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담아 Feb 23. 2024

비엔나, 행복은 내 안에 있음을

인정하고 내려놓자

새벽 늦게까지 놀고 들어왔기에 조금은 느리게 시작한 비엔나의 두 번째 날.


술을 많이 마시기도 한 데다 C는 이른 오후에 이곳을 떠나기 때문에, 함께 간단히 식사를 하러 갔다. 비엔나가 생각보다 물가가 싼 편도 아니고 아침은 간단히 처리하고 싶었기에 마침 숙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 대학가가 있어 그 근방에서 가성비 좋은 식사를 간단히 한 뒤, 떠나는 역까지 배웅 나가주었다.


언제나 여행에서 만나는 모든 이들은 만남과 헤어짐이 뚜렷하다. 다시 볼 사람은 보겠지? 비록 부다페스트에서의 마지막 날 밤부터 시작해 이틀도 채 되지 않는 짧은 동행이었지만, 어제의 사건으로 인해 온전히 나에게 더 집중하느라 그의 얘기를 더 많이 다루지 못한 게 아쉬울 정도로 좋은 인연이었다. 비록 이 여행길에는 다시 마주치기가 힘들지 몰라도, 그는 한국에 돌아가고 난 뒤에도 다시 보게 될 것이란 걸 믿어 의심치 않는다.




오늘 밤 야간버스를 타고 폴란드의 크라쿠프라는 지역으로 이동할 생각인데, 자정에야 출발하는 만큼 시간이 여유롭기에 푹 쉬다가 어제는 시간이 부족해서 가지 못했던 벨베데레 궁전만 슬쩍 들러볼 예정이었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클림트의 키스정도는 보고 와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게 이번 외출의 딱 하나 있는 이유였다.


그래도 키스정도는 봐줘야 비엔나에 왔다고 할 수 있지


왜 이전 여행에선 비엔나를 올 생각을 못했을까? 잘츠부르크도, 할슈타트도 다녀온 데다 심지어 비엔나 바로 옆에 위치한 슬로바키아의 브라티슬라바라는 도시까지 다녀왔으면서 이곳을 올생각을 안 했었는지는 모르겠다. 좋아할 만한 요소가 충분히 있는 곳이었다. 지금껏 돌아다녔던 다른 여행지들보다는 덜하긴 하지만, 이곳 역시 나중에 한번 더 방문하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되는 곳이었다.




그 후엔 크게 하고 싶은 일정이 없어 숙소에 들어와 침대에 누워 뒹굴거리며 어제 연락했던 친구와 또다시 연락을 하며 술김에 흐릿해진 어제의 기억을 조금이나마 정리했다. 어렴풋했지만 전 연인한테 연락했던 기억이라거나, 취해서 친구한테 연락 붙들고 찌질댄 것, 그리고 나눴던 대화까지 상기하며 어제의 스스로가 저지른 만행에 웃음이 나올 뿐이었다.


지금까지의 여행기를 기록하며 꽤나 자주 '나는 행복해'라는 표현을 적어냈다. 다만 지금까지 '행복'이라는 단어를 꺼낼 때마다, 나는 정말로 행복한가?라는 의문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 없었다. 어쨌든 여행을 시작하게 만든 원인이자 아직까지 나를 따라다니던 이별이라는 그림자가 행복을 떠올릴 때면 마음 한편에 남아 나를 붙잡고 있었다.


다만 어제의 무엇이 계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일련의 사건들 이후로 마음이 꽤나 가벼워졌다. 뭐라고 보냈는지 잘 기억은 안 나지만 묵었던 얘기를 그 아이에게 보냈던 게 이유일 수도 있고, 아니면 내 얘기를 잘 들어주고 좋은 말들을 해준 친구 덕분일 수 도 있겠지만, 이제는 더 이상 혼자 숨고 싶지가 않았다.




아니, 내가 괜찮아진 계기를 알았다.


나는 인정한 것이다. 머리로는 아는 것과 인정하는 건 다르다. 나도 머리로는 다 알고 있었다. 심지어 한창 사귀는 도중에도 알고 있었다.


그녀와 나는 정말 다른 사람이라는 걸. 다만 사랑하니까, 사랑하기 때문에 라는 아주 좋은 이유, 혹은 변명이 있었기에 서로의 다름을 애써 무시하고 지내왔던 것이다. 그것이 곪아 터진 게 결국 우리가 헤어질 수밖에 없던 갈등의 원인이었다.


나는 이별의 원인이 내게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 아이에게 야속한 얘기일 순 있지만 그건 아니었다. 손바닥도 부딪혀야 소리가 나는데 이별의 원인이 내게만 있을 리는 없었다. 머리로는 알고 있던 이 모든 것들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스스로 인정하기까지 여행을 시작한 후 약 한 달이란 시간이 지나 이곳 비엔나에서 깨달아버렸다. 서로가 다를 순 있지만 서로의 다름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우리. 그것이 이별의 이유였다.


그리고 이 이별의 이유가 내 머리에서 모두 정리되는 순간, 늘 조그맣게라도 갖고 있던 희망의 끈을 놓았다.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지금까지의 내 여행과 일상을 죄어오던 나의 망상.


'언젠가는 그녀를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몰라.'


그 생각은 이곳 비엔나에서 흩날려갔다. 인정을 한다는 건 참 슬픈 일이었지만, 이제는 똑바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한 들, 사람 관계가 모두 그렇듯 마법같이 그녀를 잊거나 끊어낸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 날 이후로, 여행에서 늘 영향을 미치던 내 상상 속의 그녀는 더 이상 나의 선택에 관여하지 못했다.




가장 처음 한건, 혼자만의 동굴에서 나온 것이었다. 갑자기 사라졌던 나를 걱정하는 모든 친구들한테 연락을 돌리고, SNS에도 내가 여행 중임을 밝혔다. 이전에도 늘 강박을 버리자고는 했지만 아직까지 내 여행길을 숨기고 다녔던 것도 결국 나 스스로의 강박에서 나온 행동이었던 만큼 그만두기로 했다.


진심으로 나를 걱정해 준 친구도 있고, 오래간만에 전한 안부에 웃으며 넘기는 친구도 있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러더라.


"조용하다 싶었더니 이런 여행을 하고 있었어? 진짜 부럽다."


조금 짓궂은 친구는, 이별이라는 계기는 이용당한 거고 결국 또 너 하고 싶은 대로 자유롭게 살러 떠난 거 아니냐고 농담과 질투를 함께 건넸다. 이 말을 듣고 많이 웃었다.


베르사유에도 이런 풍경이 있었는데


그래, 나는 지금 모두가 부러워할만한 여행을 하고 있다. 있는 그대로 즐거운 여행이 매일 펼쳐지고 있다. 모두가 부러워하고, 스스로도 현재의 이 순간이 소중하게 남을 것이란 걸 알고 있는 귀중한 시간들의 한복판에 서있는 사람이 나였다.


내가 앞선 여행길에 적었던 '행복'이라는 표현은, 어쩌면 거짓말이 조금씩은 섞여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다만 이곳 비엔나에서 이제는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행복한 여행을 하고 있어.





그리고 뜻밖에, 이전의 부다페스트 동행으로 잠시 만났었던 한 친구와 오랫동안 연락했다. 한두 시간의 대화였지만 아주 따듯한 아이라는 게 느껴지는 대화였다.


그 역시 나를 좋게 기억해주고 있던 일이 있었는데, 우리가 함께 동행을 했던 바로 다음날 그 아이는 한국으로 귀국하는 일정이기에 정말 스치는 인연일 뿐 더 이상 볼 일이 없을 사이였다. 게다가 개인적으로 둘이 만난 게 아닌 대다수의 사람이 함께 있었던 만큼 당연히 그렇게 지나갈 인연이라 생각했고.


다들 술기운에 들떠 한국에서도 보자는 얘기를 꺼냈는데, 어차피 단 하루의 인연일걸 알았던 나는 이전 카파도키아에서 A에게 그랬던 것처럼 당시의 술자리에서도 방어기제가 또 세워져 '여행지에서 인연은 한번 보고 말 수도 있는 거지.'라고 말을 꺼냈다. 으이구 바보.


다만 그가 타야 할 귀국행 비행기에 문제가 있어 어쩌면 내일 출국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얘기를 술자리에서 잠시 언급했었던걸 들었던 터라, 나는 다음날 그 아이가 공항해 도착했을 시간쯤에 문제없이 비행기에 잘 탑승했냐는 연락을 남겼는데 그 날 만났던 사람들 중 자신의 그 안부를 물어준 건 내가 유일했다더라.


마치 술자리에선 다신 안 마주칠 사람인 것처럼 말하더니 정작 그렇게 말한 나만 자신의 안부를 끝까지 물어주는 게 웃기면서도 기억에 남았단다. 그리고 나한테 따듯한 사람이라고 말해주는 것이 참 고마웠다.




그가 나를 어떻게 봐주었든 간에 사과를 건넸다. 나는 사실 그때의 인연들이 기억에 남을 것이고, 보고 싶을걸 알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러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알기에 혼자 그 관계에 깊게 빠지고 상처받는 게 싫어 나온 방어기제였다고.


왜 이번에도 솔직히 또 보고 싶을 거라고 말을 못 했지? 카파도키아에서의 A가 서운해했던 그 순간을 기억하면서도 또 그런 식으로 말을 꺼냈다는 게 참 사람이 쉽게 변하지는 않는 것 같다.


그는 정도 많고, 얘기도 잘 들어주고, 또 얘기하는 것도 좋아하는 친구였다. 분명 나도 남의 감정 하나하나에 몰입해 가며 깊게 얘기 들어주던 때가 있었는데, 살아가며 각자의 삶이 점점 각박해져 이런 이야기를 누군가와 나눠보는 게 참 오랜만이었다. 내 얘기 하나하나를 진심으로 세세히 들어주고 공감해 주는 그 친구한테 참 고마웠다.    


심지어 그도 나처럼 사람 만나는 거 좋아하고, 여행을 짧지 않게 하며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들도 있지만 본인만 너무 정주면 상처받을까 봐 먼저 연락하고 그러진 않았다고 한다. 그 이유조차 나랑 비슷하다. 이건 감정적인 사람들이 늘 풀어나갈 숙제인 것 같다. 다만 적어도 내가 상처받기 싫다고 남한테 상처 주는 발언은 하지 말자 담아야.




너무나 나를 편하게 만들어준 대화를 마친 뒤, 슬슬 출발해야 하는 시간이 온 나는 혼자 간단히 패스트푸드점에서 음식 사 와 먹고 쉬다가 열한 시에 크라쿠프로 출발하는 버스를 타러 갔다. 아니 근데 이 근처의 나라들은 대체 왜 물을 잘 안 파는 거야?? 스파클링 워터만 있고, 심지어 자판기에도 물이 없었다. 결국 파워에이드만 샀네.


생각해 보니 심야버스를 안타본건 아니지만 또 이렇게 혼자 타는 건 처음이다. 이렇게도 매번 혼자 해보는 게 늘어나다 보면 또 혼자 있어도 행복해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겠지. 아니 어쩌면, 난 오늘 비엔나에서부터 이미 행복해 할 수 있는 사람이 된 채로 이동하고 있는 걸지도 몰라.


조금 늦었을지도 모르겠지만 난 이제 나의 여행을 즐기러 간다. 더 이상 마음의 그림자는 남지 않은 채, 온전히 나를 돌아보고 즐길 수 있는 여행은 오늘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이렇게 나는 또 하나 배웠다.


폴란드에서도 좋은 일, 즐거운 일들이 가득했으면 좋겠다. 일단 북유럽의 초입에 들어가는 만큼, 많이 춥지만 않았으면..!    

이전 05화 비엔나, 음악과 시간은 흐른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