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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세은 Oct 21. 2020

"10억 개의 성부로 이루어진 은하 생명의 푸가"

칼 세이건 <코스모스>



1999년 즈음. 사춘기 시절이었던 나는 이상한 종교나 철학 등에 마음껏 휘둘리며 세기말의 분위기에 흠뻑 젖어 있었다. 그 때는 '노스트라무스의 예언'이나 '악마의 재림' 같은 것을 소재로 한 시시껄렁한 콘텐츠들이 어디든 넘쳐났었다.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읽다가 그 무렵 노트 구석에 끄적이고 있었던 소설 ‘광기’를 문득 떠올렸다. 이 세상을 둘러싼 ‘세상의 바깥’에 대해 놀라운 비밀을 알게 된 몇몇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미치광이’ 취급을 받으며 ‘먼저 알아버린 진실’에 괴로워하는 것이 이야기의 시작이었다. 그 때는 놀라운 세상의 진리를 ‘누군가’는 알고 있을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었다. 


누군가 안다고 말해줘요, 세상의 바깥을


나는 그 ‘누군가’를 만나고 싶었다. 모든 세상의 시작과 끝을 알고 있는 사람. 그 시절 예언가나 종교지도자가 언뜻 그 ‘누군가’의 얼굴을 하고 있는 것 같이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세상의 진리를 모두 아는 그 ‘누군가’는 존재하지 않음을 안다. 만약 그에 가까운 존재가 있다면 예언가나 종교신자가 아닌, 미신과 비이성을 무너뜨리고 공고히 이성의 집을 세워가는 과학자일 것이다. 적어도 칼 세이건은 대중들보다 앞서 코스모스와 인류의 운명을 알고 고민하고 있었다. 지금은 대중 저서가 된 '코스모스'는 1980년 세상에 나왔으니까.


‘먼저 알아버린 진실’에 그는 자신의 집에 갇히기 보다는 대중을 향해 창을 내고 문을 열었다. 그의 책과 다큐멘터리는 종탑의 끝처럼 아스라하게만 들리던 예전의 과학과는 달랐다. 늘 듣고 자란 옛날이야기나 전설처럼, 읽으며 가슴 설렜던 시나 영웅이야기처럼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친근하고도 따뜻했다. 그의 글은 처음은 친절하다가 예시는 씁쓸하고, 비유는 달콤했으며, 남겨진 철학은 그윽했다. 그를 통해 과학의 빛이 내리쬐고 있었다.  

인문학 위에 지은 과학의 집, 그 즐거운 설계도 

칼 세이건은 물리학자이자 천문학자이기 이전에 인문학자였다. 그가 바라보는 과학은 한 지점이 아닌 과거와 현재와 미래, 인류와 우주의 역사를 관통하는 거대하고도 촘촘한 조망도다. 마치 장조와 단조를 오가는 화려한 연주처럼 학문의 영역을 넘나들며 하나로 엮어내는 그의 해석과 통찰에 마음 깊이 탄복했다. 나중에는 그의 머릿속이 몹시 탐났다. 실제로 그의 머릿속에 자리하고 있을 세상을 바라보는 조망도는 압도적으로 정교하고 화려할 것이다. 역사와 철학, 문학과 과학이 씨실과 날실로 교묘히 얽혀 있을테니 말이다. 

그의 글은 서사시라 하기에는 비유의 의미가 명징하고, 철학이라 하기에는 혼란의 여지를 허락하지 않으며, 역사라 하기에는 미완성된 과거와 미래의 여백이 상상력을 자극한다. 이를테면 이런 문장들은 얼마나 명쾌하고 적확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적인가. (그의 유려하고도 날카로운 문장들과 이를 번역한 홍승수 교수님께 경의를 표하며 일부를 옮긴다.) 

"우주 생물이 들려줄 음악은 외로운 풀피릿소리가 아니라 푸가일 가능성이 높다. 우리는 우주 음악에서 화음과 불협화음에 교차하는 다성부 대위법 양식의 둔주곡을 기대한다. 10억 개의 성부로 이루어진 은하 생명의 푸가를 듣는다면, 지구의 생물학자들은 그 화려함과 장엄함에 정신을 잃고 말 것이다." 

"아리스타코스가 우리에게 남겨 준 위대한 유산은 지구와 지구인을 올바르게 자리매김한 것이다. 지구와 지구인이 자연에서 그리 대단한 존재가 아니라는 통찰은 위로는 하늘에 떠 있는 별들의 보편성으로 확장됐고 옆으로는 인종 차별의 철폐로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통찰이 성공을 거두기까지 인류의 역사는 반대쪽으로 흐르는 물결을 끊임없이 거슬러가며 저항해야 했다. " 
- 칼 세이건 <코스모스> 중에서 -


그의 문장이야말로 아름다운 문장을 사랑하는 나에게는, 푸가보다 장엄하고 아름답게 느껴졌다. 그의 음악과 인류문화사를 넘나드는 통찰은 눈물날 정도로 유려한 비유와 묘사를 만나 눈부시고도 날카롭게 빛난다. 


과거로부터의 전언, 퇴색되지 않는 메시지 

전체 내용 중에서도 인상적이었던 부분을 꼽자면 과학사에서 고대과학의 쇠퇴를 유독 아쉬워하며 ‘도서관’의 중요성을 역설한 부분이었다. 특히 고대의 노예제도가 기술 개발의 경제적 동기를 갉아먹고, 이후 과학적 사고의 몰락을 가져오는 원인이 되었다는 지적이 강렬하게 기억에 남는다. 저자는 나아가 현대 제3세계의 교육 기회의 편중에 대해 지적하기도 한다. 


부유층은 현상 유지에만 관심이 있고, 자신의 손으로 직접 일을 하여 무엇을 만드는 것도, 기존의 지식 체계에 도전하는 것도 꺼리기 때문에 교육 기회의 불평등은 과학이 뿌리내리지 못하는 불모지를 낳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과거만큼 눈부신 과학의 꽃을 어떻게 피워낼 수 있을까. 


근원적인 혁명을 의미하는 대명사가 되어버린 코페르니쿠스의 생각들, 케플러의 무수한 궤도 수정 끝에 얻은 법칙들, 뉴턴이 찾아낸 범우주적 질서는 앞으로 무수한 세월 속에서도 퇴색되지 않을 위대한 발견들이다. 미래에 우리가 얼마나 더 빛나는 발견들을 할 수 있을지는 과거로부터의 전언에 귀 기울이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억압을 정당화하며 전제 독재 군주를 섬겼고, 데모크리토스의 놀라운 통찰을 묵살하고 그의 책을 불태웠다. 과학을 소수의 전유물로 만들고 신비주의를 용인해 과학 탐구의 정신이 잠들게 했다. 우리는 미래의 데모크리토스를 두 번 다시 희생시키지 않기 위해 많은 위협들과 싸우며 탐구의 불씨를 지켜내야 한다. 과학도 투쟁이다. 꽃을 피우기까지 불씨를 지킬 것. 

인간의 오만과 편견,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 

칼 세이건은 인류 문명의 화해할 줄 모르는 증오심을 크게 걱정했다. 그의 걱정처럼 현재 만연한 극단적 민족 우월주의나 국가주의, 종교적 광신은 스스를 좀먹는 자멸의 결과를 낳을지도 모른다. 또한, 그가 언급한 핵전쟁의 위험성은 구체적인 파괴력의 수치와 갈등 구도, 특히 '리처드슨의 곡선'을 근거로 손에 잡힐듯한 공포를 실감케 했다. ‘핵무기를 통한 전쟁 억지’라는 ‘오만’한 무지와 무방비한 ‘편견’은 정부가 무기개발자를 비호하는 사이에 더욱 뿌리를 단단히 내리고 있다. 우리는 저자의 말대로 언제 목숨을 잃어도 이상하지 않은 ‘핵전쟁의 볼모’로 잡혀 있는 것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인간에게는 ‘과학’이라는 현명한 도구가 있다.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위험한 무기도, 구원의 지팡이도 될 수 있는 이것은 무수한 생명 진화의 역사에서도 아직까지 인류만의 것이다. 인류 문명이 여전히 희망적이며, 지구 존속의 열쇠가 인류에게 있는 이유도 이 과학의 힘 덕분일 것이다. 


우리는 우주 한구석에 박힌 미물로 태어났다. 그러나 스스로를 인식하고, 나아가 코스모스적 질서를 발견하는 존재가 된 유일한 존재이기도 하다. 칼 세이건은 그것에 자긍심을 느끼고 서로를 사랑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주변 누구라도 사랑하고 싶어진다. 언젠가는 그 무엇도 빛을 잃고 사라질 우주적 시간에 비하면, 우리 인류가 서로를 사랑할 수 있는 시간은 허망할 정도로 너무나 짧기 때문에. 어서 사랑하자고. 싸우고들 있을 틈이 없다고. 찰나를 빛나게 하는 것은 오직 사랑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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