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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세은 Oct 21. 2020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아 줘"

알베르 카뮈, <이방인>



‘나다움’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누구보다 그답게, 타인의 증오와 이해받지 못함을 개의치 않았던 뫼르소를 보면서 생각했다. 나는 얼마나 나답게 살았나.


그러고 보면 삶 자체가 나에 대한 탐구가 아닐까. 원시적 세계에서 살아왔다면 필시 나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수많은 학습과 사회화에 묻혀 사라진 ‘나다움’은 뒤늦게 커서야 알고 싶어졌고 또한 되찾고 싶기도 했다. 왜 나는 그렇게 쉽게 증오를 두려워하며 무력해졌던가. 이해받지 못함에 전전긍긍하거나 분노하면서, 또는 스스로의 날선 부분들을 적당히 갈아뭉개면서, 나는 그저 나일뿐임을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했던가. 나는 어느샌가 나다움을 누군가에게 설득하는 것을 포기하고 있었다.


학생 시절 나는 곧잘 ‘특이하다’는 말을 듣곤 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어느 순간부터 나를 칭하는 카테고리에 넣어버렸다. ‘특이하다’는 말은 결코 좋은 울림이 아니지만, 그걸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니 편리한 얼버무림이었다. 누군가는 그것을 예술적 감성으로, 누군가는 병적인 기질로 쉽게 분류했고 그 어느 것도 정확한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내가 없는 자리에서 내가 이야기되고 규정되는 것에 나는 무력했고, 나는 때때로 ‘아웃사이더’를 자청해야 했다. 소외되기 이전에 차라리 고립되기 위해서.

우리는 살아가며 끊임없이 부조리를 경험한다. 하지만 부조리가 키워내는 것은 용기가 아닌, 절망과 순종 나아가 무력감이다. 고유한 나의 존재를, 그 어떤 카테고리로도 일반화되지 않는 나의 무수한 특성들을 상대에게 설득하는 데 실패하거나 아예 설득 자체를 포기하는 순간, 스스로가 뻔한 인간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드니까. 타인이 더 날 잘 아는 것과 같은 착각에 몸을 맡기면, 때론 꽤 편안하기까지 하니까.


다만, 이따금 내 안의 무수한 모순들, 설명할 수 없는 충동과 꾸며낼 수 없는 어떤 감정들은 그저 홀로 곱씹을 때 그것이 비로소 원래 내 것이었음을 알 뿐이다. 나다움은 조용히 하루하루 죽어간다. 살해자는 나의 가식, 보상은 타인의 평판이다. 그러나 가식이 피로하다는 것을 뫼르소는 알았을 것이다. 무력감이 자신을 서서히 죽이는 감정이라는 것도 진즉 알았겠지. 그러니까 뫼르소는 그저 그로서 존재하고 있었을 것이다. 가장 그다운 방식으로, 가장 자연스럽고 솔직하게.


자질구레한 것들의 틈바구니 속, 죽음

뫼르소의 담담한 표면 안에서 일어나는 미세한 감정의 기류를 나는 곳곳에서 감지했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로 시작하는 결코 평범하지 않았을 하루의 시작. 그는 그만의 방식으로 엄마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싶었을 것이다.

 

가까운 이의 죽음을 경험했을 때, 나 역시 그것이 결코 영화나 소설, 타인의 말로 보고 들었을 때와는 전혀 같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장례식의 절차부터가 그랬다. 그 지리하고 진부한 절차들은 특별한 순간이 아니라 일상에 섞여 있는 하나의 연장선의 일부일 뿐이었다. 위로의 말과 애도의 몸짓이 무수한 자질구레한 것들 틈바구니에 섞여 있었으며, 속물적이고 형식적인 것들로 포장되어 있었다. 그 안에 슬픔을 연기한 순간이 정녕 없었을지 나는 지금도 확신할 수 없다. 다만 극심한 피로감을 기억한다. 무수한 조문객이 찾아와 등을 두드리거나, 밥을 먹거나, 쓰러져 자거나 했다. 그것은 지독히 피로한 일이었다.  

자신을 규정하는 타인을 관찰하는 자신

카뮈는 후반부 재판장에 선 뫼르소를 단지 무력하게 그리지 않는다. 실제로는 제대로 변론 한 번 하지 못하고 사형선고를 받는 것이 현실이나, 그 안의 뫼르소는 자신을 규정짓는 타인을 관찰하며 다시 한 번 자신의 존재를 확인한다. 그 내면의 목소리는 생경하게 도드라지며, 그 자신의 존재감이 형형하게 살아난다.

피고석에 앉아서일지라도 자기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소리를 듣는 것은 언제나 흥미 있는 일이다. (중략) 나는 참여도 시키지 않고 모든 것이 진행되었다. 나의 의견은 물어보지도 않은 상태에서 나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이었다. 때때로 나는 다른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를 가로막고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아니 도대체 누가 피고입니까? 피고라는 것은 중요한 겁니다. 내게도 할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막상 생각해 보면 할 이야기가 아무것도 없었다. 사실 나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얻는 데서 맛보는 흥미는 오래 계속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알베르 카뮈, <이방인> 중에서 -

뫼르소의 이러한 타인에 대한 무관심과 상황에 대한 지극히 냉철한 판단력은 그가 가진 ‘그다움’이다. 그가 그것을 그대로 실천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그다움이 왜곡되고 다른 사람에 의해서 ‘악인’으로 규정돼 버린다는 것은 지독한 아이러니다. 사회(집단)는 그라는 사람의 존재에는 관심이 없으며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이해하면 그만이기 때문에, 대중은 그를 멋대로 재단하고 이윽고 ‘살해’하기에 이른다.  

누구도 감히, 죽음을 슬퍼할 권리는 없다

법과 제도, 교정시설을 모두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때때로 나는 그것이 얼마나 위선적이고 연극적인가 하고 생각한다. 그것이 진실하려면 적어도 자신에 대한 변호는 자신이 해야 하지 않을까. 타인이 자신을 변호하고 타인이 자신을 교정시키는 그 부조리한 절차 속에서 무력한 개인들이 얼마나 많이 자신다움을 부정당하고 경멸당해 왔을까.

뫼르소는 사형 직전 엄마를 떠올린다. 엄마가 왜 한 생애가 다 끝나갈 때 ‘약혼자’를 만들어 가졌는지 그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한다. '엄마는 죽음이 가까운 시간에 해방감을 느꼈고, 오히려 다시 살아 볼 마음이 내켰을 것이 틀림없다'고, '아무도 엄마의 죽음을 슬퍼할 권리는 없다'고 그는 생각한다. 우리 모두 죽음을 경험하는 순간에야 말로 '진짜 죽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전시된 죽음, 출판된 죽음, 말해진 음이 아닌 진짜 죽음. 죽음을 실제로는 한 번도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이 죽음을 ‘슬퍼한다’는 것은, 어쩌면 오만을 포장한 위선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

이 글을 쓰는 도중, 우연히도 직장상사 모친의 부고를 들었다. 내일 장례식장에서는 뫼르소가 그랬듯 그 무엇도 과장해서 연기하지 않고 담담하게 다녀와야겠다고 생각했다. 고인이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가족들이 얼마나 상심했는지, 궁금하지도 않은 것들을 애써 묻지 않고 상주의 얼굴에서 슬픔을 천착하려는 잔인한 이기심도 억누르면서, 다만 얼굴도 본 적 없는 누군가의 죽음에 대해 상상하며 고요히 묵례하고 돌아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주변을 살아가는 사람의 가장 진실한 일상에 가깝고, 나다움에 가까운 모습일 테니까.


사형 집형을 앞두고, 뫼르소가 품은 마지막 바람이야말로 나다움을 위한 투쟁의 시작에 작은 용기의 불꽃을 붙여주었다. 타인의 증오는 두려운 것이 아니라고. 내가 전에도 지금도, 나답게 존재한다는 것을 느끼는 것만이 중요하다고.


"나에게 남은 소원은 다만, 내가 처형되는 날 많은 구경꾼이 모여들어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아주었으면 하는 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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