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도마에서 더위를 식혀주는 그림으로...
십 년까지는 아닐 거다. 하지만 오래된 것은 맞다.
새해가 시작될 무렵 제주도로 가족 여행을 갔었다.
그때 우연히 마을 구석진 곳에 있던 편백나무 공방을 들렀었다.
피노키오 인형도 만들고... 음.. 실용적인 물건보다는
장식적인 물건을 더 많이 만드는 곳이었다.
그곳 주인장이 건네는 봉지커피도 마시고
검은 봉다리 가득 귤도 얻었다.
서울살이 하다가 제주살이 하는 거라고...
쉽지는 않았단다.
한참을 이야기 나누다 보니 구석진 곳에 있던
나무 도마 하나가 눈에 띄었다.
직접 만든 거라 했다.
투박해도 사람 손으로 만든 거라 마음이 움직였다.
그래서 제주 여행 갔다가 도마를 사 오게 되었다.
가로 47cm 세로 25cm 제법 큼지막하다.
나름 잘 관리하며 사용했었다.
중간중간 사포질과 기름칠도 잊지 않았고...
햇빛에 말려 소독도 해줬다.
그래도 늘 물과 함께 사용하는 주방도구인지라
곰팡이를 완벽하게 피할 수는 없더라.
이만큼 사용했으면 되었다 싶었을 즈음
새로운 도마를 구입했다.
그리고 헌 도마를 두고
버릴까? 버려야지... 하지만, 나무로 만든 건데...
하면서 버리기를 주저했다.
아마 수개월 동안
'버려!', '아냐!'를 반복했을 것이다.
이게 뭐라고...
"나무로 만들었다니까..."
그러다 끝내 결론을 내렸다.
그릇장 밑에 모셔 두기로.
'언젠가는 쓸모가 있을 거야.' 하면서 말이다.
마침내 그!때!가 되었다.
머릿속 상상을 실현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뜻대로 될지 장담할 순 없지만 해보자!
우선 곰팡이 핀 부분을 깎아 낼 수 있는 만큼 깎아 냈다.
그리고 썩 내키지는 않지만 별 수 없어
락스에 담갔다가 한 이틀 볕에 말렸다.
대강의 스케치를 한 후에...
집에 굴러다니던 조각도를 찾아냈다.
아마 아이가 학교 다닐 때
미술 시간 준비물이었을 거다.
열심히 팠다. 칼이 잘 들지 않는다. 불길하다.
조금만 더 파면된다 싶을 즈음, 퍽! 칼이 엇나갔다.
젠장... 피를 봤다.
아프다. 지혈하고 밴드 찾아 붙였다.
혹시 몰라 상처 부위 소독도 했다.
왼손을 다친 거라 작업은 이어갈 수 있었다.
지나치게 거친 부분은 사포질로 다듬었다.
분명 사포가 있었는데 다 어디 갔는지...
도통 보이지 않더라.
포기해야 하나? 싶은 찰나 수납장 구석에 낑겨 있던
손바닥보다 작은 사포를 찾아냈다.
나중에 보니 B4 크기의 사포가
아들 방 수납장에 떠 억 하니 있더라.
젯소를 발랐다.
배경은 아크릴 물감을 주로 사용한다.
그림도구는 붓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솜뭉치, 포장재 등등 그때그때 생각나는 도구로
그리기도 한다.
도마 위에 올리는 그림은 색연필 전용지에 수채와 물감으로 밑작업을 하고
유성 색연필로 채색을 마무리했다.
나무에 매단 사다리와 해먹을 매단 덩굴 줄기는
종이로 표현하기가 다소 애매했다.
그래서 색실에 아크릴 물감으로 색을 입혀 만들었다.
가능한 종이만으로 작업을 하려 했기에
고민이 많았다.
등장인물들까지 그려서 붙여주면 끝.
완성이다!
열흘 넘게 걸린 작업의 끝이다.
이 그림은 작년 여름 포토샵으로 그렸던 그림책 "여름이야기"의 한 장면이다.
여름날, 숲에 어디선가 커다락 옥수수 한 개가 뚝 떨어졌다.
풀벌레들이 먼저 발견했으나
어디선가 들쥐들이 몰려와 옥수수 알맹이와 옥수수 껍질을 가져갔다.
배불리 먹어 나른해진 들쥐들이
옥수수 껍질로 해먹을 매달아
시원한 그늘 아래서 낮잠을 즐기는 장면이다.
이렇게 해서 버려질 나무 도마의 쓸모는 잘 찾은 듯하다.
* 이 작업 이전에 완성된 작업들이 여럿 있지만 순서를 달리해서 올립니다.
너무 덥고 습하다 보니 시원한 그림을 올리고 싶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