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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딸공 Oct 28. 2020

브런치가 대체 뭐길래...

나는 그냥 내 글을 쓴다. 

올여름 엄마의 제삿날, 기묘한 제사상을 앞에 두고 수다를 떨다가 문득 엄마에 대한 글을 써보면 어떨까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 너무나 당연한 기억이 오빠에게 처음 듣는 이야기이거나, 오빠가 당연하게 믿어온 것들이 나에게는 전혀 동의할 수 없는 일인 경우가 꽤 자주 있었기 때문이다.    

  

소세지 하나도 반을 딱 잘라 나눠주던 엄마는, 당신에 대한 기억 조각도 딱 절반을 잘라 서로 다른 조각을 오빠와 나에게 나누어 주고 간 걸까?
그럼 우리 둘의 기억 조각을 모으면 엄마의 이야기를 완성할 수 있을까?     


그렇게 시작된 글이, 2020년 7월 17일 첫 번째 브런치 글 <엄마의 제사>였다. (나중에 브런치 북으로 엮으며 순서를 바꿔 제일 뒤로 갔지만, 실은 이 글이 가장 먼저 작성된 글이었다.)           


브런치에 작가 신청을 하고 몇 번씩 떨어지기도 한다는데 무슨 운이었던지, 신청하고 이틀 만에 작가로 등록되었다는 메일을 받았다. 서랍에 저장해둔 글에 하나둘 발행 버튼을 눌러 놓고, 라이킷 알람이 뜰 때마다 그게 뭐라고 엄청나게 기뻤다.      

<엄마의 제사> 조회 수가 1000을 돌파했습니다!     


첫 글을 올리고 서너 시간이 지났는데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구독자 10명도 채 안 되는 내 브런치 글을 누가 저렇게 읽는 거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조회 수가 2000, 3000을 돌파했다. 대체 무슨 일이야? 브런치 유입 통계를 보고서야 다음 메인 화면에 내 글이 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포털의 힘은 대단했다. 첫 번째 글 <엄마의 제사>는 이틀간 8만이 넘는 조회 수를 기록했고 지금까지도 내 글 중 가장 많은 라이킷을 받은 글이 되었다.    

 

처음으로 올린 글 <엄마의 제사>가 다음 메인에 소개되었다. 


언젠가는 제대로 글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블로그에 끄적대는 일기 수준을 벗어난 적은 없었다.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는 학급 신문에 잔소리 같은 글이나, 필요에 의해 작성한 몇몇 기고문을 제외하고는 글다운 글을 써본 적도 없었다. 꾸준히 글을 쓰긴 했어도 제대로 글을 쓴 적은 없었던 셈이다. 그런데 브런치에서 나를 부르는 ‘작가님’이라는 호칭은 왠지 이름값을 해야 할 것 같은 묘한 책임감과 매력을 동시에 느끼게 했다. 첫 포털 데뷔(?)가 지나간 뒤 나의 브런치 구독자는 40명을 넘어섰고, 나는 본격적으로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첫 번째 이야기는 엄마에 대한 기억이었다. 브런치를 시작한 것도, 글을 써야겠다 마음먹은 것도 결국은 엄마였으니까. 엄마에 대한 이야기는 딸공이라는 나의 이름과 함께 언젠가 한 번은 글로 남기고 싶은 오래 묵은 주제이기도 했다. 그 무렵 시작한 글쓰기 밴드도 꾸준히 글을 써야 할 이유가 되어 주었다. 그렇게 첫 번째 브런치 북, <내 이름은 김딸공>이 완성되었다.    

  

<내 이름은 김딸공>의 조회 수가 1000명을 돌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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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김딸공>의 조회 수가 2000명을 돌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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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김딸공>의 조회 수가 3000명을 돌파했습니다. 


브런치 북 <내 이름은 김딸공>이 메인에 소개되었다.


딸공, 카카오 채널에서 네 글을 봤어!       


한 달 만에 다시 받아보는 브런치 알림 폭탄. 무슨 일인가 어리둥절했던 첫 번째와는 달리, 나는 익숙한 손길로 포털을 확인하고, 다음 메인에서 나의 브런치 북 소개를 발견했다. 브런치를 시작하고 나를 아는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는데, 꽤 오랜 기간 메인과 카카오 채널에 떠 있었던 덕에, 글을 봤다고 연락하는 지인들이 늘어갔다. 며칠간 기록된 브런치 페이지의 조회 수는 지난 10년간 내 블로그의 조회 수를 합한 숫자를 넘어섰고, 구독자는 60명이 되었다. 나는 글쓰기가 신나면서 동시에 두려워졌다.           


첫 번째 브런치 북을 끝내고, <아들 둘을 키웁니다>를 썼다. 농촌 유학에 대해 묻는 지인들이 늘어나던 때였다. 거긴 괜찮은 거냐, 대안학교 아니냐, 공립교사가 애들은 대안학교에 보내는 거냐, 엄마 없이 애들만 보내서 괜찮겠냐, 관심인지 참견인지 모호한 질문들이 한참 마음을 어지럽히고 있던 참이었다.


      

<아들 둘을 키웁니다>의 조회 수가 1000명을 돌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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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둘을 키웁니다>의 조회 수가 2000명을 돌파했습니다.


오후에 업로드한 글은 저녁 무렵 다음 메인에 소개되었고, <아들 둘을 키웁니다>는 순식간에 삼만 이상의 조회 수를 기록했다. 지금까지는 브런치가 감성을 자극하는 글을 좋아하는 거라고 생각해 왔기 때문에 이 글이 메인에 소개된 것은 사실 의외였다. 이쯤 되니 브런치는 그냥 랜덤인가, 살짝 의심스럽기도 했다. 구독자는 80명을 넘어섰다.      


문제는 여기서부터였다. 나의 브런치를 구독한 사람들 중 누군가는 <내 이름은 김딸공>에, 누군가는 <아들 둘을 키웁니다>에, 또 다른 누군가는 <딸공 생각>이나 <슬기로운 e과 생활>에 라이킷을 눌렀을 것이다. 하고 싶은 말들이 제멋대로인 나는 너무나도 다른 색깔의 글들을 두서없이 벌여놓고 있었다. 그러니 새롭게 쓰는 어떤 글도 모두의 취향에 맞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결국 글을 쓰면 쓸수록 구독자가 줄어드는 일이 벌어지게 되었다. 구독자 수에 연연하지 말고 그냥 쓰고 싶은 글만 쓰면 아무 문제가 아닌 것을, 한번 늘어난 구독자가 하나둘 떨어져 나가는 일이 괜히 속상하고 마음이 안 좋았다. 라이킷 그게 뭐라고, 글을 올려놓고 라이킷 알람을 기다리며 괜히 들뜨고 괜히 시무룩했다.      

어차피 브런치 작가는 직업이 될 수 없어!     


솔직하게 인정해야 할 때였다. 내 브런치가 포털에 몇번 올라갔다고 해서 내가 진짜 작가가 되지는 않는다. 작가가 되고 싶어 피땀 흘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하루에 몇십 분 끄적인 글로 진짜 작가가 된단 말인가. 브런치 작가를 직업으로 삼기에 나는 턱없이 부족하다. 구독자 숫자가 88-90-89-90으로 널을 뛰던 며칠 후, 혼자 신나고 혼자 시무룩하다가 그렇게 마음을 다졌다. 이제부터는 그냥 쓰고 싶은 글을 쓰자. 나는 마음이 편해졌다.   


나는 딸공이고, 교사이며, 두 아이의 엄마다. 어떤 날은 교사 딸공으로, 어떤 날은 엄마 딸공으로, 또 어떤 날은 성질머리 더러운 82년생 김딸공으로 글을 쓴다. 모두가 좋아하는 글을 쓸 수는 없지만 그냥 쓰고 싶은 글을, 솔직하게 쓴다. 한번 쓰고 발행한 글은 더는 내 글이 아니다. 읽는 사람이 누구든 각자의 느낌으로 자유롭게 읽고 가볍게 라이킷을 하면 된다. 때로는 공감을 때로는 감동을 때로는 불편함을 선사하겠지만 그냥 나는 내 글을 쓰기로 한다. 조금은 자유로워질 수 있을 기분이 들었을 때 브런치에서 알림이 왔다.      


브런치에서 알림이 왔다. 나를 들었다 놨다하는 브런치... :) 


내일은 아마도 구독자가 조금 늘 것이다. 그리고 또 줄기도, 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계속 쓰고 싶은 글을 써나갈 예정이다. 라이킷이 적다고 시무룩 하지 않고, 구독자가 줄었다고 속상해 하지 않고, 솔직하게 글을 써내려 갈 것이다. 가장 나 다운 방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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