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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아 Oct 22. 2024

사랑이 아니어도, 여행이 있잖아

프롤로그

나의 올해 여름을 물들인 아이가 있었다.


뭐 하나 쉬운 것이 하나도 없는 관계였다. 처음엔 한국에서 인연이 닿았으나 해외에서 평생을 보내다시피 한 그녀는 머지않아 다시 본인이 거주하던 나라로 출국을 하게 되었고, 그곳은 시차만 해도 12시간이 넘는 먼 거리에 위치해 있었다. 나 역시 해외에서 20대의 대부분을 보내며 장거리의 관계를 유지해 본 적은 있지만, 그것뿐만이라면 차라리 나았을지도 모른다.


그보다도 힘들었던 건 가끔씩 나타나는 그녀의 감정적으로 날카로운 부분들이었는데, 여리고 내향적인 만큼 방어기제가 강했던 그녀는 평소 즐겁게 얘기하다가도 본인의 약한 부분에서 종종 극도로 예민하게 굴 때가 있었다. 점점 더 그녀를 알게 되며 그런 상황을 어느 정도 넘길 줄 알게 되긴 했으나 갈등을 처음 마주했을 때의 당황스러움과 종종 나타나는 그 해프닝이 어쩔 수 없이 버겁게 느껴지는 날도 있었다.


글의 시작부터 그녀의 단점을 잔뜩 늘어놓는 듯싶지만, 그럼에도 나한테는 장점이 더욱 돋보이는 사람이었다. 아직 대학을 졸업하기 전임에도 불구하고 본인의 일을 하며 적지 않은 수입을 벌어들이고 있는 데다, 대화를 하다 보면 똑똑하고 매력 있는 아이라는 게 느껴졌다. 게다가 목소리는 어찌나 예쁜지 그녀와 시차를 맞춰 전화하는 시간이 늘 기다려지곤 했다.


결정적으로, 그녀를 보다 보면 지금보다 훨씬 더 예민하고 감정적이었던 과거 나를 보는 느낌이 들었다. 인간관계에 너무나 쉽게 상처를 받고, 또 그렇기에 방어기제를 잔뜩 세웠던 모습은 어린 날의 내게도 있었기에 그 동질감이 느껴질 때가 많았다.




한국에 있는 동안 함께 여행을 가기로 했었다.


그녀가 피치 못할 개인사정으로 인해 본인이 거주하던 국가로 급히 갔던 터라 그 여행은 성사되지 않았지만, 대신 우리에게는 새로운 약속이 생겼다. 각자 서로의 바쁜 사정이 끝나면 내가 그녀의 나라에 놀러 가기로 했고, 나는 하루도 빠짐없이 그녀와 연락을 하며 다가오는 만날 날을 기다렸다.


하지만 서로의 타이밍이 맞지 않아 약속했던 날은 점점 멀어졌다. 그동안 몇 번이나 서로를 잘 알지 못하기에 나오는 실수에서 관계가 단절될 위기를 이미 몇 차례 겪으며 그녀는 날카로워질 때가 있었고, 나에게는 조금씩 상처가 쌓여갔다.


성격이 많이도 달랐다. 외향적인 데다 일단 저지르고 보는 난 이 관계가 어떻게 흘러가든 간에 일단 얼굴을 마주하고 매듭을 지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결심한 날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그녀가 머무는 나라에 가기 위한 표를 예매했다.


하지만 내향적이고 본래 걱정이 많은 그녀는 점점 늘어져가는 연락 속에서 언젠가는 즐거운 주제였던 우리의 만남이 못내 부담스러워졌었나 보다. 그 감정을 내가 느끼지 못 할리가 없었다.


뭐 하나 쉬운 게 없는 이 매일 속에서, 이렇게 힘든 관계를 위해 '이 정도까지 노력을 해야 하는 게 맞나.' 하며 나 역시 고민을 하던 터였는데 그녀 역시 오죽했을까.




원래의 계획이었다면 나는 해당 국가에 머무는 몇 주 동안 그녀의 동네에서 함께 시간을 보낼 예정이었다. 하지만 서로가 느끼는 부담감이 점점 가시화되는 만큼, 나는 주어진 시간 속에서 일부만 함께하고 이후에는 개인적으로 여행을 다니겠다는 제안을 건넸다.


이미 관계의 성사는 바라지도 않았다. 일단 나는 가기로 결정한 만큼 며칠이나마 그녀와 즐거운 추억을 함께 쌓고, 애초에 활동 영역이 너무나 다른 타인인 우리는 또 나는 각자만의 시간을 살아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이미 그 정도의 마음조차 버거워졌나 보다. 결국 우리는 만남조차 갖지 않기로 했고, 나 역시 쉽지 않은 관계임을 알기에 차라리 시작하기 전에 끝내는 것이 맞겠다는 생각이 늘 한켠에 있던 만큼 그 결정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이미 표를 끊어버린 나에게 미안하면서도 부담감을 느끼는 그녀에게 전혀 그럴 필요 없다고 했다. 어차피 나는 여행을 좋아하니까, 너 덕분에 또 즐거운 여행을 할 수 있게 됐다고 말할 뿐이었다.




연락을 끝낸 이후엔 생각보다 후련했다. 이번에 내가 가게 되는 곳은 미주. 원래대로라면 그녀를 만나러 가는 한 달의 시간이었지만 갑작스레 그 시간 동안의 자유가 생겨버렸다. 그녀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지 못하게 된 것이 못내 아쉽긴 했지만, 이미 그렇게 하기로 결정해 버린 관계에 묶여있다 한 들 아무 소용없다.


그렇기에, 대신 새롭게 시작될 여행에 대한 설렘을 가득 채우기로 했다. 작년의 이별을 겪은 후 가졌던 여행이 너무 좋았기에 올해 역시 또 그렇게 여행을 가고 싶다는 생각은 어렴풋이 있었지만 현재는 사업체의 규모도 더욱 커지고 바빠졌던 만큼 이제 그런 장기여행은 또 가기 힘들 것이라 생각했었다.


다만 내가 결정하기에 따라 다른 거였구나. 비록 그녀와의 약속했던 만남은 좌절됐지만, 그럼에도 그녀 덕분에 나는 또 새로운 곳에 다양한 경험을 하러 여행을 떠난다. 이렇게 떠나는 길에 한치의 후회도 없다. 그녀에 대한 미움도, 비어버린 시간에 대한 막막함도 없다. 새로운 즐거움과 기대감이 채워지고 있을 뿐이다.


또 한 번 아무런 계획도 없이 떠나는 나의 여행. 이 비어있는 공간들은 어떤 장소들로 채워질까? 나는 어떤 다양항 경험을 하며, 또 어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게 될까.


그녀를 만나지 못했으면 어때. 바라던 관계가 이어지지 않았어도 뭐 어때.


나에겐 사랑이 아니어도, 여행이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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