여기는 숨은 전제가 있다. 적어도 지금 우리가 굶어죽을 걱정이 없고, 치료할 수 없는 질병의 위험이 적으며, 적어도 수십 년 간 전쟁으로부터 자유로웠다는 확신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것을 확신할 수 있는 인구가 현재 전 세계적으로 얼마나 될까. 하라리가 자신 있게 ‘인류 전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절대적 다수일지 의문이 들었다. 만약 저자가 인류 전체의 의제가 새롭게 바뀔 거라 단정한 것이 아니라, 일부 상류층의 관심사가 바뀌는 것 정도로 한정했다면 수긍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기아와 질병, 전쟁의 공포에서 자유로워서 달콤하게 (또는 한가하게) 불멸을 꿈꾸고, 생화학적 행복 주사를 맞으며 초인간으로 개조하길 원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그것을 꽤 먼 미래로 보더라도 여전히 회의적인 부분은 있다. 전쟁과 기아 문제는 종교나 인종 차이에서 오는 뿌리 깊은 갈등 때문에 예전과 같은 대규모가 아닐지라도 더 은밀하고도 강력한 파괴력으로 산발적으로 발생할 것이며, 질병의 위험도 단기간 내에 사라지기 어렵다고 본다.
또한, 국가간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새로운 변종 바이러스에 의한 전염병의 위험도 커지고 있다. 저자의 의제는 매우 일부 지역의 상류층의 상황을 일반화하는 동시에, 의학기술에 대한 맹신으로 현재의 문제를 지나치게 축소하는 우를 범하고 있는 게 아닐까.
유기체를 대체하는 비유기체, 그렇게 간단할까
영화 ‘블레이드러너’에는 마치 인간과 똑같은 모습을 하고 인간과 동일한 욕망을 가진 인조인간 ‘레플리컨트’가 등장한다. 영화에서 이 개체가 유기체인지 비유기체인지는 명확하게 구분할 수 없었지만, 이것을 인공지능 기계라고 가정한다면 하라리의 주장과 흡사한 공포 시나리오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인간을 신로 업그레이드하는 데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 생명공학, 사이보그 공학(인조인간 만들기), 그리고 비유기체 합성이다. - 유발 하라리, <호모데우스> 中 -
그런데 하라리는 비유기체지만 인간과 지능이나 신체면에서 모두 우월한 인공지능이 탄생하면, 인간의 노동을 대체하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인간을 공격하거나 인간의 권한(자유, 결정권)을 자신 또한 누리려는 ‘욕망’을 가지게 된다고 본다. 터미네이터와 같은 고전 SF영화에서도 단골 소재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이 흔한 설정, 과연 현실적으로 가까이에 와 있는 것일까.
기계가 인간을 공격한다는 지나친 설정은 차치하더라도, 인간의 모든 활동을 비유기체가 그 무엇도 빠짐없이 대체할 것이라는 저자의 확신은 조금 위험해 보인다. 그의 이러한 데이터와 기계적 시스템에 대한 확신은 책의 후반부 ‘데이터교’라는 암울한 미래로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정말 인간이 그렇게까지 데이터에 의존해서 모든 결정을 데이터와 알고리즘에 맡길 것인가는 의심스럽다. 우리는 지금도 많은 결정에 데이터를 활용하고 있지만 그것을 결정하는 것이 결국 자신의 의지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나는 인간의 결정에 늘 ‘충동적’인 변수가 있고,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자기 자신을 능동적으로 만들어가려는 ‘자유의지’가 있다고 믿는다.
특히, 나 같은 청개구리는 기계 알고리즘이 뱉어낸 결과에 반대로 행동할 소산이 크다.(알고리즘의 조작을 의심하거나) 그래서 결과적으로 선택에 실패하더라도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다. 그것이 내가 ‘선택’한 것의 결과물일 때, 실패 또한 유의미해지기 때문이다.
또한, 근본적으로 비유기체가 인간처럼 ‘욕망’이나 ‘의지’를 가지는 것, 비유기체에 의한 억압이나 착취라는 공포 시나리오는 현실화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인간의 일부 계층이 스스로 몸과 뇌를 재설계하고 업그레이드하여 초인간이 되고, 가난한 계층과의 차별과 불평등이 심화될 수 있다는 저자의 우려 역시 현 기술의 방향과는 맞지 않는 면이 있다.
가까운 미래에 자리잡을 AGI(인공일반지능)이나 블록체인은 지금보다 더 보편적이고 평등하게 대중이 기술을 이용하고 누리게 만들 것으로 예측된다. 흔히 예견되는 사물지능의 미래 또한 일부 특권층의 데이터 독점이나 조작이 불가능한 규모의 네트워킹과 복잡한 암호화가 이뤄진다면 오히려 자연스럽게 ‘데이터의 민주화’가 이뤄지는 것이 아닐까.
아날로그여, 반격하라! (제발)
마지막으로 드는 근본적인 의문은 과학기술이 과연 영원히 인류의 구원을 보장하며 승승장구할 것인가에 대한 것이다. (이는 내 스스로가 첨단의 과학 기술과는 요원한, 게다가 아날로그적 감성을 좋아하는 문과형 인간인 탓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미 과학 기술은 무한 자원의 소모와 도덕 판단을 하지 못하는 맹점으로 그 한계를 충분히 드러냈다. 언제까지 미래가 과학이 추구하는 ‘효율성’ 일변도로 달려갈 것인가. 나는 늘 세상이 한 극단으로 치우치게 되면 다시 역으로 되돌리려는 반작용으로 유지, 존속해왔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과학지상주의의 끝에서 그간 잊혀졌거나 홀대당했던 정신적이고 철학적이며 형이상학적인 가치들이 오히려 가까운 미래에 아날로그적인 부활을 시도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영화 ‘블레이드러너 2049’에서 최첨단의 홀로그램 장치로 부활시킨 것은 결국 추억 속의 엘비스 프레슬리였고, 그 앞에서 주먹 대 주먹의 육탄전을 펼치지 않던가. 우리는 결국 기계가 아니라 인간이기에, ‘호모데우스’를 꿈꾸기보다 손상된 ‘호모 사피엔스’의 감수성을 되찾는 것이 먼저이지 않을까.
사피엔스여, 주사위를 함부로 넘기지 말길
첨단 과학기술에 의해 더욱 파편화되고 개인화된 사회 속에서 이 거대한 공동체가 붕괴해가는 소리를 듣는다. 독점 자본의 폐해와 성장 위주 경제 정책의 막다른 골목에 몰린 우리는 더 이상 이 방향의 앞에는 답이 없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꿈꾸는 세상은 좀 더 평등하고, 좀 더 개방적이며, 좀 더 유연한 것일 수밖에 없고, 그것을 돕는 ‘도구’로써 비유기체와 알고리즘이 기여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대비해야 할 것은 비유기체의 변심이나 초인간의 탄생과 같은 SF적 공포가 아니라, 한껏 ‘노동에서 자유로워진 우리들’이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아닌 어떤 대안으로 사회를 유지하며 행복을 추구할 것인가의 문제일 것이다. 미래 경제에서 더 이상 생산적 능력으로 인간의 가치를 평가할 필요가 없어진다면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사상모델로 우리 삶의 가치를 찾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신이 주사위 놀이를 하는지는 확실치 않아도 인간은 미래에 관해 늘 주사위 놀이를 해왔다.
여럿의 주사위 면 중 어떤 결과가 나올지 그 누구도 100% 확신할 수 없다. 다만 하라리와 같이 ‘예측’이나 ‘기대’로 원하는 미래에 좀 더 가까워지려 할 뿐이다. (그렇지 않기를 바라지만) 미래에 하라리식 공포 시나리오가 적힌 주사위 면이 나올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적어도 인간의 ‘자유의지’와 ‘욕망’은 50년 후 100년 후에도 쉽사리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주사위를 던질 권한을 누구에게도 그리 쉽게 넘겨주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의 질긴 욕망을 너무 얕잡아봤다. 인간이 지배력을 잃게 된다고? 아니, 인간은 그리 쉽게 자신의 주사위를 넘기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