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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딸공 Oct 26. 2020

열심히만 살면 안 되는 건가요?

꾸준히 관심갖고 노력 해야 한다고요? 

첫 발령 학교에서 옆 반 담임으로 그녀를 만났다. 그녀는 푸근한 미소와 덤벙대는 매력으로 나보다 열 살이나 많은 나이를 자주 잊게 하는 사람이었다. 그녀의 둘째와 나의 첫째가 비슷한 나이였기 때문에 내가 큰아이로 혼란을 겪을 때마다 그녀는 괜찮다고 말해주는 사람이었는데, 희한하게 그 말을 들으면 정말로 다 괜찮을 것만 같은 마음이 들곤 했다. 


내가 아는 그녀는, 이상한 관리자 앞에서 거리낌 없이 할 말을 하면서 학생들을 앞에서는 사소한 눈빛에도 애정을 듬뿍 담는, 그런 사람이었다. 정의로움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순하던 눈빛에 날을 새겨 넣던, 그런 사람이었다. 10년 전 딱 한 번 같은 학년이었던 미약하기 그지없는 인연만으로, 위로가 필요한 순간 툭툭 전화를 하게 되는, 그런 사람이었다. 부당한 일을 그냥 넘기지 않을 것 같은 정의로움, 언제든 내 편이 되어 줄 것 같은 따뜻함, 사람을 대하는 진심 어린 태도, 와 이 사람은 진짜다. 그렇게 믿었던 사람이었다.      


지난 주말, 친한 후배 선생님의 결혼식에서 오랜만에 그녀를 만났다. 근무 학교가 달라도 한해 서너 번씩 꾸준히 만나왔는데 코로나 집콕 생활로 올해는 처음이었다. 식이 끝나고 아쉬운 마음에 시간 맞는 몇몇이 카페에 들렀다. 앉고 보니 나이도 성별도 골고루 섞인 넷이었다. 함께 근무한 기간은 각기 달라도 서로가 서로를 잘 아는 사이, 나이도 성별도 결혼 여부까지도 다양하지만 비슷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결혼은 하고 싶은데 집이 걱정이에요. 월급 모아서는 절대 못 살 거 같고 임대주택도 해당이 안 되더라고요.      


한숨 가득한 어린 선생님의 말에 그녀가 답한다.      


- 진작에 많이 알아봤어야지. 월급만으로 안 돼. 부동산에 꾸준히 관심 갖고 노력해야 해. 
- 와 쌤은 이제 부자네요.
- 에이 나도 다른 건 없어~ 그냥 집값이 올랐잖아.      


십 년 전 우리는 같은 교무실에 근무했고, 사오 년 전 우리는 같은 마음으로 촛불을 들었다. 같은 기간 동안 또래 아이를 키우며 같은 시간만큼 일했다. 하루하루 성실하게 열심히 살았다는 점에서 우리는 거의 같은 삶을 살았다. 단지 먹고 자는 각자의 공간이 내 것인가 잠시 빌린 것인가의 차이, 딱 그것만 사소한 차이일 뿐이었다. 대전에 터를 잡은 사람과, 세종으로 옮겨간 사람, 전세를 택한 사람과, 매매를 택한 사람.      


결혼을 앞두고 전세와 매매를 고민하는 몇 년에 사이, 집값은 더 이상 노력으로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올라버렸고, 이제는 정말 답이 보이지 않는다는 어린 선생님. 십 년 전 대전에 산 집 한 채의 가격이 제자리 걸음이지만 속편히 살아 가는 나. 몇 번이나 이사를 다닌 끝에 세종에 십사억짜리 집을 갖게 된 그녀. 비슷한 마음일 거라 믿었던 우리 넷은, 사실 완전히 다른 위치에 서 있었다.      


거저 얻은 게 아니라고, 손품 발품을 얼마나 팔았는지 아냐고, 아무것도 알아보지 않은 채 세상 탓만 하는 사람이 어리석은 거라고. 부동산에 대해 이야기 하면 흔히 돌아오는 반응이다. 그러니 그녀의 대답이 새삼 서러울 것도 미울 것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서운했다.      


열심히 알아보고 노력해야 한다는 말 위에, 그녀가 예전에 한 말들이 터덕터덕 쌓였다. 대학 때 시위 현장에서 도망 다닌 이야기, 함께 촛불을 들며 나누었던 이야기, 힘들어하던 학생들에게 들려주던 이야기, 부당하다고 생각한 일 앞에 먼저 큰 소리를 내던 모습까지도. 나의 서운함이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녀만큼은, 이라는 믿음 탓인지, 단지 배가 아파서인지는 잘 모르겠다. 삼억짜리 집이 십사억이 되도록 내버려 둔 세상을 탓할 수는 없으니 손쉽게 그녀를 탓하는 걸지도 모른다.      


항상 약한 사람 편에 서서 함께 눈물을 흘리던 그녀가, 집값이 올라 부자가 되었다는 말을 쉽게 하는 게 낯설고 미웠다. 그 오른 집값이 누군가의 눈물로 채워질 몫임을 모르는 체 하는 게 미웠다. 그러는 동안 집 한 채 사지 못한 채 결혼조차 망설이는 어린 선생님은 무심히 듣고 있는 내가 미웠을 것이다. 


그만 일어서죠. 


채 식지 않은 커피를 들고 어색하게 자리를 파한다. 그녀를 또 웃으며 만날 수 있을까? 나는 자신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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