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시작이 좋아
출국날 당일, 9월의 초입이라 그런지 아침 온도가 꽤나 선선했던 날.
이번 여행은 편도 티켓만 끊었던 작년의 여정과는 달리 3주의 기간이 정해져 있는 왕복 티켓이었다. 작년 세 달의 여정간 아주 간소한 짐을 갖고 다닌 것과는 달리 이번에는 그때의 1/3 정도의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짐의 부피가 더 컸는데, 첫 시작지인 뉴욕에서의 짧은 여정을 마치고 난 후의 행선지들이 모두 남미였기 때문에 사계절의 옷을 모두 챙겨야만 했다.
지금까지 다양한 국가를 여행하며 많은 경험을 했다곤 하나, 대체적으로 나의 여정은 유럽에 국한되어 있었던 만큼 아무래도 처음 접하는 미주는 조금 긴장이 되긴 했다. 익숙한 곳이 아닌 만큼 조심해서 나쁠 일은 없는 데다 특히 그 행선지가 치안으로는 영 좋지 못한 소리를 듣는 지역인 만큼 아무쪼록 무탈한 여행이 되기만을 바랐다.
결혼을 염두에 두었던 아이와의 이별 후 도망치듯 떠났던 작년의 여행과는 달리, 올해는 딱히 큰 근심과 고민 없이 수월하게 시작됐다. 15시간이라는 짧지 않은 비행시간이었지만 미리 처방받아 온 수면제를 복용한 뒤 대부분의 시간을 잠에 취해 보냈고, 시간이 오래 걸리기로 유명한 존 에프 케네디 국제공항의 비자 심사도 웬일인지 타 여행객이 거의 없어 30분도 채 걸리지 않았기에 시작부터 꽤나 좋은 느낌을 받았다.
그 후 에어트레인과 전철을 갈아타며 한 시간 정도 들어가 도착한 나의 숙소는 가장 유명한 42번가의 한가운데에 위치한 곳이었다. 비록 가격이 싼 편은 아니었지만 여행의 첫 시작지 인 데다 어쨌든 남미를 내려가면 훨씬 저렴한 물가로 인해 생각보다 지출이 없지 않을까 생각했기에, 적어도 이곳에서만큼은 괜찮은 숙소에 머물며 고된 여정이 시작되기 전의 느긋한 여유를 즐기고 싶었다. 물론 남미에서는 지출이 크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게 나의 큰 착오긴 했지만, 적어도 이때의 생각은 그랬다.
간단한 짐 정리를 마친 뒤 일단 무작정 밖으로 나갔다. 사실 원래의 목적지는 뉴욕이 아니었던 만큼 딱히 별 다른 계획도 없이 방문했기에, 이 도시에 딱히 기대감도 없었고 보고 싶은 것도 없었다. 하지만 뭔들 어떨까, 가장 중요한 건 지금의 내가 서울이 아닌 뉴욕에 있다는 것이다. 새로운 세상은 언제나 날 설레게 하기에, 그저 아무런 계획 없이 거리를 거니는 것만으로도 내게는 충분히 즐거웠다.
비행기에서 생각보다 편하게 휴식을 취했던 터라 체력이 쌩쌩하게 남아있던 나는 하루 내내 뉴욕의 주요 시내를 이곳저곳 걸어 다녔다. 아무런 계획이 없었다 한들, 어찌 됐던 뉴욕은 뉴욕이기에 걸어 다니다 보면 살면서 한 번쯤은 들어봤던 유명 관광지가 나타나더라.
그중 가장 먼저 마주했던 건 프랑스에 아직 머물던 시절 완공되었던 베슬. 사실 그때 뉴욕 여행을 한번 계획했었으나 바쁜 삶에 치여 한번 불발됐던 기억이 있는데, 초기에는 베슬의 계단을 직접 올라갈 수 있었지만 이제는 여러 사고들로 인해 폐쇄해 두었다더라. 그때 왔다면 올라갈 수 있었겠지? 당시에는 같이 여행을 계획했던 친구들이 있지만 현재는 시간의 흐름으로 인해 자연스레 관계가 끊기게 되었던 터라 그때의 인연들이 잠시 기억에 스쳤다.
긴 산책을 계속하며 타임스퀘어, 엠파이어 스테이트 등 여러 유명장소를 마주했지만 생각보다 관광 스팟에 대한 감흥이 크진 않았다. 그럼에도 오늘의 긴 산책은 너무 마음에 들었던 게, 한국과 13시간의 시차가 나는 곳인 만큼 나에게 연락 올 사람도 없이 오롯하게 혼자만의 시간을 즐길 수 있다는 것 자체로도 내게 이곳은 좋았다. 여행지에서 혼자 거니는 시간을 작년의 어떤 동행을 만나게 된 이후로부터 참 좋아하게 됐던 터라 그것만으로도 오늘의 여정은 참 마음에 들었다.
간단한 저녁 식사를 마친 뒤, 오늘의 마지막 일정으로 방문한 근처의 유명 재즈펍.
유럽의 친한 친구가 재즈를 하는 만큼 자연스레 접할 경우가 꽤 많았던 데다, 재즈 펍 특유의 자유로운 분위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아무리 계획이 없더라도 이곳은 꼭 가고 싶었다. 무조건적인 사대주의는 아니지만 아무래도 아시아권의 문화가 조금 더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는 경향이 있는 만큼 서양권 국가에서 더 느낄 수 있는 특유의 자유로움으로 인해 이곳의 펍 역시 정말 마음에 들었다.
좋아하는 분위기와 술, 그리고 혼자서 시작되는 즐거운 여정. 뭐 하나 빠질 게 없는 이 행복이 너무 마음에 드는 난 역시 여행을 좋아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구나. 최근 정신없이 앞만 바라보며 개인 사업을 키우는데 꽤나 열심히 달려왔기에 스스로에게 주는 선물이라 여겼다.
하지만 동시에, 만나고 싶던 아이를 만나지 못하게 된 약간의 아쉬움이 남더라. 이렇게 혼자서 흘러가는 시간 역시 마음에 들지만 예정대로 함께 했다면 그건 그거대로 즐거웠을 텐데 라는 생각이 계속 맴돌았고, 그렇게 한 잔 두 잔 술을 마셔가던 나는 결국 맑지만은 않은 정신으로 그 아이에게 뉴욕에 잘 도착했으며 보고 싶었다는 연락을 보냈다.
매번 낮과 밤이 거의 다른 시차에서 연락하다가 정말 오래간만에 시차를 신경 쓰지 않고 연락이 닿은 그 아이. 이제 시작되는 내 3주간의 여행은 다채로운 경험과 행복으로 채워질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지만, 마찬가지로 이 여행이 끝날 때까지 내게 있어서 유일한 아쉬움이 남는다면 그 아이일 거란 생각을 했다. 그렇게 조금은 취해 비틀거리는 몸을 이끌고 숙소에 돌아가며 여행의 첫날이 지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