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장판의 책임자
문제는 그 ‘맛있다’가 슬쩍 기준이 되어버렸다는 거다. 옳고 그름보다 “재밌나?”가 먼저였다. 그래서 나는 관찰자처럼 굴면서도, 실제로는 소란이 나는 쪽으로 자꾸 고개가 돌아가는 사람이 됐다. 시끌해지면 “그래, 이 맛이지” 하고 은근히 안도하고, 조용해지면 괜히 심심해하는, 딱 그 정도의 거리. 그리고 ‘나는 그냥 보고 있었을 뿐’이라는 말도, 모임장의 이름표 앞에서는 별로 힘이 없었다.
돌이켜보면 난장판은 갑자기 터진 게 아니었다. 서서히 커지고 있었고, 나는 그걸 모른 척하며 계속 구경했다. 직접 뛰어들진 않았지만, 발끝은 늘 선을 밟고 있었다. 모임장으로서 책임은 가지고 있으려고 하면서도, 자극은 한 숟갈 떠먹는 식으로. 그러다 결국 소란이 내 예상보다 훨씬 크게 번졌다.
남녀 간의 고전적인 마찰부터, 유교 사회에서 기본 옵션처럼 딸려오는 나이 서열 싸움, 거기에 가끔은 법의 경계에서 미끄러진 분들까지. 내 삶이 그동안은 교양국에서 제작한 무해 하지만 따분한 프로그램이었다면,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실험적인 영화제의 출품작이라고 해도 밀리지 않을 수준이었다. 그것도 수위가 제법 높은 쪽으로. 더 웃긴 건 나도 슬쩍 즐기고 있었던 것 같다. ‘아, 이런 동물의 왕국도 존재하는구나’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도, 정작 발은 거기 제대로 담그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내 발이 들어간 방식은, 정면 돌파가 아니라 관리라는 이름의 미세한 조정에 가까웠다. 싸움이 나면 말렸고, 기류가 이상해지면 방향을 틀었고, 누군가 울먹이면 일단 달래줬다. 겉으로는 ‘운영’이었지만, 안쪽에서는 사람을 다루는 법을 실험하는 손놀림이 자꾸 익숙해졌다. 그러다 보니 관계도 자연스레 ‘만남’이 아니라 운영을 위한 ‘시험대’가 됐다. 관계가 감정이 아니라 변수처럼 보이기 시작하면, 사람은 친해지는 대신 계산을 먼저 하게 된다.
그렇게, 나는 인간관계를 거의 ‘탐색전’처럼 다루기 시작했다. 가능성이 조금만 반짝이면, ‘오? 이거 한 번 다가가볼까?’ 하고 과하게 다가가고, 막상 답답해지면 또 ‘아 됐다’ 하고 연기처럼 사라지고. 스스로에게 말하자면, ‘야, 이래서야 누가 널 붙잡겠니?’ 이런 수준이었다. “이건 그냥 관찰이냐, 아니면 침입이냐?” 스스로 물어보기도 했지만, 대답은 항상 모호했다.
그러면서도 내가 저지르는 작은 무례들, 대충 훑는 시선, 서둘러 내리는 판단, 상대의 감정보다 내 호기심이 먼저였던 태도, 그런 건 일부러 보지 않으려 했다. 마음속 서랍에 ‘나중에 생각할 것’이라며 다 밀어 넣고는 아예 서랍을 잠가버렸다. 내면의 목소리는 늘 정확했다.
“넌 왜 제대로 알기도 전에 먼저 차지하려고만 드냐?”
돌이켜보면 그건 분명 관계에 대한 일종의 착취였다. 나도 그 사실을 몰랐던 게 아니다. 그렇다면 나는 왜 그토록 들이밀었을까. 또 다른 목소리가 고개를 들었다.
“부채감 때문이었잖아.”
“너 안에 빈칸이 너무 많아서, 그걸 서둘러 채워야 한다는 조바심이 있었지. 새것들로 채워 넣기만 하면, 마치 진짜로 새 출발이 되는 것처럼.”
맞았다. 인정하기 싫었지만. 나는 뭔가를 지우고 싶었다. 이전의 삶 전체를 무채색으로 덮고, 제주라는 낯선 배경에 ‘새로 칠한 나’를 얹고 싶었다.
“과거를 부정하면 더 나아질 거라 믿은 거지?”
그 말도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은 부품 갈아 끼우듯 새로 만들어지는 존재가 아니다. 새 출발이라는 것도 결국 이전의 찌꺼기와 그림자를 그대로 안고 간다. 나는 결국 받아들여야 했다. 지금의 나를 만든 건 어쨌든 과거의 나였고, 출발선은 과거 어느 시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사실을.
“그러면 어디서 다시 시작할 건데?”
마지막으로 그렇게 묻는 소리가 들렸고,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인정할 건 인정해야 했다. 그 질문에 당장 멋진 대답은 없었다. 대신,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답부터 꺼냈다. 숨을 고르는 것.
1. 숨을 깊게 들이마신다. 아주, 우주 끝까지 빨아들이겠다는 각오로.
2. 잠시 멈춘 뒤, 애매하게 부족한 기운을 채우듯 짧은 숨을 한 번 더 넣어준다.
3. 그리고 천천히, 마치 모든 번뇌를 압축해서 내던지는 사람처럼 내쉰다.
숨을 들이켰더니, 내가 방관했던 그 아수라장이 고해상도로 또렷해졌다. 나는 의미는 증발하고 감정만 남은 모임의 잔해 속에서, 머리에 꽃 하나 꽂고 질주하는 정신적 카우보이였다. 숨을 한 번 더 채우자, 사람을 대하는 내 태도가 펼쳐졌다. 애매한 기준으로 사람을 골라내고, 내 목적에 맞춰 줄 세우는 습관. 좀 노골적이었다.
그리고 숨을 내쉬는 동안, 내 안에서 먼저 헝클어진 것들이 바깥의 소란과 어떻게 맞물려 돌아갔는지도 함께 떠올랐다. 호흡은 단지 진정을 위한 기술이 아니라, 사건을 다시 배열하는 편집 도구 같았다.
그 도구를 손에 쥐자, ‘사회실험장’의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가장 먼저 떠오른 건 모임의 정기 프로그램처럼 따라오는 연애 사건들이었다. 편성표도 없는데 늘 방영 중이었다. 사소하게 시작해 결국 판을 흔드는.
커플이 있었다. 아니, 처음엔 다들 솔로였다. 대체 어떤 경로였는지 둘은 끝내 서로의 연락처를 알아낸다. 나는 인간의 놀라운 의지력을 이런 데서 자주 목격한다. 가까워지는 속도도 사귀는 과정도 조용했다. 아무도 몰랐다. 비밀 연애니까. 하지만 비밀의 유통기한이 다하는 순간은 늘 요란했고, 그 소란의 경유지는 어김없이 나였다.
폭탄은 늘 예고 없이 도착한다. 그것도 양쪽에서, 거의 동시에. “잠깐 얘기 가능하세요?” 같은 문장으로 시작하지만, 다음 장면은 대개 같았다. 서로를 욕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정리의 방향은 늘 한쪽으로 쏠렸다. 결론은 하나, “제 편 좀 들어주세요.”
그때 나는 모임장으로서 꽤 성실하게 중간에 서 있었다. “서로의 입장을 들어보자”, “지금은 감정이 격해져 있다”, “결론은 둘이 내야 한다” 같은 문장들을, 마치 매뉴얼처럼 꺼내 썼다.
하지만 겉으로 그럴듯해 보이는 중립은, 내 안에서 벌어지는 ‘내적 교통사고’를 가리는 커튼일 뿐이었다. 머릿속에선 신호등이 동시에 깜빡였다. ‘이걸 왜 내가 듣고 있지? 내가 지금 상담사야, 운영자야, 아니면 이 막장극의 유일한 증인인가?’ 표정은 평온했지만, 정신은 이미 비상등만 켠 채 갓길에 멈춰 선 상태였다.
더 황당한 건 이 과정이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점. 비슷한 서사가 몇 번이고 반복됐다. 내 휴대폰은 어느새 ‘비밀 연애 센터’가 되었고, 나는 원치 않게 상담 창구를 맡았다. 관계가 무너지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문제를 풀기보다 자기 편을 들어줄 ‘확성기’를 종종 먼저 찾는다. 그리고 그 확성기는 늘 둘 사이에만 머물지 않았다. 한 사람의 억울함이 공기 중으로 번지면, 모임은 그 기류를 연료 삼아 슬그머니 판을 키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