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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란 벽돌 Sep 21. 2022

나는 또 왜 이리 생겨먹었을까?-5

중년의 문제아

그렇다고 내가 평생 동안 책 읽는 습관을 유지했던 것은 아니다. 중, 고등학교에 올라가 입시 교육에 시달리면서 나는 내가 선택했던 책들을 놓고 부모님과 선생님이 권유하는 교과서와 참고서를 집어 들었다. 물론 내가 그때까지 읽었던 책들과 같은 모양이고 같은 활자로 인쇄되었으며 새로운 내용이 가득한 책들이었다. 그러나 교과서에는 감흥이 없었고, 모험도 없었고, 꿈도 없었다. 대신에 강요된 지식이 있었고 메마른 이론이 있었다. 논리는 풍부했으나 상상을 불러일으키지 못했고, 참신함은 가득했으나 감동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고역인 것은 이 책의 내용은 얼마 후 시험으로 이어진다는 것이었다. 책에 담긴 내용을 달달 외워야 몇 주, 몇 달, 몇 년 후 치러지는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얻을 수 있었다. 성적이 좋아야 원하는 인생을 살 수 있다고 하였다. 나에게는 앞으로 살아가야 할 인생이 너무 길었다. 그것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어린 마음에 심한 공포심을 느꼈고 두려운 만큼 재미있는 공부를 할 수 없었다. 파블로프의 개처럼 나는 무조건 반사를 가지게 되었다. 똑같은 책인데도 교과서와 참고서를 접하면 부담감과 스트레스를 느끼게 된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좋아하는 일만 하고 살아갈 수는 없는 법이다. 그래서 억지로 그 책들을 읽었고, 밑줄 치고, 외우게 되었다. 읽은 책은 까매졌고 어떨 때는 지면이 온통 연필에서 묻어난 흑연에 덮여 안에 무슨 내용이 적혀있는지 읽기 힘든 경우도 있었다.


대학에 들어가서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원하는 책을 읽을 여유가 없었다. 의무적으로 읽어야 할 책들이 내게 주어진 시간과 능력을 훨씬 넘어설 정도로 많았다. 그것들을 읽지 않으면 뒤쳐졌고, 외우지 않으면 낙제였다. 매주, 매달 반복되는 시험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교과서를 읽고, 기억하고, 기억한 것들을 뱉어내는 생활을 반복했다. 뱉어낸 것들이 그대로 빠져나와 나의 뇌에 흔적도 남기지 못한 것은 아닐지 걱정될 정도였다. 하지만 확인할 틈은 없었다. 다시 읽어야 할 것들은 넘쳤고 머릿속에 들여놓아야 할 것들은 쌓여 있었다. 나는 내 젊음이 깎여나가는 것처럼 느끼며 그 일에만 종사했다. 일탈일 줄 알았던 것들이 일상으로 반복되면서 나는 책 읽는 습관을 점점 잊어갔다. 


젊은 의사들은 공부를 많이 해야 합니다.


대학을 졸업하여 인턴과 전공의 과정을 마치고 애송이 전문의가 되었지만 나는 이제 책에 대한 갈증을 잊은 것만 같았다. 강요된 교과서 읽기는 더 이상 없었지만 내 자의로 교과서를 보고 논문을 찾아 읽는 새로운 습관이 생겨났던 것 같다. 물론 그 당시에는 그런 것들이 필요했다고 생각한다. 경험이 적은 의사는 계속해서 공부할 것들이 많고 부족한 지식과 경험을 여러 곳의 강의, 교과서, 논문을 통해 채워 나가야만 했으니까. 의과대학과 수련의 과정에 생겨난 나의 욕심은 새로운 목표를 만들었다. 나는 실력 있는 뛰어난 의사가 되고 싶었다. 내가 만들어 놓은 이상형에 사랑을 느끼고 이성을 잃어버린 피그말리온(Pygmalion)이 된 듯하였다. 미친 사람처럼 열중하였다. 갈길은 멀었고 시간은 빠듯했다. 그 핑계로 약 이십 년의 시간을 흘려보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 시기를 거쳐 결과적으로 한 방면의 지식은 많이 성장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밖의 모든 방면으로는 퇴화하였다. 게다가 나는 꿈꾸는 방법을 잊었고 메말라가는 감성을 적실 줄 몰랐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평면적이 되었고 무엇보다 변해버린 자신을 성찰할 줄도 몰랐다. 사람들은 나에게 왜 웃을 줄 모르냐고 했고 너무 이성적이고 논리만 따진다고 하였다. 왜 다른 이들과 공감할 줄 모르냐고도 했고 가까워지기 어렵다고도 불평했다. 그러다가 나에게 갱년기가 찾아왔다. 그 시기의 심경 변화는 브런치에 올린 나의 첫 글들에 잘 나와있다. 관심 있는 독자님들은 한 번 읽어보시길 추천드린다. (그 글들은 이 글처럼 재미없지 않고 유머도 좀 섞여있어요.)


https://brunch.co.kr/@osdlee/2

https://brunch.co.kr/@osdlee/5


넘쳐났던 남성 호르몬이 줄어들면서 인생에 대한 나의 공격성은 누그러들었다. 각박한 치열함이 줄어든 틈을 감성이 파고들었다. 나는 내 아내를 따라 그동안 보지 않던 TV 드라마를 보게 되었고 별로 슬프지도 않은 장면에서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한 번 물꼬를 튼 눈물은 잘 멈추지도 않았다. 그런 나의 모습을 보고 아내는 조롱하기도 하고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드라마들은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재미있었다. 특히 평화로운 아침에 보는 드라마들은 이유를 알 수 없이 자극적이었다. 그렇게 몇 달을 지냈다. 그러다가 허기를 느꼈다. 미각을 폭격하는 기름기 가득한 고기를 배불리 먹어도 마지막에는 된장찌개를 얹은 흰쌀밥이 그리워지는 법이다. 감상적이고 상투적인 이야기 전개에 찌든 드라마나 영화는 나의 마지막 허기를 채워줄 수 없었다. 그것들은 시청자들의 상상력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이미 꽉 짜인 전개 구조로 시청자들의 자유 의지와 간섭을 차단한다. 그래야 아무 생각 없이 보며 시간을 때울 수 있기 때문이다. 알게 모르게 사람들은 자신의 상상력을 발휘하는 것을 불편해하고 귀찮아한다. 잘 차려진 음식들 앞에서 수저를 들어 즐기는 것은 좋아하지만 스스로 벼를 키워 탈곡하고 밥을 지어먹으라 하면 질색하는 이치와 같다. 상상력을 발휘하는 것은 농사짓고 요리하는 과정처럼 노력이 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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