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진화론의 진화
인간이 왜 이따위로 생겼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진화론의 기본을 조금은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생물학에서 진화라는 말이 등장한 것은 기껏해야 약 250년 전이다. 그 이전에는 지구상의 모든 생물, 즉 동물이나 식물은 당연히 창조주가 만들어주신 형태로 변화 없이 유지된다고 여겨졌다. 그렇다면 한 가지 의문점이 생긴다. 도대체 이 세상에는 왜 이리 다양한 생물들이 존재하고 있는 것일까? 들판에 흐드러지게 핀 이름 모를 들꽃부터, 아직까지도 이름이 붙여지지 않은 다양한 곤충들, 그리고 한동안 우리가 발을 디디고 있던 땅을 차지하고 있다가 이제는 멸종되어 버린 공룡이나 매머드들, 이런 생명체들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존재하였고, 또 존재하고 있는 것인가? 그리고 그것들은 왜 하필 그런 모양으로 생겨서 자기네들만의 독특한 생활 방식을 유지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이런 질문에 대하여 하느님이 부여한 냉철한 이성을 머리에 담고 있는 인간들조차 마땅한 답변을 구하지 못하고 있었다.
입이 막힐 때에는 구실을 찾는 법이다. 여기에는 수천 년 동안 인간들이 써먹어 왔던 쉬운 핑계가 있다. 전지전능한 창조주가 우리는 알 수 없는 심오한 이유를 가지고 그렇게 만들어 놓았다는 것이다. 민들레는 날개를 단 씨앗을 흩뿌려 (1985년 가수 박미경이 불러 유행한 노래 '민들레 홀씨 되어'에 나오는 가사는 잘못된 것이다. 민들레는 곰팡이처럼 홀씨(포자, spore)를 날리지 않는다.) 제 자손을 후미진 땅 구석구석에 퍼뜨리게 만들어 놓았고, 거미는 꽁무니에서 질기디 질긴 끈끈한 거미줄을 뿜어내 기하학적인 무늬의 거미집을 만들어 내어 그 아름다움에 심취해 달려드는 먹잇감을 사냥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더 극적인 예도 있다. 사람들은 17세기 후반 현미경이 발명될 때까지 온 세상을 뒤덮고 있던 세균의 존재를 몰랐다. 네덜란드의 안토니 판 레이우엔훅(Antonie van Leeuwenhoek, 1632–1723)이 머리를 짜내 작은 것들을 크게 키워 들여다볼 수 있는 현미경을 만든 후, 그 렌즈들을 통해 지금까지 아무것도 없는 줄로만 알았던 곳에 무언가 미세한 것들이 꼬물거리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것들이 언제부터 거기 있었고, 사람들이 살고 있는 땅 위에서 도대체 무슨 역할을 하고 어떤 해악을 저질러 왔는지는 몇 안 되는 과학자들의 고민거리였을 뿐이다. 창조주를 굳건히 믿고 있었던 사람들에게는 그것도 모두 하느님의 숨겨진 복안이라고 여기면 그만일 뿐이었다. 모든 것을 신의 뜻으로 받아들이면 더 이상 고민이 필요하지 않았다. 세상은 그렇게 만들어졌고, 왜 그런지, 또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는 아직은 인간이 파악할 수 없는 신의 의도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그뿐이었다.
그렇다면 세심한 관찰을 바탕으로 이성적인 추론을 중시하던 과학자들은 그렇지 않았을까? 유감스럽게도 그 시기까지는 과학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과학은 하느님이 만들어 낸 세상의 비밀을 알아가는 것이 목적이었다. 하느님은 우주의 삼라만상을 만들기만 하셨지 그것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어떤 목적으로 그렇게 형성되었는지, 어떤 원리로 풀어나가야 하는지는 알려주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은 눈이 빠지게 별을 바라보고, 땅 위를 탐험하고, 물 속을 자맥질하고, 자신의 몸을 헤집어 보고, 살아있는 것들을 모으고 쫒아다니면서 그것들에 담긴 신의 뜻을 알아내고자 하였다. 그렇게 그들은 발견하고 감탄하고 기도하였다. 과학은 지금과 같이 종교나 신화에 반하는 것이 아니었다. 당시의 과학은 신의 창조물을 찬양하고자 하는 믿음의 또 다른 표현이었다.
어느 집단에서나 대다수 구성원의 뜻을 거스르는 삐딱이들이 있기 마련이다. 세상에 대한 과학적 지식이 늘어남에 따라 고귀한 하느님의 작품에 의심을 품는 괘씸한 사람들이 나타났다. 단초는 오래된 지층에서 발견되는 화석들이었다. 화석에서 발견되는 생물들은 현재의 생물들과는 모습이 사뭇 달랐다. 그렇다면 그것들은 과거에 그런 모습으로 살다가 점점 형태가 변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는 말이 아닐까? 다시 말해 생명체는 시간의 흐름과 함께 점차적으로 그 생김새가 바뀌고 있다는 것이 아닐까? 이런 의문을 가지게 된 것이다. 하지만 교회를 중심으로 신앙심이 깊었던 많은 사람들은 그 발칙한 반론을 간단히 무시했다. 화석도 원래 창조주가 지층 사이에 그렇게 만들어 놓은 것이라는 창조론을 들면서 말이다. 하느님이 구태여 왜 그런 식의 애교 섞인 장난을 했는지 의심하는 것은 불손한 일이었다. 나름대로의 증거도 댈 수 있었다. 우리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 그리고 그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그 옛날부터 기록하고 그려놓은 어떠한 생명체도 현재 우리가 바라보는 것과 같은 모양을 띄고 있다. 생명체가 변할 수 있는 것이라면 어떻게 수백 세대, 수천 년을 거쳐서도 본래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인가? 과학자들이 좋아하는 치밀한 관찰에 의해 드러난 것이므로 과학자들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더 어마어마한 수치를 들먹이며 억지를 부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수천 년이 부족하다면 수십만 년, 수백만 년, 아니 수억 년은 어떠한가? 그 정도의 상상도 못 할 시간이 지난다면 모습이 바뀔 수도 있지 않겠는가? 내가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그 당시 평범한 일반인이 그런 질문을 받았다면 아마도 그렇게 물어보는 사람을 미치광이로 치부하여 더 이상 말을 섞지 않으려 했음이 분명하다. 다행히 상대방이 매우 관대하고 동정심이 있으며, 인내를 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삭여가며 이런 질문을 되돌려줘 미치광이의 입을 막아버렸을 것이다.
"당신의 말이 맞다고 치자. 수억 년에 걸쳐 생명체가 제 모습을 바꾸어 나갔다고. 그렇다면 하느님이 만들어준 조화롭고 아름답고 완벽한 제각각의 모습을 제쳐두고 생명체들은 무슨 이유로 모습을 바꾸었는가? 어떠한 모습을 향해 바뀌고 있다는 것인가? 또한 어떤 방법으로 탈바꿈해나가고 있다는 것인가?"
삐딱이들도 숨이 멎고 말문이 막힐 만큼 날카로운 질문이다. 어떤 이들은 대답을 할 수 없는 자신의 모습에 치욕감을 느껴 일부러 미치광이 흉내를 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런 반복되는 질문들에 기상천외한 해답을 제시하는 사람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