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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아 Feb 23. 2024

부다페스트, 마음이 편안해진 곳

먼 훗날 한결같이 날 반겨줘

어느새 일주일도 훌쩍 지나가 부다페스트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


전날 자그레브를 다녀온 피로감으로 인해 늦잠 자고 일어난 뒤 마지막 남아있는 재료들로 요리해 먹었다. 막바지라 재료가 약간 부실하긴 했지만 한결같이 맛도 있고 여행비용도 절감할 수 있어서 좋았다.


장바구니 들고 한적한 동네마트로 가서 알지도 못하는 언어를 번역기 돌려가며 필요한 재료 가득 사서 돌아오던 첫날. 아픈 와중에도 내 취향껏 재료 섞어서 요리해 먹던 지난 며칠. 식당에 가서 근사한 요리를 하는 것도 물론 좋지만 이런 별 거 없는 기억들이 나중에 보았을 때 더 오랫동안 내 마음에 남을 것이라는 걸 안다. 이런 소소한 행복이 행복으로 느껴진다고 생각 드는 것만 해도 이번 도시에서 보낸 나날은 아주 성공했다고밖에 볼 수 없겠다.




튀르키예와 조지아, 그리고 헝가리. 어쩌다 보니 세 국가에 약 일주일정도씩 머물렀고, 저번과 마찬가지로 오늘이 지난 후 어디로 떠날지 고민하는 시간을 가져보았다.


폴란드의 바르샤바를 거쳐 북유럽 쪽을 올라갈까 싶긴 했지만 뭔가 아직까진 그 지역에 확 와닿는 게 없기도 했고, 원래 가려했던 그리스와 그 근처 몬테네그로를 비롯한 발칸반도 지역을 여행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싶었지만 이후의 동선이 꼬여버릴까 걱정됐으며, 업무상의 이유로 프랑스에 잠깐 방문할까도 싶었기에 당장 다음날 어디로 가는 게 제일 나을지 확신이 서지 않고 있었다.


사실 여행을 시작할 때만 해도 최소 세 달, 최대 여섯 달 정도의 기간을 두고 시작한 데다 굳이 유럽국가만 한정 짓지 않은 채 이리저리 돌아다닐 예정이었다. 비록 불발되었으나 이집트와 요르단, 이스라엘 행도 계획에 있었으며 인도를 비롯한 아시아 지역도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남미 쪽도 생각이 있었는데, 예전에 A와 나눴던 대화에 따르면 그 지역은 방문하기 전에 예방접종을 미리 맞아야만 한다기에 이번 여행 때는 방문이 힘들 듯했다. 결론적으론 현재까지의 내 루트를 고려해 봤을 때 이번에는 어쩔 수 없이 유럽지역 내를 돌며 마무리할 것이 유력해졌다.


 내 여행 계획이 어떻게 흘러갈지에 대해 생각해 보다가, 나 스스로가 지금의 이별을 받아들이기에 조금은 담담해진 것 같기에 마지막은 그 아이와 만났던 스페인의 그 도시를 가면 어떨까 라는 생각을 처음으로 해보았다. 다만 상상조차 아직은 객기였던 건지 그 장소에 내가 있다는 걸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 막히는 느낌을 받았다.


현재의 여행에서 굳이 과거를 들여다볼 필요도 없고, 늘 둘이 있던 그곳에서 혼자인 나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곳을 가볼까 하는 생각만으로도 약간 우울해지던 터라 결국 내 다음의 여행 계획은 아무것도 확정된 것 없이 흐지부지 된 채 오늘 하루를 잘 보내며 더 고민해 보기로 했다.




새로운 여행이 시작되기 전, 머리를 한번 정리하기 위해 한인 미용실에 다녀왔다. 한국에서 머리하고 왔으면 더 나았을 테지만 후회는 아무리 빨리해도 늦은 법이기에 여기서 만 포린트(약 4만 원) 주고 커트했다. 사실 미용실 의자 앉아서 디자이너분이랑 얘기할 때까지 확 잘라버릴까 아니면 계속 기르기 위해 정리만 할까 싶다가 어차피 내 여행이 앞으로 한 두 달 내에 마무리될 것 같아서 그냥 시원하게 자르기로 했다.


단발로 넘어가고 있던 긴 머리를 확 쳤는데 아주 마음에 들었다. 잘랐을 때의 쾌감도 있고 무엇보다 시원하다. 다만 문제라면 오늘이 내가 헝가리 있으면서 날씨가 제일 안 좋았던 데다 바람도 세서 머리가 답도 없이 휘날리는 거 정도? 생각해 보니 앞으로 북유럽 쪽으로 올라가게 된다면 방문하게 될 나라들도 보통 춥거나 바람 많이 불 텐데 앞머리를 사수하며 다닐 수 있을지가 약간은 걱정됐다.




일정 마친 후에는 혼자 간단히 시내 좀 돌아다녀볼까 싶었는데, 마침 저녁동행으로 구해놨던 일행 중 한 분이 낮에 딱히 일정도 없고 유명한 스팟 중 하나인 뉴욕 카페에 같이 갈 생각 있냐기에 합류하기로 했다. 원래대로라면 줄이 꽤 긴 곳이지만 다행히 내가 갔을 땐 시간대가 애매해서 그랬는지 꽤 수월하게 들어갈 수 있었다.


먼저 합류한 여행자는 사진 찍기와 여행을 좋아하고 한 달 살기도 경험해 보며 다양한 시도를 해보는, 여행을 하다 보면 꼭 만날 수 있는 타입의 사람이었다. 간단하게 디저트랑 토카이 와인 시켜두고 여행에 대한 주제나 간단한 개인얘기들을 섞어가며 오래간만에 타인과 수다 떨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처음 보는 관계라 오히려 인간관계가 아예 겹치지 않는 사이에서 오는 나름의 편안함도 있는 만큼 더 술술 얘기할 수 있는 부분도 많았다.


그래도 예뻤다! 가격은 동유럽치곤 영 아니지만


아 그리고 뉴욕카페에 대해 짧게 적어보자면,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다. 사실 부다페스트의 유명 관광지중 하나가 굳이 '뉴욕카페'인 것도 꽤나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황금빛 인테리어가 화려하고 아름답긴 했지만 마찬가지로 황금빛 인테리어가 유명한 파리의 오페라 쪽에 위치한 스타벅스와 비슷하다는 느낌으로 익숙함을 지울 수 없었다. 이 어쩔 수 없는 프랑스 사대주의에서 얼른 벗어나야 할 텐데 말이야.




이후엔 어부의 요새 올라가서 마지막 일몰 및 야경을 보며 사진을 남겼다. 어쩌다 보니 동행이 나 포함 여섯 명이나 모였는데, 나는 개인적인 사진 몇 개만 부탁드린 이후엔 굳이 복작복작하게 같이 다닐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 다른 분들이 관광하는 동안 늘 혼자 앉아있던 곳으로 이동해 간단하게 일기를 적으며 마을 정리했다. 날씨가 좋지 않아 노을이 아예 안보일 수도 있을 것 같았는데 생각보다 또 예쁘게 하늘이 물들어서 마지막으로 보며 생각 정리하기 좋았다.


흐린 것치곤 꽤나 예쁘게 물든 하늘이었다


이후엔 다 같이 저녁식사 겸 술 한잔 하러 갔는데 오랜만에 마주하는 다수의 사람들이라 그런지 생각보다 너무 재밌었고, 다들 유쾌하신 분들이라 여행동안 이렇게 웃어본 적은 처음이었을 만큼 그 장소의 분위기 자체가 즐거웠다. 더 보고 싶을 만큼의 인연이 남을 것 같지는 않지만 오늘 하루 즐거웠던 것으로 만족한다. 때때로 동행은 그런 거니깐!


중간에 우연히 만난 동행 한 명이 더 추가됐었는데, 도나우 강가 쪽에서 단체로 사진 찍으며 시간 보낼 때 옆에 홀로 있던 한국인 관광객이 사진을 찍어달라고 요청하길래 흔쾌히 받아주었다. 그러다 자연스레 우리 동행 그룹에 합류했는데 대화를 나눠보니 다음날 오스트리아의 비엔나를 가려는 계획이 있다고 하더라.


안 그래도 나 역시 폴란드를 거쳐 발트 3국, 그리고 북유럽까지 올라갈 루트를 채택하게 될 듯하여 그 중간에 위치한 비엔나를 들러야 하나 고민 중이었던 터라 술 마시며 조금 친해진 그 동행, 바로 여행자 C와 다음날 함께 비엔나로 떠나기로 했다. 계획 없는 여행은 참 이런 매력이 있구나. 늘 우연을 마주하게 되는데, 그것들이 하나하나 나쁘지가 않다.




부다페스트에서 보낸 일주일도 이렇게 마무리가 됐다. 그때 튀르키예에서 그리스를 갔더라도, 혹은 이스라엘을 갔더라도 또 새로운 인연을 만나고 새로운 경험을 하며 즐거웠으리란 걸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하지만 뭐가 됐든 나는 이곳 부다페스트에 오기로 결정했었고, 비행기 표를 예매할 때부터 오늘이 마무리되기까지 단 한 번도 그 선택을 후회한 적이 없을 만큼 너무 좋은 나날들이었다.


늘 한결같은 아름다움을 줘서 고마웠어


늘 내가 있을 자리를 만들어주던 어부의 요새로부터 보이는 도나우강과 국회의사당의 야경, 스치듯 지나갔지만 즐거웠던 인연들과 맛있는 음식들, 짧게 들린 자그레브까지. 이 시간이 없었으면 앞으로의 내 여행이 지금처럼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싶을 만큼 꼭 필요했던 휴식을 제공해 준 나라였다.


모두가 2~3일 정도만 머물고 떠나는 이곳에서 일주일이나 있었던 나. 그곳에 지루함이나 권태감은 전혀 없었다. 그만큼 내가 이곳을 마음에 들어 했다는 거겠지? 성격상 한번 다녀왔던 여행지에 다시 가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이곳 헝가리의 부다페스트는 꼭 언젠가 다시 올 수 있으면 좋겠다. 늘 앉아서 글을 적어 내려갔던 장소는 몇십 년이 흘러도 그대로 날 반겨줄 테니, 먼 훗날 그때를 마주한다면 참 기쁠 것 같아.


평안함을 줬던 부다페스트. 이젠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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