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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란 벽돌 Sep 20. 2022

나는 또 왜 이리 생겨먹었을까?-1

중년의 문제아

어제는 하루 종일 외래 환자를 진료하느라 정신없는 하루를 보냈다. 역시나 가장 고된 일은 사람을 상대하는 일이다. 얼굴 생김새 다르듯 성격이 다르고, 목소리 다르듯 바라는 것이 다른 근 백명의 사람들을 불만이 생기지 않도록 다독이고 위로해주는 일이 절대 쉽지 않다. 나도 안다. 나는 그리 친절한 의사가 아니다. 나의 환자들에게서 "선생님 같은 분은 없네요"라든지 "너무나도 친절하시네요"라는 말을 듣는 호사를 바라지 못한다. 그저 나의 진료가 그분들의 기분을 거스르지 않고 매끄럽게 진행되기만 해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가지고 있는 약간의 대인기피증과 수줍음 때문에 사실 그 정도 수준을 유지하기에도 버겁다. 


어제저녁은 이른 퇴근을 하였다. 하루 동안 고생한 나에게 상을 주자는 심산이었다. 아내 몰래 아파트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집에 들르지도 않은 채 그대로 몸을 빼냈다. 주머니에서 무선 이어폰을 꺼내 귀에 꽂는다. 앙증맞은 체구에 걸맞지 않게 그 녀석에게는 소음 방지 기능이 있다. 귀에 들어가는 순간 주변 잡음을 걸러준다. 갑자기 세상이 조용해진다. 스마트폰을 조작해 음악을 고른다. 최신 유행 가요가 눈에 들어왔다. 버튼을 누른다. 이윽고 걸그룹의 신나는 댄스곡이 흐르고, 순간 나는 복작복작한 세상을 벗어나 새 세상에 발을 들였다. 내가 원하는 곳에 가려면 큰길을 건너야 한다. 방금 파란 등이 꺼졌는지 횡단보도 한편에는 기다리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잠시 긴장을 늦춰도 되는 여유가 생긴 셈이다. 눈을 감는다. 갑자기 모든 것이 낯설다.


우리 집 건너편은 번화가이다. 젊은 남녀들이 해진 시간을 보내기 좋아한다는 소위 핫 플레이스이다. 젊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는 이상하게 나이 든 사람도 덩달아 따라온다. 쳐다보기만 해도 부럽고 기분 좋은 젊은이들의 모습을 즐기려는 관음증 같은 것이 작동하는 것 같다. 그게 아니면 "나도 이들과 어울릴 정도로 아직 젊다"라는 어쭙잖은 동질감을 느끼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 뭐, 이유야 상관없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는 맛집도 많이 들어선다. 어찌 됐든 하루에 두세 끼는 꼭 챙겨야 하는 인간의 식욕을 채워주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가능한 한 즐겁게 그 행위를 즐길 수 있도록 맛난 음식이 준비되어야 한다. 먹어야 놀 수 있고, 놀아야 행복하기 때문인데, 거꾸로 먹는 것이 큰 행복을 주기도 한다. 나는 젊은이들을 쳐다보고 싶은 관음증도 없고 그들과 동질감을 느끼고 싶은 욕심도 없다. 그저 입에 맞는 음식을 느긋하게 먹으면서 잠시 고단함을 잊고, 배불러지는 만족감을 느끼고 싶을 뿐이다. 그래서 길거리를 걸으면서 머리 위로 어지럽게 널려 있는 간판들을 검색한다. 일단 옷가게, 부동산, 은행 간판은 빠르게 삭제한다. 몇 집 걸러 하나씩인 커피 전문점도 넘어간다. 지금은 물배를 채울 때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면 대충 식당 간판들이 남는데 그중의 어느 곳이 나에게 가장 큰 행복감을 줄 수 있을지 머릿속으로 계산한다. 물론 머리로만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나의 위장이 바라는 것도 있다. 9월 중순을 넘어섰는데도 아직 날씨는 무덥다. 시원한 음식이 당긴다. 그래서 나는 냉면집으로 들어갔다.


제가 음식 전문가가 아니라서 음식 사진 찍는 법을 몰라요. 냉면이 정말 맛있었는데 별로 그렇지 않게 나왔네요.


나에게 주는 '오늘의 상'으로는 물냉면 한 그릇과 작은 접시의 수육이 좋을 듯했다. 아니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포상은 맛있는 음식이 다가 아니다. 여유로운 저녁 식사에는 편안한 안식이 뒤따라야 한다. 안식을 챙겨 주는 데에는 약간의 알코올이 제격이다. 소주 한 병을 추가한다. 식당 점원은 의아해하는 눈길로 주문을 재확인한다. 그도 그럴 것이 차디찬 냉면에 소주라니 어울리는 조합은 아니다. 하지만 어울리는 조합이라는 게 별건가. 내가 지금부터 그렇게 먹기 시작하면 그것이 새로운 궁합이 되고 유행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언제부터인가 나는 주위 시선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게 되었다. 그저 내가 먹고 싶은 대로, 즐기고 싶은 대로 한다. 눈치 보며 살아가기에 내 남은 인생이 너무 짧다는 조바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냉면은 기대 이상으로 맛있었다. 소주 한 모금의 쓴 맛으로 입안을 헹군 뒤에는 면발의 고소함과 육수의 감칠맛이 몇 배로 증폭된다. 냉면은 뜨거운 음식이 아닌데도 나는 약 40분 정도의 식사 시간을 즐겼다. 소주가 함께 들어가면서 약간 취했는지 심지어 나는 갓 끓여온 칼국수를 먹는 것처럼 면발을 호호 불어가면서 시간을 끌기도 하였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머쓱해서 누가 쳐다보지나 않았는지 눈을 들어 둘러본다. 아니다 다를까 건너편의 점원이 나를 보며 웃고 있다. 술에 취했는지 부끄러웠는지 볼이 빨개진 나도 같이 웃어주었다.


냉면 그릇은 완전히 바닥을 드러냈고 그 사이에 소주 한 병도 모두 비었다. 식당 카운터에서 얻은 이쑤시개를 씹으면서 천천히 집으로 돌아왔다. 아내와 아이들은 모르는 눈치였다. 이른 저녁 시간에 내가 집에 돌아온 것도 오래간만인데 설마 그 시간에 저녁 식사를 마치고 소주 한 병을 비운채 취해서 왔을 것이라고는 생각 못했을 것이다. 나는 시치미를 떼고 소파에 앉아 요즘 읽고 있는 책을 꺼내 들었다. 한 페이지나 읽었을까? 책 위에 적힌 글자들이 흩어졌다 모이고, 모였다 흩어지기를 몇 번 거듭하더니 나는 그만 소파에 쓰러져 잠이 들어 버리고 말았다.

(계속)



*표지 이미지 출처: 서강학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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