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계를 위한 체계
그렇다고 모든 요소마다 무조건적으로 체계와 원칙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나마 다행이랄까. 예외의 경우는 크게 두 가지, 하나는 원칙이 애초에 없는 경우, 다른 하나는 원칙이 있다면 새로운 원칙을 떠올려 지켜지지 않은 원칙을 합리화하는 경우였다.
전자의 경우는 이렇다. 처음 어떤 물건을 놓기 시작했을 때 큰 의미 없이 놓았다면 그 이후에도 어떻게 놓아도 상관없다. 나는 다행히도 원칙을 억지로 만들어내지는 않는다. 하지만 거기에 더 보기 좋은 방법이 떠올랐고 그때부터 그 원칙에 맞춰 물건을 배치하기 시작한다면, 이전의 불규칙한 배치도 모두 포함해서 새롭게 배치해야만 한다. 그래서 노트에 필기를 할 때에는 우연히 두 장을 넘기고 다음 필기를 이어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뒤늦게 필기 사이의 백지 두 면을 발견할 때면…
후자는 원칙이 깨진 상황 자체와 그 구성에 대한 공통점을 어떻게든 찾아내는 것이다. 예전에 취미로 러시아어를 배운 적이 있었는데, 우리 반 선생님께서 영어에 비해 러시아어는 문법적으로 예외가 적은 체계적인 언어라 하셨다. 영어를 피해 도망온 나는 흐뭇한 마음에 순간 감탄을 내뱉을 뻔했지만, 역시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야 했다. 선생님께서는 예외가 적다고 하셨지 문법에 규칙이 얼마나 많은지 말씀하시진 않으셨다. 내 눈에는 분명 예외라도 그것은 러시아어의 수많은 규칙 중 하나였다. 나의 체계도 누군가에게는 예외겠지만, 나에게는 규칙이었다. 해산물을 좋아하지 않아 회를 잘 먹지 않는 내가 초밥에는 환장하는 것이 예외인 것만 같지만 해산물과 이외의 것, 혹은 생선인 것과 아닌 것과 같이 양분되지 않는 나만의 기준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언어로 표현이 될 수도 있지만 나의 느낌이기만 하여 설명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굳이 내 기준을 설득해야 할 필요도 없고. 디자인과 관련한 책을 꽂은 칸에 자리가 없어 새로 산 디자인 서적을 그 아래 칸인 취미에 관한 책들 옆에 꽂아야 한다면, 디자인 서적 중 취미에 가장 가까운 디자인 서적을 아래 칸 맨 왼쪽에 옮겨 두고 새로 산 책을 디자인 칸에 배치한다. 옮길 이유를 만드는 것이다. 원칙을 대체하기 위한 원칙을 어떻게든 만들어 낸다.
그래서 대체되는 원칙들이 원칙 사이에 늘 생겨나기에 나의 체계는 카테고리가 아니라 스펙트럼으로 명명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