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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간 권태 Jul 17. 2020

소화의 과정

김수빈, 월간 권태, 2020

미셸 공드리, <이터널 선샤인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 2004.








소화의 과정



1. 

지독한 악몽이었다. 잊어버릴 때 즈음 되면 어김없이 잠자리에 찾아왔다가, 그렇게 시달리고 나고 깨면, 다시 그 꿈을 꿀 때까지 까맣게 잊어버리는. 식은땀을 흘리며 기분 나쁜 미묘함에 잠시 머리를 짚고 있다 보면, 곧 머리맡에 놓인 휴대폰에서 알람 소리가 울린다. 신경질적으로 알람을 끄면서 나의 하루는 시작되고, 곧 생각할 겨를도 없이 악몽의 후유증에서 벗어난다. 어쩌면 이 기분 나쁜 꿈보다 현실이 더 악질일 수는 있겠지만.


씻으러 침대에서 일어나기 전에 휴대폰 화면을 한 번 더 본다. 3월 29일, 아침 6시 반이다. 딱히 기억나는 일정이라곤 없는, 특별할 거 없는 하루, 늘 그랬던 것처럼. 왠지 모르게 몸이 시원찮다. 기지개를 쭉 피며 방문을 열려고 손잡이를 잡는 그 찰나, 누군가 문 밖에서 손잡이를 단단히 쥐고 문을 쑥 밀며 들어온다. 나는 무방비 상태로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서서히 올린 시선 끝에 서있는 외부인, 하얗고 멀건 청년 하나가 서 있다. 까무잡잡한 편인 나보다 피부가 너무 창백해서 가끔 시체 같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청년이 본인도 다소 놀란 얼굴로 바닥에 쓰러진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동시에 열었네.”


“····뭐야”


“놀랐어? 미안” 


그는 얼굴처럼 하얗고 긴 손가락들이 움켜쥐고 있는 투명한 유리잔을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나에게 건넨다. 늘 그렇게 어정쩡한 사람이었다. 마치 로봇처럼, 실행하려던 행동은 끝내고야 마는, 자신의 사랑스러운 애인이 본인 덕분에 바닥에 널브러져 있더라도 말이다. 나는 속으로 그렇게 욕을 하며 생뚱맞고 처량하기 그지없는 유리잔을 받아든다. 유리잔 표면에 송골송골 맺힌 물방울들을 보아하니, 따라 놓은 지 꽤 된 듯한데. 방에 들어올까 말까 꽤 고민한 눈치다. 


“왜 왔어?”


“그냥, 일어났을까 해서”


“이렇게 불쑥 찾아오는 거, 나는 싫은데.”


“나도 싫어. 너가 연락도 없이 나 피하는 거” 


내가 접한 일부만을 가지고 일반화하기는 정말 싫은데, 정말 내가 지금껏 만난 남자들은 전부 연락과 나의 잠수에 지나치게 집착한다. 잘 알려주지 않는 그런 미묘한 신비함에 반한 거면서, 연락 꼬박꼬박 하고 매일 만나면 곧 흥미를 잃을 거면서. 나는 늘 남자를 만날 때마다 그렇게 종종 만남을 미루고 연락을 피했다. 그래야 더 애가 타고, 날 더 좋아하게 될 테니까. 유리 잔 속의 금붕어가 되지 않으려면 그래야 했다. 내 앞의 이 청년은, 이 방식이 꽤 마음에 들지 않는가보다. 그렇다면 자기가 어쩔 건가. 이렇게 불쑥불쑥 남의 집에 멋대로 들어오는 것도 참 맘에 들지 않는다. 오늘 아침부터 정말 전체적으로 애인에게 정이 떨어진다. 나는 마치 드라마 속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가냘픈 눈빛으로 나에게 구애를 하고 있는 이 남자를 지나쳐, 거실로 나갔다. 원래 유리잔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거실 중앙의 탁자에, 남자가 쥐어 준 유리잔을 다시 내려놓았다. 남자가 터덜터덜 내 뒤를 쫓아오는 것이 느껴졌지만 신경 쓰지 않고 소파에 털썩, 앉았다. 그리곤 멍하니 맞은 편 벽을 쳐다보았다. 이 집에 이사 왔을 때, 그러니까 한 5년 전부터 그대로였던, 원래는 스카이블루였지만 지금은 곳곳에 누런 자국들이 낀, 아무것도 걸리지 않은 휑한 벽을 멍하니 바라본다. 아침에 일어나서 이렇게 벽을 쳐다보면 마치 내가 벽 속으로 들어갈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마치 매직아이를 보는 것처럼 벽의 얼룩들이 흐릿해질 때까지 눈을 찌푸리고 바라보고 있으면, 사랑스러운 내 애인은 내가 본인의 무단 침입에 대해 고뇌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괜스레 머쓱해하며 집을 나갈 것이다. 나는 여전히 남자를 신경 쓰지 않은 체, 그러니까 그 남자가 현관문이 아니라 거실 중앙으로 향하는 것을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척하며 계속해서 벽을 바라본다. 조금 후에, 내 남자는 탁자 위에 올려놓았던 유리잔을 들어 내가 쳐다보고 있던 벽에 냅다 집어 던진다. 쨍그랑, 하는 소리가 집 안에 가득 차고, 아무리 신경 쓰지 않으려 해도 유리 파편들을 피하려 나는 무의식적으로 어깨를 움츠린다. 꽤나 당황스럽다. 이런 돌발행동에 나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지? 왜 이 사람은 남의 집에서 갑자기 남의 유리잔을 깨뜨리는 거지? 


“씨-발. 사람이 말을 하면 좀 들으라고” 


하얗고 삐쩍 마른 잘생긴 남자 입에서는 나오지 않을 것 같은 쌍욕이 그 얄쌍한 입술에서 우다다 쏟아진다. 나는 이런 상황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몰라 더더욱 아득해진다. 머리를 한 대 맞은 것처럼 벙벙하고, 남자와 나 사이에 투명한 벽이 있는 것처럼 말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 그래, 마치 내가 유리잔 속에 들어가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이젠 점점 그 안에 물이 차는 것 같다. 몹시 불안하고 초조하다. 분명 몇 초 전까지만 해도 내 어장 속에서 놀아나는 잘생긴 남자일 뿐이었는데, 지금은 당장 날 죽일지도 모르는 예비 살인자가 나와 함께 있다. 


“내가 어제 몇 번을 전화했는데, 미안하지도 않아? 그래놓고 나를 무시해?” 


갑자기 어디선가 울리는 큰 음악 소리에 심장이 쿵.


남자 친구였던 그 남자의 폭언을 중단할 사건이 생겼다. 갑자기 내 핸드폰에서 엄청 큰 소리로 음악 소리가 울리기 시작한 것. 사실 나는 그게 전화가 온 것이 아니라 알람이라는 것을, 또 무엇을 위한 알람인지도 알고 있었다. 내가 그걸 어떻게 잊어.


나는 잽싸게 몸을 일으켜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엄마 전화야. 들릴 텐데, 계속 거기 서서 욕 할 거야?” 


남자는 얕은 한숨을 한 번 내쉬더니, 곧 겉옷을 챙기고 씩씩거리며 집을 나갔다. 그제야 나는 알람을 껐다. 핸드폰 화면에는 [현주 기일]이라고 되어있었다. ‘현주’라는 이름과 ‘기일’이라는 단어 조합이 왜 그렇게 소름이 돋을 만큼 낯선 지. 이제 익숙해 질 법도 한데. 심지어 소름이 돋다 못해 머리가 어지러웠다. 거실 한 편에 널브러져 있는 유리 조각들을 바라보다가, 곧 다시 침대로 가서 누웠다. 내 단잠을 깨운 남자친구와의 이별은 나중에 생각하고, 일단 눈이라도 좀 감고 있어야겠다.   






2. 

갑자기 눈이 확 떠졌다. 난 지금 살짝 미끌거리는 투명한 바닥에 누워있다. 분명 내 방 침대는 아니고. 주위를 둘러보니 세상에, 온 사방이 뿌옇고 울렁거린다. 마치 개울가에서 물 속 안을 바라보는 것처럼. 내 시야에서 파도를 치듯 흩날리는 머리카락들을 보니, 내가 아마 물 속에 있는 것 같다. 큰일 났네, 나는 수영을 못하는데. 그러고 보니 심지어 물속에서 내가 눈을 뜨고 있네. 뭐야, 꿈이네.


그 때, 저 멀리서 살구 색의 무언가가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그냥 커다란 색깔 덩어리. 점점 다가오다가 멈춘다. 나는 그것에게로 다가가려고 천천히 걸음을 뗐다. 물속에서 걷는 것 치고는 생각보다 몸이 가벼웠다. 좀 걸어도 좀처럼 닿지를 않아, 겅중 겅중 그것에게로 뛰어갔다. 그러다가 그것에게 닿기도 전에 꽝, 하고 무언가에 부딪혀 버렸다. 눈앞에 별이 보인다는 게 무슨 말인 지 알 정도로 머리가 울리는 고통, 그제야 나는 그 거대한 색깔 덩어리와 나 사이에 투명한 벽 같은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가만히 손을 뻗어 그 벽에 갔다대었더니, 그 살색 덩어리는 점점 커지더니(마치 얼굴을 들이미는 것처럼) 곧 눈이라고 부를 수 있을만한 것이 나를 향해 있었다. 


“뭐야, 너 왜 이렇게 작아졌어?”


“현주?” 


이 목소리는 현주다. 내 눈 앞에, 내 몸집의 백배는 되어 보이는 얼굴을 가진, 유리벽 바깥의 저 거대한 살색 덩어리는 현주다. 현주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 


“너 왜 여기 들어가 있어? 여기 물고기 집인데.” 


기가 차다. 6년 만에 만나서 하는 말이 왜 여기 있냐는 타박이라니. 심지어 더 화가 나는 건 나도 내가 왜 여기 있는지 모르겠다는 거다. 


“나도 모르겠어. 눈 떠보니까 여기 안에 있어.”


“알고 보니 너가 우리 집 물고기였던 거 아니야?”


“그랬으면 좋겠네.” 


오랜 만에 보는 현주 얼굴은, 뭐 예전과 똑같았다 이런 말을 해야 애틋하겠지만, 정말 커다란 살색 덩어리밖에 보이지 않아 얼굴이라고 부르기도 애매했다. 그나마 얼굴이라고 추정할 수 있는 것은, 내 몸집만한 눈알이 끔벅거린다는 것. 어항 속 금붕어가 사람을 쳐다볼 때 이런 느낌이었겠구나. 현주가 눈동자를 끔벅거릴 때마다 그게 그렇게 기괴할 수가 없었다. 


“현주야, 너는 나 안 보고 싶었어?”


“글쎄. 그건 그렇고 너는 날 너무 보고 싶어 하더라” 


그럼 그렇지. 현주 너는 날 지켜보고 있을 줄 알았어. 지켜봐 줘서 고마워. 


“현주야, 궁금한 게 있어.”


“뭔데?”


“넌 왜, 그 때 나한테 왜 그런 말을 했어? 대체 왜 전화한 거야, 나한테?” 


현주의 눈동자가 끔벅거린다. 한 번, 두 번. 세 번이 채 되기 전에 현주의 얼굴로 추정되던 커다란 살색 덩어리가 점점 멀어진다. 현주가 대답을 하지 않고 사라질 모양인가 보다. 그러다가 나는 갑자기 내 몸이 갑자기 저 깊은 바닥으로 추락하는 것을 느낀다. 현주가, 화가 나서 내가 들어있던 어항을 엎어버린 모양이다. 나는 저 깊은 바닥으로 추락한다. 한 아파트 7층 높이는 되어 보이는데. 저 바닥에 닿으면 내 몸은 터져버리겠지. 물론 그 전에 죽을 수도. 물속에서는 잘만 쉬어지던 숨이 갑자기 막히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정말 아가미가 생기고 폐가 없어졌던 건가. 힘겹게 가빠오는 호흡이 점차 멎어질 때쯤, 그리고 추락하던 내 몸이 이제 거의 바닥에 다다랐을 때 쯤, 어디선가 아득하게 현주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내가 아는 말. 현주가 마지막으로 전화해서 했던 말. 


“나는 너가 너무 지루해. 지루해서 미칠 것 같아. 내가, 전염되는 것 같아, 너한테.”  




한동안 잊었었던 기억인데,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추락을 멈추고, 그 전화를 받았던 바로 그 순간으로 돌아갔다. 내가 진짜 시간을 거슬러 돌아간 건지, 아니면 그냥 기억을 재생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그 때의 기억은 너무 생생하니까. 마치 그 장면을 녹화해서 두고두고 보기라도 한 것처럼, 내가 침대에 어떤 자세로 누워있었는지 조차, 그리고 어떤 기분이었는지도 똑같이 생각이 난다. 그 과거의 파편은 기억으로 존재한 것이 아니라, 늘 나에겐 현재로, 옆에 항상 있었다. 밤 12시 16분, 나는 불판 위 새우처럼 웅크리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그 시절에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을 하곤 했다. 마치 커다란 아이스크림 통에서 한 스쿱 퍼내는 것처럼, 만약 현주를 내 삶에서 그렇게 퍼낼 수 있다면 과연 어디부터 퍼내는 것이 맞을까? 어쩌면 현주의 파편들은 그 이후에도 나에게 남아서 그 종자를 퍼뜨리고 있을지 모른다. 현주는 이런 생각을 할까? 현주에게 내가 너무 많아서 자신도 모르게 지긋지긋하다 이런 생각, 아니면 문득 매 순간이 너와 함께였구나 이런 감탄이라도. 현주 너는 나를 떠올려주기를 할까? 한창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다. 화면에는 모르는 번호가 떠 있었다, 그 한 밤 중에. 나는 그 전화를 받지 말았어야 했다. 


“여보세요?” 


전화를 건 상대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 정적의 순간에 상대가 현주인 것을 알아차렸던가? 아니, 알아차리지 못했다. 전화 걸어놓고 말이 없는 상대에게 나는 짜증이 났었고, 이내 전화를 끊어버리려고 했었다. 그 때 전화를 끊었어야 했다. 하지만 용케 현주는 타이밍 좋게 내가 끊기 직전 말을 걸었고, 나는 휴대폰을 꽉 붙들었다. 


“넌 연락을 너무 많이 해. 그런 거 남자들은 안 좋아해. 답장 그렇게 바로바로 하면 연락하는 맛이 없잖아. 나중에 연애할 때 참고하라고.” 


밤 12시 반에 전화한 것 치고는 내용이 생각보다 황당하며 심지어 예의도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잠자코 있었다. 


“그리고, 넌 밥도 너무 빨리 먹어. 좀 천천히 먹고, 밥 먹으면서 딴 애들이랑 이야기도 좀 하고 그랬으면 좋겠어.”


“······”


“그리고 넌···, 넌····, 나는 너가 너무 지루해. 지루해서 미칠 것 같아. 내가, 전염되는 것 같아, 너한테.” 


마치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엄청난 역겨움을 느꼈다. 현기증이 나서 일어서기도 힘들 정도로 구토감이 치밀어 올랐다. 나는 핸드폰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곧바로 비틀대며 화장실로 달려갔다. 변기까지 채 가기도 전에 이미 토를 뿜고 있었다. 한 밤중이어서 다행이지, 엄마가 보기라도 했으면 내 딸이 토 뿜는 용이 되어버린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 분명하다. 한 차례 거하게 변기와 씨름을 하고, 한동안 화장실 바닥에 앉아있었다. 여기저기 물이 흥건하게 젖어있는 바닥에 앉아있어서, 바지 엉덩이 부분이 축축해진 것도 기억이 난다. 그리고 나는 천천히 일어나서 다시 방에 들어가 내가 바닥에 내팽개친 있는 핸드폰을 주워들었다. 통화는 이미 끊긴 뒤였다. 내가 다시 전화를 했어야 했나? 어쩌면 내가 화장실에서 토하는 사이에 너는 이미 뛰어버린 뒤였을 지도. 내가 거하게 토하려 한 것은 어쩌면 내 안에 있던 너였을지도 모른다. 나는 아이스크림처럼 부드럽게 너를 패어낸 것이 아니라, 불쾌한 고통 안에서 악을 쓰고 너를 웩웩 뱉어내려 한 것이다. 그 마저도 실패했지만. 


나는 다시 침대에 누워 이불을 뒤집어쓰고, 두 다리를 양팔로 감싸 안았다. 꽤 열정적으로 토를 해서 그런지, 속이 시원하고 피곤해서 두 눈이 서서히 감겼다. 나는 서서히 잠이 들었다. 밤이 꽤 추웠던 기억이 난다. 몸이 가볍게 떨릴 때마다 이불로 힘껏 온 몸을 감으며 잠을 청했다. 그렇게 일어난 아침은 상쾌했다. 얼마만의 깨끗한 아침인지, 몸이 한껏 가벼워져 날아갈 것 같았다. 오랜만에 느낀 기분 좋은 아침에 침대에 가만히 앉아있었는데, 엄마가 방으로 들어왔다. 


“어제 현주한테 전화 왔었니?”


“어, 왜?”


“현주가····, 어제 밤에 어디 간다고 이야기 했었니? 너도 같이 갔었어?”


“현주가 어제 어디를 갔는데?”


“현주가 가출했대. 어떡하니, 너는 몰랐어?” 


내가 생생하게 가지고 있는 기억은 여기까지. 이후 엄마가 나한테 현주의 실종을, 그리고 곧 현주의 죽음을, 자살을 어떻게 이야기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현주의 가출이 언제 현주의 자살 여행이 되었는지, 반 애들한테는 어떻게 알려졌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엄마한테 말을 걸어보려고 입을 떼려는데, 입이 벌어지지가 않는다. 아, 나 아직 꿈꾸는 중이었지. 내 기억이 여기까지니 내 꿈도 여기까지인가 보다. 점점 세상이 뿌옇게 보인다. 꿈에서 깨는 중이다.  






3. 

어디선가 큰 소리가 난다. 귀를 울리는 쿵쿵거리는 소리.


주위를 둘러보니, 휴대폰에서 소리가 울리는 중이었다. 화면을 보니 이번에는 진짜 엄마한테 온 전화다. 다시 잠을 잘까, 생각하다가 전화를 받기로 마음을 먹는다. 


“여보세요”


“목소리가 자다 일어난 목소리네. 어디 아픈 건 아니지?”


“아니야, 안 아파.”


“너 남자친구랑은 잘 지내는 거지? 집에 한 번 데리고 와. 사진으로만 보니까 애가 홀쭉하더라. 잘 먹고 다녀야지····.” 


시장 장터에서 통화를 하는 건지 엄마의 목소리가 시끄러운 음악소리와 사람들 소리 때문에 잘 들리지 않았다. 통화 음량을 키워도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어 살짝 짜증이 났다. 


“엄마, 지금 어디야? 잘 안 들려.”


“아, 오늘 장날이라서. 그래서 아랫집 아줌마랑 같이 뭐 좀 사려고 나왔지.”


“알았어. 그럼 나중에 집에 들어가서 전화해.”


“어머, 얘 벌써 끊으려고 하지 말고. 오늘 엄마 집에 와서 밥이나 먹고 가. 방금 자반고등어 사왔어. 너 좋아하는 

고등어구이 해줄게. 꼭 와서 먹고 가, 알겠지?”


“잘 안 들리네. 끊을게.”


“니 남자친구도 꼭 데리고 오고! 고등어구이-” 


아직 끝나지 않은 엄마의 말을 뒤로하고 통화를 끊어버렸다. 엄마한테 이야기를 할 걸 그랬나, 그 홀쭉해 보인다던 남자친구가 나한테 쌍욕하고 갔다는 거. 남자친구한테는 고등어 살까지 친절하게 발라서 가져다 바칠 모양인데, 엄마가 그렇게 밥 챙겨주면 그 밥심으로 날 팰지도 몰라. 여전히 거실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유리 조각을 보니 한숨부터 나왔다. 자기가 깼으면 자기가 치워야지, 이런 상도덕도 모르는 몰상식한 새끼 같으니라고. 바닥을 한창 빗자루 질을 하다 보니 슬금슬금 화가 났다. 연락을 안 한다고 그렇게 화를 낼만한 일인지, 오히려 남의 집에서 남의 유리잔을 깬 놈한테 내가 역정을 내야 하는 게 맞는 일이 아닌가. 


띠링, 하고 핸드폰 알람이 울렸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고, 유리잔을 깬 본인이었다. 다행인 것은 전화가 아니라 문자라는 것. 전화를 했다면, 심지어 음성 메시지였어도 나는 절대 받지 않았을 것을 그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아까 미안했어. 연락이 안 돼서 걱정하느라 그랬는데... 내가 너무 심했어. 미안해.] 


곧이어 바로 또 다른 메시지가 왔다. 


[어제 현민이랑 만났다며. 걔 나랑 같은 회사 다니는데, 내 핸드폰에서 너 사진보고 깜짝 놀라더라.]


[나는 너가 걔는 만나고 나랑은 연락이 안 된다는 게 너무 화가 나서.....]


[근데 현민이가 그러던데 너 어제 토했다며. 몸은 괜찮은 거야?]  




나도 내가 어제 현민이를 만날 줄은 몰랐다. 내 이름 석 자를 길 건너편에서 고래고래 외치는 현민이를 보면서, 고등학생 때 현민이랑 사귄 게 현주가 아니라 나였던 건가 잠시 고민했다. 현민이는 꽤 말끔해보였다. 그래서 너무 낯설었다. 나는 아직도 그 날 현주의 전화를 받고 변기에 달려가 속을 게워냈던 그 때에 머물러 있는데, 현민이 너는 어쩜 그리 변했니.


아닌게 아니라, 현민이는 정말 많이 변해있었다. 교복 바지를 마치 타이즈마냥 허벅지 통을 아주 타이트하게 줄이고 교복 셔츠는 풀어헤쳐 다니며, 몸으로 자기가 이 사회에 반항한다는 티를 철철 내고 다니던 그 철없던 남고생은 없었다. 벌써 어디 변변한 직장이라도 다니는 듯 꽤 멀쑥한 정장 비슷한 복장을 입고 머리를 넘긴 모습은, 지금의 내가 고등학교 교정을 보면 느끼는 그 소름끼치는 낯선 느낌과 같은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그 후에 현민이가 나에게 건넨 말은 더 가관이었다. 


“야, 너···, 너 정말 그대로구나.”


“너는 진짜 많이 변했다.”


“진짜 오랜만이다. 나는 지금 잠깐 출장 나온 길이야. 너는 뭐하고 지내?”


“나는 아직 대학생. 휴학한 지 좀 됐어. 너는 벌써 취업했나봐?” 


하핫, 하고 머쓱하게 웃는 얼굴을 보니 제법 자기가 하고 있는 사회생활이 꽤나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현민이는 막상 자기가 불러놓고는 머쓱한지 계속해서 우리가 언제 마지막으로 만났지, 하며 적막을 깨려 노력했다. 


“마지막으로 만난 건 현주 장례식이었지.”


“그게 벌써 그렇게 됐나?” 


사실 내일이 기일이야, 하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나만 혼자 이러고 있을 거라는 걸 예상했다. 같은 반이었던 친구나 선생님, 같은 동네였던 친구 아무도, 내일이 현주 기일이라는 걸 기억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현민이만큼은 어디선가 나만큼, 아니 이보다 덜 하더라도, 아파할 거라고 믿었다. 


“현주, 오랜만에 듣네···.”


“···.”


“너무 과거에 살지 말자, 우리.” 


심장까지 차가운 물이 천천히 차오르는 느낌이었다. 굳이 ‘우리’라고 이야기 할 필요 없었다. 현민이가 말하는 건 ‘나’였으니까. 나보고 너무 과거에 살지 말라는 거다. 심장까지 차올랐던 물이 이제는 식도를 넘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삼켜보려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물이 귀에도 넘어왔는지 현민이가 말하는 것이 더 이상 잘 들리지 않아서 기억은 안 나지만, 들으나마나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서서히 차오른 물을 도저히 삼키지 못하고, 이젠 입 안에 가득 모였다. 그리고 난, 그대로 고개를 내려 다 게워냈다. 정신을 차려보니 알게 된 것은 내 속에 차올랐던 것이 깨끗한 물은 아니었다는 것.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더럽혀진 현민이의 반짝거리는 구두가 내 눈앞에 들어왔다.




<소화의 과정>의 전문은 월간 권태 홈페이지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https://monthly-kwontae.com/7?category=937980로 찾아오세요!


김수빈 | 안녕하세요, 김수빈입니다. 1남1녀 중 장녀로, 언제나 가족의 안위를 먼저 생각하는 ‘유교걸’입니다. 유쾌하고 재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만 실생활에서 행동이 영 어색해서, 글이라도 재밌게 쓰려고 노력 중입니다. 혈액형은 B형, MBTI는 ISFJ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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