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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미술 Jun 09. 2023

아부지의 부재, 장기기증(1)

아버지 첫 기일이 코 앞으로 다가왔다. 1년 전의 기억이 온전히 떠오른다


오빠, 아빠가 숨을 안 쉰 대


2021년 11월 28일, 일(日)


 일요일 아침, 창문 밖으로 미세먼지로 인해 하늘이 뿌옇게 보였다. 아침 부재중 통화에 둘째 외삼촌(갑이)의 이름이 뜬 게 보였다. 매주 주말이면 전화를 걸어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며 안부를 묻는 전화였겠지. 정신을 차리려 샤워를 하고 나온 사이 부재중 전화엔 이름 하나가 추가되었다. 동생의 이름이었다. 일순간 불안했다. 다시 갑이 삼촌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어. 너 뭐 하냐?'

  '방금 막 씻고 나왔어요. 무슨 일이에요? 동생도 전화 왔던데'

  '아버지가 지금 병원 가는 길이라고 하신다. 대구로 간다는데, 너도 얼른 채비해서 내려와야겠다.'

  '어제 치과 예약해 드려서 진료받고 치료도 하고 오셨는데, 무슨 병원이요?'

  '매형이 좀 위독하시단다. 일단 준비해서 빨리 동대구역으로 내려와라.'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갑이 삼촌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직감했다. 아, 아버지와의 작별을 준비해야 하는구나. 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연결음이 한 번 울리기도 전에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동생은 오열을 하고 있었다. 동생도 나도 알고 있었다. 몇 년 전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를 보낼 때와 상황이 비슷했다. 다시 한번 나는 직감했다.

  

  '무슨 일이야? 아부지 병원 간다는데, 갑이 삼촌은 말을 제대로 안 하고 내려오라고만 해. 무슨 일이야?'

  '오빠... 아빠가 숨을 안 쉰 대. 아침에 쓰러진 채로 집에서 혼자 발견되었데 ....엉엉'

  '운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잖아!!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말을 해줘야 상황을 이해할 거 아니야!!'

 

  순간적으로 울고만 있는 동생에게 큰 소리로 쏘아붙였다. 동생이 잘못한 게 하나도 없는데, 그냥 울고 있는 게 싫었다. 앞으로 벌어질 일들에 대한 답을 저 울음소리가 다 말해주는 것 같았다. 동생은 엄마의 전화를 받고 아버지가 쓰러진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자세한 내용은 모르지만 아버지가 쓰러졌고, 본가가 위치한 경북 구미에선 아버지를 받을 수 있는 응급실이 없어 대구 파티마병원까지 이송 중이라고 들었다고 한다. 이미 이때부터 동생은 손을 떨고 울고 있었을 것이다. 항상 가족과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누군가의 부고를 듣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동생에게 사무치는 그리움괴 죄스러움으로 자리한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 감정의 무게에 머리가 짓눌려 계속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 강원도 동해에서 해경으로 근무하는 동생이 대구까지 운전하는 건 불가능하다. 다행히도 동료가 대구까지 운전을 해주며 같이 내려가고 있다고 한다. 전화를 끊고, 다시 한번 곱씹어 보았다.


 '코로나 상황이라 응급실에 들어가는 게 쉽지 않았을 것이고, 아부지의 상태가 어떤진 몰라도 당장 구미에서 해결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닌 것이라면... 마음의 준비를... 하자..'


 이젠 내 차례다.

 전화를 끊고 20분 만에 캐리어 하나 가득 짐을 쌌다. 여분의 옷과 속옷, 세면도구와 신분증, 혹시 몰라 인감도장과 아버지의 사진이 들었는 외장하드와 노트북까지. 그리곤 차를 몰아 대구로 내려갔다. 가을 단풍이 절정인 아침 10시, 행락객들로 붐비는 도로 위에서 나는 조금씩 차분해졌다. 일련의 사건을 머릿속으로 정리하며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어디서부터 해결해야 하는 것인지를 생각하려 애썼다.


2021년 11월 28일, 일요일. 이 날은 내가 엄마의 퇴원수속을 밟기로 한 날이었다.



  


2021년 11월 13일, 토요일(土)


 전날, 금요일 저녁에 동대구로 내려와 호텔에 체크인을 했다. 토요일 아침 친한 고등학교 동창의 결혼식에 맞춰 B책 집필회의를 대구에서 진행하기로 일정을 잡았다. 동대구로 내려오는 기차 안에서 부터 책 회의 내용을 점검하고, 호텔에선 '수'와 새벽까지 토의를 하느라 눈이 너무 뻐근했다. 민우의 결혼식장이 호텔과 그리 멀지 않아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들었다. 이 날은 결혼식이 참 많았다. 길일이라 해서 그런지 아는 사람의 결혼식만 5건이었다. 그중 사촌 여동생(희)의 결혼식도 공교롭게 청주에서 같은 날, 같은 시간에 잡혔다. 고민을 하다 나는 동대구-민우의 결혼식에 참석하고, 부모님 두 분과 동생은 청주-희의 결혼식에 참석하기로 했다. 미안한 마음에 결혼식 2주 전에는 희를 만나러 청주까지 내려가 첫째 외삼촌(식이)을 모시고 함께 식사를 한 게 다행이었다는 생각을 하며 결혼식장을 향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장난치길 좋아하던 민우는 결혼식장이라고 별반 다르지 않았다. 긴장감이라곤 하나도 보이지 않고, 그저 즐거워만 보였다. 신랑 입장 순서에 손가락 총을 튀기며 입장하는 신랑이 몇 명이나 있을까? 모든 식이 마무리 된 후엔 졸업 후 처음 보는 동창들과 어색하게 인사를 나누고 신랑, 신부와 단체사진을 촬영하고 나왔다. 반가운 친구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식장을 빠져나오는 도중 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오빠, 엄마랑 아빠 차사고 난 거 들었나?'

 '뭔 소리라? 무슨 사고?'

 '내 이럴 줄 알았다. 오빠한테도 말 안 하고, 여까지 왔구만'

 '언제 사고가 났다는 거야?'

 '오늘 아침에 여기 청주 식장 올라오려고, 차 몰고 구미 톨게이트 진입하는데 뒤에서 차가 속도를 안 줄이고 그대로 박았데여. 뒷 차가 우리 차를 그대로 들이박고, 속력 때문에 우리 차가 앞에 트럭을 또 박았덴다'

 '어? 근데 청주를 어떻게 가? 무슨 소리야?'

 '내 말이. 사고가 났으면 병원부터 가야지. 혁이 아재 불러서 차 일단 폐차시키고, 이모한테 부탁해서 차 한 대 렌트해서 지금 여기 식장에 와있다.'


 황당하지만, 왜 그랬을지 이해가 됐다.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는 1년 차이 거의 같은 시기에 돌아가셨다. 외할머니는 2016년 6월 4일, 심부전으로 투병하시다 돌아가셨고, 외할아버지는 간암이 재발하신 상태에서 외할머니 사후 급격히 상태가 나빠지셔서 1년 뒤인 2017년 6월 1일에 돌아가셨다. 두 분을 모신 것은 우리 부모님이었다. 그리고 두 분이 안 계신 외가댁에 제일 큰 어른은 우리 엄마와 아부지였다.

 엄마 아래로 3명의 외삼촌을 두었다. 식이 삼촌은 청주에 살았고, 갑이 삼촌은 서울에서 나와 같이 지냈다. 학이 삼촌은 구미에서 엄마와 아부지와 같이 일을 했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직후 집엔 큰 행사가 몇 건이나 있었다. 가장 큰 건은 갑이 삼촌이 20년의 연애 끝에 2017년 9월 결혼을 한 것이고, 1달 뒤인 10월엔 내 동생이 결혼을 했다. 불과 외할아버지 사후 네 달만이었다. 많은 친척들을 만나면서 엄마와 아부지는 무게감을 많이 느끼신 듯했다. 하긴, 나도 그 공백을 느꼈는데, 부모님이라고 다를까? 결론은 차 사고가 났는데도 무리해서 청주까지 올라간 건 집안의 어른이라는 자리를 대신해야 한다는 생각과 식이 삼촌네의 첫 행사에 두 분이 빠지면 안 된다는 생각에서였을 것이다.


 '오빠, 서울 언제 올라가는데?'

 '나 오늘 오후에 대구에서 회의하고, 내일 일요일 아침에 올라갈라켔지.'

 '아니, 엄마 있잖아? 온몸이 다 아프다고 그러면서 병원에는 안 간데여. 구미 간데여. 오빠 구미 갈 수 있나?'

 '청주 가서도 병원을 안 갔다고? 엄마, 안 그래도 남들 두 세배는 더 놀라는데'

 '그러니까. 오빠 시간되면 병원 좀 가봐. 아빠도 말 드릅게 안 들어여. 같이 데려가. 좀'


 이해는 한다고 했지만 어안이 벙벙했다. 아무리 그래도 3중 추돌 사고이고, 차는 폐차를 해야 한다는데... 도대체 병원을 왜 안 가고 결혼식장에서 계속 있는 거지? 동생은 엄마와 아부지가 오후 6시엔 구미에 도착할 것이라고 말했다. 난 급히 호텔로 넘어왔다. 호텔엔 회의를 위해 수가 도착해 있었다.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우선은 급한 내용부터 점검하고 수정하기로 하고 부모님의 도착시간에 맞춰 구미로 건나가자고 수가 흔쾌히 말해주었다. 수는 늘 그랬다. 가진 것 없던 시절부터 서로에게 의지할 공간을 내어주는 그런 친구였다.


 저녁에 구미집에 도착하니 환자 두 명이 전기장판 위에서 골골대는 걸 마주할 수 있었다. 10년이 넘게 몸의 여러 가지 문제로 투병 중인 엄마는 가슴이 너무 아프고 답답하다며 숨을 잘 못 쉬겠다고 말하고 있었고, 맨날 괜찮다고만 하던 아부지도 어깨가 결리고 두통이 있다고 하셨다. 참 황당한 상황에 웃음만 났다. 수는 부모님의 몸을 살폈다.

 

 '아니, 그러니까 지금 이 상태로 청주까지 가서 기어코 식을 다 보고 내려왔다고?'

 '어머니, 당시에는 괜찮을 수 있어도 차 사고는 후유증이 상당히 길어요.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내부 출혈이 있을 수도 있구요. 이 정도로 아프셨으면 병원에 가서 흉부 엑스레이는 찍어보고 가시지 그러셨어요.'

 '나는 수까지 같이 오는지도 몰랐네, 시간 지날수록 더 아프긴 한데, 결혼식에 늦으면 안 되니까 우선은 움직였지.'

 '엄마, 아부지는 맨날 싸우고! 사이도 안 좋으면서! 또, 이럴 땐 어떻게 의견이 잘 맞는 거예요?'


 나의 핀잔에 아부지는 피식 웃었고, 수는 엄마의 흉부 뼈를 만져보며 이상이 있는지 확인했다. 수는 다행히 뼈가 부러진 곳은 없는 것 같지만 평소 엄마가 몸이 좋지 않으니 응급실에 가보자고 설득했다. 나 혼자였으면 씨알도 안 먹혔을 말인데, 의료계열에서 일을 하는 수의 말을 부모님도 무시할 순 없었다. 아버지까지 모시고 가려했으나 아버진 월요일에 병원에 가보신다고 했다. 어깨가 결린 정도라서 정형외과와 한의원 물리치료면 될 것이라고 했고, 또 집에는 친할머니가 계셨기 때문이다.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6개월 뒤 부모님은 의성 시골에 계시는 친할머니를 외가댁으로 모셨다. 차츰차츰 시력이 떨어지기 시작하셔서 이젠 불빛 밖에 보지 못하셨기에 더 이상 혼자 시골에 둘 수 없었다. 친가는 외가댁과는 반대로 삼 형제와 고명딸 고모 이렇게 4남매였다. 우리 집을 제외하고 모두 도시의 아파트에 살다 보니 할머니를 모시기엔 우리 집이 제일 나았다.


 '아부지. 할무니한테 사고 난 거 이야기 안 했어요?'

 '뭐 하러 하노, 할무니 알면 또 걱정한다 아이가'

 '그래서 병원 안 가려는 거죠.'

 

 밤늦게 몸이 불편한 할머니를 두고, 우리가 다 같이 응급실을 가는 건 걱정이 되었을 것이다. 엄마도 마찬가지로 그래서 응급실에 안 갔을 것이다. 우선 엄마라도 모시고 응급실을 다녀와야 했다. 다행히도 흉부엑스레이 촬영상으로는 이상이 없었지만 부종이 있어 진통제와 약을 처방해 주기로 했다. 그러나 이미 충분히 많은 약을 먹고 있는 엄마는 진통제도 함부로 먹을 수 없었다. 같은 병원 진료기록을 확인하고 먹을 수 있는 약을 찾아 처방받는데 꽤 많은 시간이 걸려 집에 돌아가니 이미 11시가 되었다. 할머니가 거실에 나와 계셨다.

 

 '분명히 아까 정덕이 목소리가 들렸는데, 정덕이가 왔나?'

 '할머니, 안 주무셨어요? 내 왔지. 대구에 일 보러 왔다가 잠깐 들렀지.'


아버지 장례이후 친구가 찍어준 사진, 아버지가 손에 쥐어주었던 대봉감이다.

 늦은 시간 수와 나는 할머니께 인사를 드렸지만 별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부모님은 수의 조언을 들어 월요일에 정밀검사를 받아보기로 했다. 엄마는 입원을 하기로 했고, 아버지는 월요일 병원 검진 후 집에서 진료를 다니기로 하셨다. 할머니를 케어할 사람이 필요한데, 다행히도 다음주가 수능 주간으로 재택근무가 가능한 때였다. 학교에 사정을 말씀드리고 일주일간 내려와서 구미에 있겠다고 상황을 정리했다. 동생에게도 학교 수업은 원격으로 진행할 수 있어 구미에 있겠다고 전했다. 이제 다시 대구 호텔로 돌아가려는 길, 아부지는 히죽히죽 웃으면서 수의 손에 무언가를 들려줬다.

 '홍시 좋아해요? 이거 저기 감나무에서 딴거라. 가져가 묵어요.'

 '아버님, 이거 대봉 아니에요? 저 홍시 진짜 좋아하는데, 가져가서 좀 더 익혀가 묵을게요~ 어머 감사해요.'

  

 직접 기른 거라고 웃으며 수의 손에 홍시를 들려주는 아부지의 모습이 낯설고도 웃겼다. 고등학교에서 가르치는 남자애들이 수줍을 때 보이는 웃음과 비슷했다. 나는 웃음이 터졌다.


 '아니. 나한텐 홍시 한 번도 준 적이 없는데, 너한테는 이리 다정하다고? 말이 되나?'

 '야야. 아버님이 내 정도 되니까 이리 주시는 거다.'

 

 대구로 돌아가는 길, 웃으며 이야기를 나눴지만 수나 나나 마음이 착잡했다. 수는 우리 가족들이 힘든 일을 계속 겪는 것에, 나는 엄마의 상태가 악화될까 봐 하는 불안감에. 다음날 우선 서울로 올라가 일주일을 보낼 수 있는 짐을 챙겼다. 학교에 들러 수업용구도 챙겼다. 교장 선생님께는 부모님 간병으로 인해 재택근무를 부탁드리고, 모든 수업은 원격으로 진행하겠다고 말씀드렸다. 그리고 차를 몰고 구미로 내려갔다.


이 일주일이 아부지와 보내게 될 마지막 시간이라는 걸 전혀 예상하지 못한 채.





아부지를 기억하고자 하는 마음과

장기기증에 대한 인식 개선을 위해.

그리고 글을 쓰면서 아부지의 부재에 충분히 슬퍼했고,

계속 지쳐있지 않으려고 이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2021년 10월 아버지 생신 날, 엄마와 서프라이즈를 준비하고 평일에 몰래 구미에 내려왔었다

  


아버지의 35, 나의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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