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연락이 만든 큰 변화
정들었던 부다페스트를 뒤로한 채, 오스트리아의 비엔나로 떠나는 날.
아무 계획도 없던 전 날과 달리 북유럽에 점점 치고 올라가기로 결정한 뒤 그 중간지점인 폴란드로 입국하기 위해 잠깐 들르는 곳이긴 하지만, 그래도 촉박하게 움직이는 건 싫어서 2박 3일로 넉넉하게 일정을 잡았다.
오전 10시 터미널에 도착해서 만난 여행자 C와 함께 출발. 버스로 세 시간 반정도 걸리는 여정이라 그리 부담되는 이동은 아니었지만, 체감상 야간 버스 타고 가는 7~10시간보다 주간에 이동하는 3~4시간이 더 힘들게 느껴지더라. 잠도 잘 안 오는 시간대인만큼 괜히 멍하게 있으며 이동 내내 잡생각에 가득 차 시간을 보냈다.
비엔나는 정돈되어 있는 세트장 같은 느낌에 약간은 낯설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익숙했다. 몇 년 전 오스트리아의 다른 유명 도시인 잘츠부르크와 할슈타트를 이미 다녀온 적이 있는데, 아무래도 그때의 기억이 조금 더 이 도시를 친근하게 느껴지도록 만들었나 보다.
일단 숙소로 이동해 간단히 짐정리와 정비를 한 뒤, 근처 유명 관광지인 쇤브룬궁으로 이동했다. 오늘은 오랜만에 여행 느낌 물씬 풍기는 관광 일정으로만 가득 채워져 있었는데, 아무래도 나 혼자 다니는 게 아닌 C와 함께 움직이는 만큼 오래간만에 이리저리 바쁘게 돌아다니며 다른 여행객들과 다르지 않게 시간을 보낼 예정이었다.
방문 전 간단히 정보를 찾아보니 쇤브룬 궁은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을 모티프로 해서 제작되었다고 하더라. 그래서 그런지 건물 양식은 둘째치고 넓은 정원이 있는 게 참 마음에 들었고, 친한 친구가 베르사유 근처에 거주하여 그 지역은 자주 방문하기도 한 데다 궁전 자체에도 여러 좋은 사람들과 추억이 있는 만큼 이 쇤브룬궁은 처음 와보는 장소임에도 왠지 모를 그리움과 행복이 섞인 느낌이 들었다.
게다가 원래 뮤지컬을 매우 좋아하는 편인 나는 인생 첫 뮤지컬이었던 '엘리자벳'을 특히 좋아하는데, 이곳에 오고 나서야 쇤브룬 궁이 엘리자벳의 주인공이자 실제 오스트리아의 황제와 황후 요제프와 시씨가 살았던 곳이었다는 걸 알게 되어 매우 흥미로웠다! 이곳은 참 여러모로 내게 좋은 추억들을 상기시켜 주는구나.
궁전 내부는 입장료가 생각보다 비싸기도 하고, 나와 C 둘 다 문화재 관광에 큰 관심이 있는 편은 아니라 간단히 정원 산책만 하며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정원의 뒷마당으로 넘어가면 시내가 잘 보이는 높은 언덕이 있는데, 오르는 게 어려운 편도 아닌 데다 무엇보다 확 트인 들판이라 가만히 앉아있기 너무 좋았다. 그래서 함께 그 장소에 올라 C에게 양해를 구한 뒤 잠시 이어폰을 끼고 혼자만의 시간을 가졌다. 초반 여행에서 만났던 A와 함께 다니며 알게 된 내가 좋아하는 장소에서 갖는 혼자만의 시간은, 새롭게 배우게 된 나를 위한 아주 좋은 습관이라고 생각한다.
보통 이때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거나, 혹은 눈앞에 보이는 풍경에만 집중한다. 물론 생각보다 쉬운 건 아니긴 하지만 그렇게 생각을 한번 덜어내면 기분도 훨씬 좋아진다.
여기서 하루 종일 있어도 좋았을 것 같긴 하지만 어쨌든 우린 관광객이고, 2박 3일을 머무는 나와는 달리 C는 1박 2일만 이곳에 머무는 만큼 간단히 구경을 마치고 시내 쪽으로 이동했다. 이 외에는 무난하게 도시에서 유명한 스팟들을 한번 죽 훑고, 기념품에서 엽서도 구매하며 평범하면서도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여행자로서 딱히 하고 싶은 건 없었지만, 비엔나는 음악의 도시인만큼 방문한 김에 오페라 및 오케스트라 공연을 한번 보고 싶다는 C에게 동조하여 같이 정보나 알아볼까 하고 오페라하우스를 향했다.
이곳의 공연은 아주 유명한 만큼 이미 예약도 다 찼지만, 마침 그 앞에 티켓 판매원이 오페라 하우스 외에 소극장의 공연도 홍보하길래 더 고민해 볼 것도 없이 그곳에 방문하기로 했다. 비록 잘 알려진 공연은 아니지만 구성이나 러닝타임도 우리에게 더 잘 맞았고, 한번 하는 경험인 만큼 앞 좌석으로 예매했는데 판매원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까지 해줘 VIP로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사실 정보를 크게 찾고 오지 않은 터라 봐도 그만 안 봐도 그만이었을 만큼 서로가 공연에 대해 진심은 아니었지만, 또 이렇게 우연과 우연이 겹쳐 재미있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게다가 C는 이제 막 여행을 시작한 단계인 만큼 이런 우연이 다가왔음을 매우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니 나 역시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내 여행기에서 참 많이 적혔겠지만, 아무 계획 없이 다니다가 마주하는 우연한 기회들이 참 즐겁게 다가오고 있음을 늘 언급했으니깐!
사실 공연 자체는 그다지 특별할 게 없었지만, 그럼에도 감상평을 말하자면 값비싼 티켓이 전혀 아깝지 않을 만큼 너무나 좋은 경험이었다. 클래식이 유명한 비엔나에서 본연의 컨텐츠를 즐기고 있다는 것만으로 플러스 요인이었데가 눈과 귀가 모두 즐거운 경험이었으므로 내게 이런 제안을 해준 C에게 고마울 뿐이었다. 오늘도 또 좋은 추억을 채워나갔다!
C와는 오늘이 처음이자 마지막 동행날인 만큼, 공연이 끝나고 난 뒤 숙소 근처의 펍에서 간단히 술 한잔 하러 이동했다.
그는 한 달 정도 유럽을 여행한 뒤, 이후 몇 달간 영국에 있는 지인의 집에서 머물 것이라 했다. 그와 보냈던 오늘 하루가 매우 즐거웠던 터라 마침 나도 조만간 프랑스를 들를 것 같기에 시간이 맞으면 파리를 소개해줄 테니 놀러오라 제안했다. 다른 곳은 몰라도, 나의 장소인 파리에서 C를 또 만날 수 있다면 기쁠 것 같았다.
이런 소소한 얘기를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펍의 주인과 그의 친구들이 우리에게 말을 걸며 같이 합류하자더라. 비록 언어가 잘 안 되긴 하지만 이런 이벤트는 또 놓치지 못하기에 서툰 영어로 이리저리 말 맞추며 즐겁게 놀았다! 한창 어두컴컴한 밤이었지만 분위기는 점점 무르익어 펍의 문을 닫은 채 노래를 크게 틀고 다 같이 떠들며 놀고, 내가 원하는 노래인 Billy Joel의 Piano man 도 크게 튼 채 다 같이 떼창 하며 술을 나눠마셨다.
음악, 음악! 오늘은 음악의 날인가 보다. 쇤브룬 궁 정원의 언덕에서 이어폰을 끼고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며 들었던 잔잔한 내 취향의 노래부터 모든 게 완벽했던 오케스트라 공연, 그리고 펍에서 다 같이 어울리고 떠들며 부르는 노래까지, 음악이 늘 머물렀던 오늘은 즐겁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계속되는 술자리에 흥과 취기는 오를 대로 오르고, 결국 큰 실수를 해버렸다. 바로 전 연인에게 연락을 남긴 것이다. 취한 와중에도 시차에 대한 개념은 있던 건지 그냥 메시지만 남기고 말았는데, 보내고 나서야 이게 뭐 하는 짓이지 싶은 생각이 번쩍 들어 그 아이에게 오는 답장을 마주하고 싶지 않아 연락이 오지 않도록 차단해 두었다. 내가 한 행동에 그녀의 반응을 마주하는 게 무서워 지레 겁먹었던 것이다.
당시의 기억은 몽롱하지만 그래도 이때만큼은 뚜렷하더라. 아침에 일어난 뒤에도 당연히 후회했다. 뭐 어쩌겠어? 20대 연애에 술 먹고 연락 한 번쯤 해볼 수 있는 거지, 라며 생각하는 게 나의 최선이었을 뿐이다.
사실 언젠가 때가 무르익으면 한 번쯤은 연락해보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 기회를 술김에 날려버린 느낌이었다. 별로 유쾌하진 않았다.
어쨌든 그녀에게 무작정 연락을 보내고 난 뒤, 바람 좀 쐴 겸 왁자지껄한 펍을 나와서 역시나 술기운을 변명삼아 한국에 있는 가장 친한 친구에게 처음으로 연락을 했다. 여행을 시작할 때 적었던 것처럼 나는 한국의 지인 그 누구에게도 현재 내가 해외에 있다는 걸 알리지 않은 채 모두의 연락을 받지 않고 있었기에, 국내에 있는 지인과는 처음 하는 연락이었다.
나와 10년 지기인 그 친구는 나를 아주 잘 안다. 언제나 강한 척 하지만 정말 큰일이 있으면 늘 이런 식으로 혼자 견뎌내기 위해 모두에게 멀어지고 삭혀버리는 내 성격을 아는 그 친구는 이번에도 역시 내가 어련히 호들갑 떨다가 나타날 거라고 생각했기에 별로 걱정하지 않고 있었단다. 웃기면서도 참 나를 잘 아는구나 싶은 얘기였다.
이 여행을 떠나오면서, 위로든 충고든 어떤 말도 듣고 싶지 않을 만큼 지쳤었기에 원래 나를 알던 사람들과는 잠시 거리를 둔 것이었다. 그리고 현재는 한국에서 겪은 일은 아예 모르는 새로운 사람들과 새로운 인연을 써 내려가며 나름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내가 친구들의 걱정하는 마음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이 여행에서 여유를 되찾았기 때문일까, 결국 새삼 또 느껴지는 건 오랫동안 나를 알고 지냈던 친구들의 소중함이었다. 너무 가까운 사이라 늘 있는 듯 마는 듯 연락하고 살다가도 정말 무슨 일이 있으면 내게 도움 되는 얘기만 해주는 친구. 정말 너무 고마운 얘기들만 채워주었다.
그 친구는 내 전 연인과도 몇 번 만나본 데다, 내가 그토록 바랬던 결혼까지 이미 한만큼 여러 조언과 위로를 섞어주었다. 술김에 감정이 차올라 이별에 있어 자책하던 나에게, 이별이 누구 하나의 잘못은 아니라는 둥 진부하지만 꼭 내게 필요한 말만 해주며 마음을 지탱해 주었다.
본인이 내 연애 때의 모습을 보았을 땐, 나는 결혼을 바라긴 하나 아직 결혼에 대해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인 것 같았다고 하더라. 어쨌든 그렇게 여행을 떠난 김에, 내가 정말로 결혼을 하고 싶던 이유는 뭐였는지 잘 생각해 보고 마음의 정리를 하고 왔으면 좋겠다고 얘기해 주었다.
그래, 정말 너무 뻔하고 진부한 얘기지만 여기서 끝날 거였으면 어찌 됐든 끝났을 인연이다. 비록 지금은 당연히 이렇게 힘들 수밖에 없지만 그것도 늘 시간이 약이지 뭐. 게다가 지속되는 여행에 있어서 자유로움과 행복을 있는 그대로 느끼게 되어가고 있는데, 이렇게 나에 대한 돌아보는 시간 없이 당시에 원했던 대로 무작정 결혼 준비가 이뤄졌다면 할 수 없었을 경험들로만 채워지고 있는 이 순간들이 다시금 참 소중하게 느껴졌다.
새벽이 늦게까지 시간을 보낸 나와 C는 슬슬 마무리를 하고 숙소로 복귀했다. 비록 많은 언급을 못하긴 했지만 그 역시 우연이 만들어준 좋은 인연이었다. 여행에서 만남과 헤어짐이 있는 건 늘 당연하지만, 그래도 C는 언젠가 꼭 다시 보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온 곳에서 생각보다 큰 사건을 겪게 되었다. 다만 지금의 나는 전 연인에게 했던 연락에 대한 걱정보다도, 친구에게 들었던 나를 위한 얘기들이 더 기억에 남는다. 나와 연락했던 그 친구뿐만이 아니라, 실제로도 현재 나의 메신저엔 갑자기 사라져 버린 나를 걱정하는 여러 친구들의 수많은 연락이 와있다. 나는 이렇게 사랑받는 사람이었구나.
실수는 했지만 후회는 없었다. 오늘의 이 일을 기점으로 내 여행에 대한 마음가짐이 크게 바뀌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