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 스무 살의 무지한 당돌함]
2008년 겨울
지금으로부터 16년 전의 꽤 오래된 이야기를 꺼내본다.
유난히 춥고 따사로웠던 12월의 겨울, 나는 친구 따라 제주도에 갔다. 내가 5-6살 때쯤 아빠가 제주도에서 근무하셨을 때 가족들과 함께 갔던 일 외에 처음이었다. '대학생이 되어 부모님을 떠나 제주도라니!' 꽤나 흥분되는 일이었다. 그 당시 대학교 제주 올레길 탐방대 프로그램에 참여해서 갔었던 터라 다른 과 학생들도 두루두루 볼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이다.
올레길을 따라 걷는데 아직 용돈을 받고 있는터라 제대로 된 운동화도 챙기지 못한 채 바람이 송송 들어오는 운동화를 신고 갔다. 녹아버린 눈거리를 걸으며 운동화는 새까매져갔지만 나를 비추는 햇살은 따사롭기만 했다. 나의 뽀얀 피부와 햇살이 마주했을 때 비로소 내 눈빛은 반짝이며 빛이 났고, 내 볼을 찰싹 때리는 제주도 바람은 그저 귀엽기만 했다.
돌담길을 걸으며 사진도 찍고 히히 거리며 걷는 중에 어느 카메라를 든 남자가 다가와서 인터뷰를 요청했다. 나에게만 한 건 아니고 다른 학생들도 인터뷰를 촬영했던 것이다. 거의 반 쯤은 인터뷰를 쑥스러워해서 피하는 분위기였다. 그때 나에게 터벅터벅 다가오는 VJ감독은 제발 나만큼은 인터뷰를 피하지 않기를 바라는 표정이었다. 나는 마지못해 인터뷰를 하지 않고, 즐거운 마음으로 인터뷰에 응했다.
'제주도에 오니까 누가 제일 생각이 나요?'
나의 답변은 자연스럽고 본능적으로 '엄마가 생각이 나요.' 엄마는 오랜 기간 동안 암과 심장질환으로 투병하셨기에 당연히 엄마와 함께 오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겨울 햇볕에 살짝 눈을 찡그렸지만 스무 살의 눈동자는 반짝거렸고 내 볼은 추운 겨울에도 쑥스러움에 붉으스레 달아올랐다. 그렇게 인터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교수님이 갑자기 연락이 와서 '방송국에서 네가 와야 할 일이 있다고 하니 한번 가보렴.'
영문도 모른 채 방송국에 갔다. 그날 나는 '생방송 투데이'라는 프로그램의 패널에 앉아 올레길 다녀온 스케치 영상에 내레이션을 읽었고, 그날 바로 생방송으로 탐방 소감까지 방송하게 되었다. 방송이 끝나자 피디님과 작가님은 나에게 다음 방송은 새해의 일출을 보러 무등산에 올라가니 따뜻하게 입고 새벽에 방송국으로 나오라고 하셨다.
'사회복지학과 1학년 학생이 어떻게 생방송을 하냐고요...'
'첫 번째 방송한 건 얼떨결에 그렇다고 치자. 뭔지는 모르겠지만 나오라고 했으니 가보자.' 방송 아카데미를 다닌 것도 아니고, 스피치 학원을 다닌 것도 아닌데 어떻게 내가 리포터가 될 수 있지? 이런 생각은 나중에서야 돌이켜보니 할 수 있었던 생각이었다. 당장 며칠 뒤에 방송을 해야 하니 그냥 시키는 대로 했다. 새벽에 방송국에 도착하자 작가 언니는 나에게 그날의 대본을 주었다. 나는 대본을 읽고 바로 외웠다. 대본을 외우는 것을 어렵지 않았다. 스무 살의 밝고 명량한 분위기는 방송 프로그램과 맞았는지 피디님과 작가언니는 그다음 주에도 나를 불렀고, 나는 '자전거 타고 무작정 떠나는 남도 삼백리'코너의 주인공이 되었다.
'이참에 신문방송학과로 전과하는 게 어떻겠니?'
그날 이후 나는 신문방송학과 교수님으로부터 제안을 받았고, 그 교수님은 EBS 펭수신화를 만드셨던 김명중 교수님이셨다. 또, 사회복지학과 학과장님으로부터 전과를 하지 않으면 취업을 시켜주겠다는 이야기까지 들었다. 갑작스레 닥쳐온 스무 살의 첫 번째 선택은...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