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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미술 Oct 01. 2023

가장 진지한 고백: 장욱진 회고전 -미술교사의 읽기

2023 서울국제고 마을살이 이해 연수 - 전시관람을 위한 설명 자료

 (교사 연수용입니다)

"장욱진의 그림 속에서 정겨움을 발견하시길 바랍니다. 어떤 유의미한 말 보다 중요한 것은 눈으로 감상하고, 장욱진의 시선으로 세상을 함께 바라보는 경험입니다."


  안녕하세요. 들은 모르는 미술을 조금 더 쉽게 알려주는 미술교사, 남미술 남정덕입니다. 교수학습부 주관의 연수로 10월 초에 전시장을 방문하게 될 선생님들을 위해,  함께 방문하지 못하는 분들을 위해 작성한 가이드입니다. 만약 함께 방문하신다면 도슨트가 되어드리겠습니다 :)


 장욱진을 잘 모르시는 선생님들께서는 막상 전시장을 가면 무엇을 어떻게 보아야 할지 모르실 수 있습니다. 말머리에 언급하였듯이 무언갈 공부한다는 마음보단 눈으로 즐기고, 한국의 근현대는 어떤 모습이었을지 떠올려봐 주세요. 장욱진은 그 속에서 삶의 재미를 찾고 표현한 작가이니까요




 1918년, 장욱진은 충남 연기군(지금의 세종시)에서 대지주의 4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일찍이 문인화와 서예에 조예가 깊어 집에서 아이들에게 문예교육을 했다고 하니 어린 시절 그의 예술적 감각에 아버지는 심리적으로 중요한 사람으로 여겨집니다.


 그런데 7살이 되던 해, 장욱진의 부친이 타계하게 되고 서울의 고모 아래에서 성장을 하게 됩니다. 제2 고등보통학교(지금은 경복중, 경복고등학교이죠)를 다니며 남다른 예술적 재능을 보였는데, 장욱진은 어린 시절부터 대상의 세부적 묘사보다는 직관적인 형태와 색채에 집중해 주관적으로 그림을 그렸다고 합니다. 일례로 국민학교 2학년때에는 까마귀를 그리며 새까맣게 칠하기만 했던 그에게 최하위 병(丙)점을 주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고등보통학교에서 미술교사를 만나고 인상주의, 입체파 등을 접하며 예술의 표현 방식이 묘사가 아닌 기하학적 추상도 있었다는 걸 느꼈다고 해요.

(그때 미술교사의 이름은 사토 구니오(1897~1945)로 장욱진의 천재성을 미리 간파했다고 합니다. 이중섭에게도, 장욱진에게도 그들을 알아봐 준 스승이 있었다는 점에서 같은 미술교사로서의 마음가짐에 대해 한번 더 생각해 보는 계기이기도 합니다)


 미술교육에서는 아동의 예술적 표현을 두 가지로 구분합니다. 하나는 시각형 아동으로 철저하게 객관적인 형태를 보고 그리는 사실적 표현에 집중하는 유형이며, 또 다른 하나는 촉각형 아동으로 자신의 감정과 주관, 자신만이 느끼는 중요도에 따라 대상의 크기가 커지거나 왜곡되는 등 감각적인 표현을 하는 유형입니다. 장욱진은 여기서 촉각형에 해당한다는 것을 알 수 있죠.


 장욱진은 일본인 역사 교사의 가르침에 항의를 하다 퇴학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일이 전화위복이 되기도 합니다. 화가 공진형의 화실에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수덕사에서 병치료를 위해 머무르던 중 나혜석을 만나 그림에 대한 칭찬을 받기도 하는 등 예술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죠. 이후 양정고등보통학교(현 양정고등학교)에 편입하여 학업을 마쳤으며 이 기간 학생미술전람회에 출품한 <공기놀이>는 최고상을 받으며 상금 100만 원을 받으며 승승장구합니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을 들어가게 되면 왼쪽에서부터 관람관이 1, 2, 3, 4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추천드리는 전시 코스는 1-4-2-3 입니다 (일대기 감상 후 도상 이해하기)



1 첫 번째 고백, 내 자신의 저항 속에 살며


청년기(21세-33세): <자전적 향토세계> 향토적인 주제를 주로 그리며 주변의 모습을 검은색과 흙갈색의 모노톤으로 주로 표현한 시기(1937-1949)

중년기(34세-58세): <자전적 이상세계> 34세 6.25 전쟁 이후 망가진 현실보다 이상화된 세계를 주로 표현하기 위해 선명하고 채도 높은 색채를 이용하여 평면적인 화면을 만들었으며, 아동화와 유사한 특징을 지니는데, 퇴화가 아닌 그 시절의 그리움과 정겨움을 표현하는 시기(1950-1974)

노년기(59세-74세): <종합적 이상세계> 유화 외에도 한국화에의 표현방법이나 먹이 스며드는 효과를 이용하여 담채식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불교, 도교적 군상을 이용해 말년의 고찰을 담아낸 시기 (1975-1990)


<공기놀이>1938, 이건희 컬렉션

 1관은 장욱진의 학창 시절부터 중장년기까지의 작품을 모두 보여주는 관입니다. 나이에 따른 그의 화풍 변화를 일목요연하게 나열하고 있습니다. 장욱진은 일제강점기부터 한국전쟁, 민주화 과정을 모두 겪은 세대였습니다. 시대적 상황은 그의 예술세계에 다양한 영향을 미쳤지만 여타 작가들과는 좀 달랐습니다. 1관을 감상할 때엔 아래의 설명과 함께 작품의 제작연도를 함께 확인해 보세요.

<독>, 1949

  일제강점기에는 도일하여 이중섭, 김환기 등과 함께 공부했습니다. 도쿄에서 미술을 배우던 화가들은 일본풍의 이상주의나 표현주의 그림을 그렸고, 그것을 토대로 한국에 새로운 화풍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가족에 대한 향수, 주변에 대한 애틋함을 가지고 주변의 모습을 그리거나, 골똘히 자기만의 조형방식을 탐구했던 장욱진의 그림은 이러한 시대사적인 부분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교수들은 그의 그림에 좋은 평가를 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1관에서 가장 눈여겨볼 작품은 바로 <독><자화상>입니다. <독>은 1949년 그의 청년기 마지막 시기의 작품으로 화면 가득 그려진 장독과 그 아래 까치가 그려져 있어, 대상을 주관적으로 바라보는 장욱진의 조형 세계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중앙에 작게 독을 배치하여 그릴테지만 그에게 독은 한국이자 생활, 정겨움이었을 테니까요.

<자화상>이 걸려있는 1관 벽(출처: 쎄려니 블로그(네이버))

  장년기 초입의 <자화상>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 변화된 조형세계를 확실하게 알려줍니다. 장욱진 탄생 100주년 회고전의 메인이기도 한 이 작품은 전시실 중앙의 한쪽 벽 전체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전까지 볼 수 없었던 강렬한 노랑과 그와 대비되는 붉은색 길, 까맣고 단순하게 표현된 새와 강아지, 장욱진 스스로의 모습. 거친 유화의 마티에르(질감)가 나타나기 시작하며 주관에 따라 대상의 크기가 달라지던 청년기의 모습과는 사뭇 다릅니다. 형태는 단순화되었고, 색채는 강조됩니다. 전쟁 중 종군 화가로 부산에서 피난살이를 하던 화가가 잠시 고향이던 연기군에 머무르게 되었습니다. 폐허가 된 고향을 보며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그의 기억과 현실 중에 그는 기억을 선택했습니다. 내 사랑 내 고향, 황금빛 들녘으로 기억되는 나의 고향. 그는 그렇게 이상향을 찾아갔습니다. 여기에 줄지어 등장하는 새와 강아지를 꼭 기억해 주세요.


※ 1관의 작품은 아카이빙 형태로 작품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오디오 가이드를 통해 설명을 듣거나 작품 옆의 캡션을 같이 읽어보세요.

※ 1관에서 본 작품들 속 도상은 2, 3관에서 연계되어 등장합니다. 숨은 그림 찾기의 기분을 즐겨보세요.




<가족>, 1955



4 네 번째 고백, 내 마음으로서 그리는 그림


  4관은 1970년대 이후 노년기의 작품을 주로 담고 있습니다. 이 시기 장욱진의 작품은 무언가 초월한 존재처럼 여겨집니다. 그가 평생 남긴 730여 점의 유화 작품 중 80%인 580여 점이 생애 마지막 15년 사이에 그려졌다고 합니다. 또한 유화를 이용한 조형적 표현과 마티에르를 남기는 것 외에도 먹이 스며드는 효과를 다양한 물감을 이용해 나타내 동양적인 화풍으로 변모하기도 합니다. 때론 유화로, 때론 수채화로, 때론 진짜 먹으로 그러한 효과를 주었으며, 그림에는 민화에서 나오는 호랑이나 해와 달이 함께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림의 바탕은 캔버스를 넘어서 도자기로까지 확장되었으며, 작품의 크기도 이전과는 달리 커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장욱진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민화적 도상 (해, 달, 까치, 호랑이) 출처: 월간민화


  4관은 전시공간도 특별합니다. 1, 2, 3 관보다 조명은 더욱 어두우며 가벽의 색은 쪽색에서 흰색으로 바뀌었고, 테두리는 갈색 나무 몰딩으로 둘러져있습니다. 마치 창호지처럼 말이죠. 노년의 장욱진이 삶을 회고하고 돌아보는 단계에서 한국화 모티프를 많이 차용한 것처럼 전시 공간 역시 더욱 차분하고 조용하고 엄숙합니다.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 고개를 숙이도록 유도하는 것처럼 말이죠. 마지막 허공에 떠있는 가벽은 병풍을 떠올리기도 하며 산중 체험을 하는 기분이기도 합니다.

4관 전시 전경(출처: 쏠라 블로그(네이버))
(좌) <나무와 가족>, 1982  / (우) <밤과 노인>, 1990

 왼쪽의 <나무와 가족>을 보면 언덕 위에 선 커다란 나무 아래로, 아빠와 엄마, 아들로 보이는 가족 세 명이 보입니다. 이 작품에서도 녹색의 유성 물감에 테레핀을 많이 섞어 농도를 묽게 만든 다음, 화면 위에 번지는 물감의 얼룩을 그대로 말려 나무의 형상을 만들어냈습니다. 또한, 거칠고 빠르게 붓질을 함으로써 바람에 휘날리는 나무를 표현합니다. 캔버스와 유화 물감을 사용했지만 마찬가지로 한국화처럼 보입니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서양화일까요? 한국화일까요? 추상화일까요? 초상화일까요?

 오른쪽 <밤과 노인>은 장욱진이 세상을 떠나기 두 달 전에 그린 그림입니다. 흰색 한복을 입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노인은 아마 화가 자신일 것입니다. 그리고 또 까치가 등장합니다. 장욱진의 그림 속의 '까치'는 이중섭에게 있어 '소'와 비슷한 존재입니다. 좋은 소식을 몰고 온다는 까치는 마을 주변을 낮게 배회하며 사람들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살았습니다. 까치는 단순한 등장인물이 아닌 사람을 관찰하는 존재로서 장욱진의 자아를 대신하기도 합니다. 그런 성격 때문일까요? 까치는 주로 장욱진의 노년 작품에서 등장합니다. 그림의 아래에는 남자아이가 길 위에 서있습니다. 초현실적 분위기를 자아내는 이 작품은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불교의 윤회사상을 간접적으로 보여주었다는 이야기부터 죽음을 표현한 자신의 삶에 대한 회고록이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어찌 되었든 이 작품은 세속을 벗어난 듯 초탈하고 관조적인 분위기가 풍겨 나옵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초연한 마음가짐으로 '추상(抽象)'을 넘어 '무상(無相)'으로 생략과 압축한 내면세계를 나타낸 점에서 '한국적 모더니즘'을 확실하게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측면은 이 장욱진을 비슷하지만 다른 화가(이중섭, 박수근 등)들과 구분 짓게 만드는 요소라고 볼 수 있습니다.




2 두 번째 고백, 발상과 방법: 하나 속에 전체가 있다.


<까치>1958, 장욱진은 색을 칠하고 주변을 무수히 긁어내어 흰 질감의 배경과 까치의 형상을 만들었다.

  작가의 일대기를 보고 3층으로 올라온다면 2관과 3관이 있습니다. 3층 전체는 장욱진의 작품 속 도상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그중 2관은 작가가 화가로서 어떤 '발상'을 했는지, 어떤 '방법'으로 작품을 구성했는지 돌아보는 자리입니다.


  앞서 4관에서 이야기했던 주요 모티프 중 가장 처음으로 볼 수 있는 것이 1958년 작품 까치입니다. 하늘을 줄지어 나는 노년의 까치가 아닌 유일한 까치 한 마리가 그려진 이 그림을 통해 장욱진은 고민과 생각을 덜어내려 했을 것이다. 무수히 긁어나간 손자국은 화가의 집념과 고뇌로 설명되기도 합니다. 이 외에도 장욱진의 작품 속에서는 강아지가 등장합니다. 장욱진의 처남이 해외로 떠나면서 강아지 한 마리를 맡기고 간 이후부터 그림 속에 강아지가 등장한다고 설명이 되어 있는데, 까치는 마을의 주민으로 강아지는 가족으로 설명되는 이유가 이 때문일 것으로 추측하기도 합니다.






  2관을 감상하는 또 하나의 포인트는 비슷비슷하지만 다른 화면입니다. 주요 모티프로 까치와 강아지에 이어 '나무', '해와 달'도 많이 그려졌는데, 2관에서는 비슷한 사이즈의 작품에 조금씩 형태가 다른 작품들이 일렬로 나란히 전시되어 있습니다. 눈으로 보고, 변화를 찾아보세요. 그리고 어린 시절을 함께 떠올려보세요. 선생님들의 어린 시절 추억을 그림에 투영해 보세요.


  제한된 소재와 반복된 표현임에도 불구하고 장욱진의 그림은 하나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지만 동시에 다르다는 인상을 받을 것입니다.




(좌) <진진묘>,1970,  (우) <나무>,1986

 

3 세 번째 고백, 진眞 진眞 묘妙


  3관의 진진묘는 장욱진이 처음으로 불교적 도상을 그림에 그려 넣은 작품의 제목이자 동시에 “참으로 진실된 아름다움”에 관한 것입니다. 사실 진진묘는 작품의 제목이기 이전에 장욱진 화백의 부인이었던 이순경 씨의 법명이기도 합니다. 장욱진은 불교문화와 인연이 깊었습니다. 수덕사에 머물며 나혜석을 만났던 일화를 처음 말씀드렸습니다. 전염병인 성홍열(*닭살 모양의 발진과 인후통)을 앓고 치료를 위해 1000년 고찰이던 수덕사에 6개월 간 요양을 간 것이 장욱진과 불교의 첫 인연이었습니다. 수덕사는 고려시대 중건된 사찰이자 불법 공부를 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기에 이 시기에 접한 불교적 수행이 장욱진의 노년에 다시금 등장한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불교, 도가적 신선, 민화나 민속적ㆍ동화적 요소들이 다양하게 전개되며 수묵유화풍의 화면이 주된 경향을 모아놓은 3관은 자연스레 4관에서 보았던 작품들과 연결됩니다.


(좌) <미륵존여래불>, 연도미상  /  (우) <무제>, 1979 (출처:MMCA 장욱진 회고전 팸플릿)


  실제로 1970년대 중반부터 장욱진은 가족들과도 자주 절을 찾았다고 합니다. 때로는 혼자 전국 곳곳의 절을 찾아다니며 감상하고 그림을 그리기도 하면서 작가 스스로 '무상(無相)'을 깨달아 가는 길로서 먹을 이용했다고 비평가들은 설명합니다.


(다음은 제 개인의 생각입니다)

  미술교사의 입장에서 곰곰이 생각해 보건대 이 시기의 붓질은 그 어느 때보다도 아동 미술의 특징을 많이 보여줍니다. 아동화의 일반적인 특징으로는 '의사소통의 수단', '성장에 따른 복잡한 표현의 증거'를 꼽습니다. 즉, 성장에 따라 구조와 구성에 대한 감각이 발전하는 것이죠. 그런데, 노년으로 갈수록 장욱진의 그림은 점점 단순화됩니다. '의미 있는 형태를 과장하는 경향'을 지닌 아동의 특성이 다시금 나타나는 것이죠. 장욱진이 아동은 아니지만 아동과 비슷한 그림을 그리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장욱진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를 '천진난만(天眞爛漫)'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일례로 김형국 교수가 1973년 장욱진 화백이 57살이던 시절 처음 만나 연세를 여쭙자 "나이는 왜? 일곱 살!"이라고 답했다는 일화를 보자면 그의 다음 속에 이상향은 어린 시절의 순진무구한, 즐겁게 그림을 그리던 고즈넉한 동네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또한, 그런 그의 심리가 그림에 투영되어 아동화적인 표현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느꼈습니다. 매번 그의 그림을 볼 때면 제 머릿속을 사로잡는 생각이기도 합니다.

강운구 <수안보시절의 장욱진>, 1983(그는 1980년부터 1985년까지 수안보에서 생활하며 풍류적 정취를 찾았다) (출처: 월간조선)


  여담으로 장욱진 화백은 경기도 남양주 덕소에서 12년(1963-1975), 서울 명륜동에서 5년(1975-1980), 충북 충주 수안보에서 5년(1980-1985)을 지내다 마지막 거처로 경기도 용인의 마북리로 이사를 오게 됩니다. 화가가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떠난 이유는 도시화와 개발로 인해 주변의 삶의 척도가 계속해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그의 이상향에서 점점 멀어지는 동네를 떠나 더 고즈넉한 곳을 찾아 떠난 것이겠죠. 생의 마지막 15년 동안 유화 작품의 80%를 그렸다고 말씀드렸죠? 마지막 용인 시절 5년간에는 전체의 1/3에 해당하는 220여 점을 그렸다고 하니 예술혼을 정말 불태웠다고 밖에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장욱진미술관은 사실 양주에 있습니다.

경기 양주시 장흥면 권율로 193 (매주 월 휴무)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은 회고전과 함께 감상할 수 있는 <새벽의 표정> 전시를 2023년 09월 05부터 2024년 08월 18일까지 1년간 전시를 한다고 하니 이번 전시를 보고 관심이 생긴다면 꼭 한번 방문해 보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더불에 이번 <가장 진지한 고백: 장욱진 회고전>에는 BTS의 RM이 개인소장한 작품 6作도 함께 전시되어 있습니다. 장욱진이 아닌 RM의 소장 여부에 주목이 쏠릴까 어떤 것이 소장작인 지는 밝히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중섭, 박수근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장욱진 화백의 작품 세계는 가려진 경향이 있습니다. 시대사적인 흐름이나 비극 등의 스토리가 상대적으로 약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번 회고전을 기회로 널리 더 많이 사람들에게 알려지면 좋겠다는 소감을 밝히며 오늘의 도슨트 남미술은 글을 줄입니다 :)



전시장을 가시기 전 혹은

전시장을 다녀오신 후

글을 읽고 감상한 내용을 다시 한번 정리해 보시길 추천드립니다.


P.S. 연수 준비하시느라 너무 고생하신 서울국제고 제니 부장님께 감사의 인사와 존경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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