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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세은 Oct 28. 2020

"비트에서 존재로, 전체 우주는 하나의 컴퓨터다"

제임스 글릭 <인포메이션>

‘나타낼’ 수 있다는 것과 ‘존재’한다는 것은 동의어일까. 


‘정보이론’에 따르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적이고 비물질적인 것들, 유기체와 비유기체들이 모두 몇 개의 ‘비트’로 그 스스로를 ‘나타낼’ 수 있다. ‘비트’는 언어에서도 양자 안에서도 DNA와 밈에서도 발견되었다. 언어학과 수학, 열역학과 생물학이 그 안에서 극적인 조우를 했다. 하지만 그 모든 극적인 ‘비트’로의 통섭 앞에서 중요한 것이 결여된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이 책에서 모든 것을 ‘비트’로 설명할 수 있게 되기까지의 섀넌과 학자들의 탐구 과정과 통찰은 분명 놀랍고 흥미롭다. 그런데 뭘까, 그게 다가 아닌 것 같은. 그게 다여서는 안 될 것 같은 이 느낌은. 우주가 모두 해명되었다고 해서 우리가 거기서 무엇을 얻게 되는 걸까. 우주 전체를 어떤 식으로든 ‘나타낼’ 수 있게 되었다고 해서 그 ‘존재’의 의미를 모두 깨달았다고 할 수 있을까. 


현재 ‘정보’는 넘쳐나고 그 이동과 복제 속도는 이미 통제가능의 문턱을 넘었다. ‘정보이론’의 거대한 통섭 앞에서 우리 모두의 존재 의미는 ‘비트’를 전달하고 복제하는 기계 이하로 전락한다. ‘정보’는 모든 것을 설명하지만, 그 ‘나타낼’ 수 있다는 물리적 정량화에서 배제된 ‘의미’는 어디로 가야할까. 그래서 저자는 완벽한 바벨의 도서관을 서성이는 우리의 기쁨과 실망을 이 책의 맨 마지막 장에 남겨두었는지도 모른다.


물질의 근본 구성단위로서의 ‘정보’


우선 이 책에서 다루는 ‘정보’의 개념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막연한 의미의 ‘정보’와 뚜렷이 다르다는 것은 기억해둬야 할 부분이다. 섀넌은 의미를 제거해서 정량화 가능해진 ‘정보’를 다룬다. 


"정보이론을 만든 섀넌은 '정보'와 '의미'를 분시켰다. 즉, 의미에서 떨어져 나온 '비트'를 정보라고 부른다. 다만 의미를 제거한 정보에 대한 논란은 있다." - <인포메이션> 中 -


섀넌이 규정한 ‘정보’를 기준으로 바라보니 그제서야 이 책의 흐름과 저자의 말하는 방식이 보인다. 섀넌의 정보이론을 읽기 전까지 ‘말하는 북’이나, ‘설형문자’, ‘사전’의 발달 과정은 흥미로웠지만 각각의 서로 다른 이야기처럼 보였다. 그런데 그 안에서 숨어 있는 ‘정보’를 발견하고 나니 마치 ‘정보’가 스스로를 복제하고 퍼뜨리기 위해 매체와 수단, 기술을 발전시켜온 역사처럼 느껴졌다. 인간의 언어나 통신 기술, 인공지능에 이르는 그 모든 수단의 발전이 실제로 오늘날 정보의 홍수를 불러오지 않았는가.



읽으면서 놀라웠던 대목은 섀넌의 엔트로피가 열역학의 엔트로피와 정확히 맞닿아 있었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저자는 유기체의 설명서와 같은 DNA와 관념이 복제되는 밈에도 정보이론을 적용하는 데 성공한다.


블랙홀이란 어를 처음 사용한 존 아치볼드 휠러(1911~2008)에 따르면 정보는 모든 존재를 낳는다. 모든 입자, 모든 힘의 장, 심지어 시공연속체를 낳는다. (...) 이 말대로면 전체 우주는 하나의 컴퓨터, 즉 우주적인 정보처리 기계다. - <인포메이션> 中 -


리처드 파인만은 인류에게 남길 단 한 문장으로 “모든 물질은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를 택했지만 이제 그 문장은 수정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모든 물질과 비물질, 우주안의 모든 것은 ‘정보’로 이루어져 있다”. 더 줄인다면 “태초에 비트가 있었다”. 더 줄이면, “비트에서 존재로(It from Bit).


유기체, ‘네거티브 엔트로피’를 먹고 사는 ‘맥스웰의 도깨비’


섀넌의 정보이론에서 ‘엔트로피’는 무지(불확실성의 척도)이고, 위너는 정보를 ‘네거티브 엔트로피’로 규정했다. 섀넌은 이 둘이 결국 같다고 보았지만 어찌됐든 ‘불확실성이 높다’는 것은 ‘정보가 더 적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서 낯설음과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한 ‘정보’가 적기 때문이며, 이는 곧 그의 행동 예측에 대한 ‘불확실성이 높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는 아는 것이 많을수록 그 실체가 확실하다고 느낀다. 아는 것이 없다고 느끼는 사람에게 우리가 질문 공세를 하는 것은 그래서 당연한 일이다. 정보를 얻기 위해 불확실성을 없애고 싶은 것이다.


섀넌은 이것을 이용해 의외성의 척도 H를 구하는 것으로 정보를 정량화했다. H는 미지의 메시지를 추측하는 데 필요한 예-아니오 질문의 평균 횟수이다. 즉 얼마나 많이 ‘물어야’ 하느냐는 것으로 정보량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때 흥미로운 것은 물질의 상태가 항상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비가역적인 흐름)으로 변화한다는 ‘열역학 제2법칙’을 거스르는 도깨비 같은 존재들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 도깨비는 기체를 뜨거운 것과 차가운 것으로 분리해내고 무질서를 질서로 되돌려 놓는 등 명백히 가역적인 마법을 부리는 존재들이다.


맥스웰의 도깨비는 실제 존재하지 않고 사고실험으로 상상해낸 허깨비였지만, 유기체들은 모두 맥스웰의 도깨비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왜 그럴까. 이 세계에서 유기체가 더욱 특별하게 느껴지는 순간이다. 생명체는 왜 자연으로부터 얻은 질서를 해체하지 않고 저장하고 존속시키려고 할까.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그 마법 같은 일의 중심에는 유기체가 절대 잃어버릴 수 없는 질서인 DNA가 있고, 그 안에는 탄생 이전에 각인된 ‘정보’가 있었다.



풍요로움의 낭패, ‘필터링’과 ‘검색’ 그리고 다시 ‘의미’ 


정보의 홍수 시대를 맞은 현재, 저자는 이를 비평가의 말을 빌려 “충만의 자리에 불안이 들어서고 갈망과 불쾌의 중독적인 주기가 형성”되는, “한 경험이 시작되자마자 다른 것에 대한 생각이 끼어드는” 풍요로움의 낭패라고 말한다. 정보는 지식이 아니고, 지식이 곧 지혜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 정보의 홍수에서 헤매지 않기 위해서 저자는 두 가지 대응 전략, 필터검색을 내세운다. 이 둘을 이용해 쭉정이와 알맹이를 분리하고, 최종 선택에는 신뢰취향의 문제가 영향을 끼친다. 필터링은 정보를 무한히 수집해 축적한 기계를 통해 얼마든지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필터링된 정보들을 취사선택하고 재구성하여 그 안에서 ‘의미’를 만들어내는 일을 여전히 기계에 맡길 수 있을까. 심지어 ‘누가’, ‘무엇을’, ‘어떤 기준’으로 필터링할 것인가도 기계가 결정할 수 없다.


어떤 일정한 의도를 가지고 생산된 잘못된 정보들을 비판적으로 가려내는 것은 정보처리 속의 기계 세계가 아닌 경험과 실존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인간들만의 역할이 아닐까. 우리가 쓸모없는 것들 혹은 잘못된 것들 사이에서 쓸모 있는 것들을 뽑아내려면 우리의 신뢰는 무엇에 기반해야 할까. 


결국 섀넌이 배제했던 ‘의미’를 다시 집어든다. 정보를 정량화하고 전달하고 복제하는 데에 '의미'는 오류를 발생시키는 쓸모없는 것이었으나, 그 '의미'가 이제는 넘쳐나는 정보들의 민낯을 구분할 수 있게 할 것이다. 대중에게 그 민낯을 제대로 알아볼 수 있도록 안내하는 평론가와 커뮤니케이터들의 필요성 또한 점점 커질 것이다. 그들은 이 혼란스런 진실과 거짓의 소용돌이 속에서 맥스웰의 도깨비처럼 둘을 명확하게 분리해 줄 수 있을까. 우리는 또 그들 사이에서도 가짜와 진짜를 가려내야 할 것이다. 눈속임을 하는 마술사와 진짜 마법을 부리는 마법사를 말이다.


이 책의 말미, 저자의 말대로 모든 책을 소장한 바벨의 도서관은 압도적인 규모 외에는 그 자체만으로 우리에게 어떤 ‘의미’도 되지 않는다. 무수한 서가에서 특별하게 선택한 한 권의 책, 그 안에서 의미 있는 한 행을 읽고 해석하는 ‘의식(의미부여)’이야말로, 우리를 배회하는 ‘유령’이 아닌 진정한 ‘인간’으로 만들 것이다. 


우리는 정보에서 지식을, 그 지식들에서 다시 지혜를 발견할 수 있는 ‘의미 추구’의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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