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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월 Feb 16. 2021

생일이 아닌 날, 태어나줘서 고맙다는 말을 들었다

말의 농도가 전달되기까지



엄마가 나를 낳다 죽을 뻔한 고비를 넘겼다는 이야기를 아빠에게서 자주 듣곤 했다. 여전히 감히 가늠할 수 없는 위급하고 긴급한 상황이었다. 제왕절개로 인한 출혈이 심해 쇼크사가 올 수도 있었던 상황에서 의사는 큰 병원으로 옮기기를 제안했지만, 생사가 넘나드는 일분일초가 위험한 상황에서 아빠는 쉽사리 이동을 선택할 수 없었다고 했다. 결국 제발 아내를 살려달라는 말과 함께 동네 작은 산부인과 의사에게 빌다시피 했던 그 찰나의 선택으로 산모도 태아도 지금의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하루는 책 이야기를 하는 작은 소모임에서였다. 그날은 임신과 출산에 관련한 주제에서 비혼에 이어지기까지, 다섯 명이 함께 뜨거운 논의를 이어가던 참이었다.      



“요즘도 여자가 애 낳다 죽는 경우가 많아?”



그러다 누군가 던진 이 질문은, 그가 평생 겪어볼 일도 없거니와 의학의 발달을 진심으로 믿기에 악의 없이 내뱉어질 수 있었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는 듯 날 선 태도를 감추지 못했다. 그런 당신에게 아직도 연간 수십 명의 임산부가 임신이나 분만과 관련한 질환으로 사망한다는 것과 엄마를 떠올리면 출산과 죽음의 경계가 나에겐 얼마나 남 얘기 같지 않은지 사적인 얘기를 토해버렸다.     



마냥 가깝지만은 않은, 서로의 이익을 위해 모인 모임에서 당신에게 내밀한 얘기를 하면서까지 충격을 줄 의도는 없었는데 순간 흐르는 적막에 조금은 아차 싶었다. 꽤 유순했던 막내의 급발진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내 모두가 놀란 표정을 뒤로하고 고맙다는 말을 쏟아내는 기묘한 상황이 이어졌다.      



건강하게 잘 커 줘서 고마워.
세상에 나와 줘서 고마워.
태어나줘서 고맙다. 정말로.



태어나줘서 고맙다는 말을 다채롭게도 건네 받았다. 그런데 이게 이토록 저릿한 말이었을까, 말이 마음에 정통으로 꽂힌 몇 안 되는 순간 중 하나였다. 너무 쉽게 엄마의 이야기를 팔아 죽음을 상기시켜버린 건 아니었을까 죄책감이 들었지만, 순식간에 죽음과 삶의 경계가 무너진 상황 탓에 의도하지 않았던 위로를 받은 아이러니한 순간이었다.      



사실 모든 말은 자주 쓰면 쓸수록 그 의미가 의도치 않게 희석된다는 느낌을 종종 받았다. 그러니까 연인에게 매일 듣는 ‘사랑해’라는 말은 소위 말해 멋이 없다고 생각했다. 좋은 말도 습관처럼 쓰이면 진심이 닿지 않았는데, ‘태어나줘서 고맙다’라는 말도 이제는 너무 자주 쓰여서 감흥이 느껴지지 않게 된 말 중 하나였다. 돌잔치나 생일 축하를 위한 상업적 문구로 우후죽순 쓰이기 시작했을 때부터였을까. 문장의 희소성을 잃어버렸다는 조금은 말도 안 되는 상실감에 젖기도 했다.      



그런데 모든 게 들어맞는 순간에 들은 말은 그 아무리 흔한 것이라도 이상하게 마음에 바로 꽂히게 된다. 이를테면 알게 모르게 내 가치를 의심하고 있어 위로를 갈망했을 무렵, 때마침 모두가 잠시 죽음과 탄생을 상기했을 때 들었던 ‘태어나줘서 고맙다’라는 그때 그 말이 그랬다. 말이 마음에 꽂히려면 어느 날 갑자기 건네는 센스 있는 선물처럼 마음도 절묘한 순간 무심하게 ‘툭’ 던져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예기치 않은 순간 예상하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들었던 태어나줘서 고맙다는 말 덕분에 나는 비로소 그 문장과 진심의 무게를 실감했다. 비록 태어나는 순간은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 여정이지만, 엄마나 아빠가 내가 태어난 이야기를 습관처럼 했던 데에는 모두 이유가 있을 터였다. 당시의 고통, 좌절, 선택, 희망의 갈림길에 있던 한 생명의 출산이 아마 다시금 삶의 의미를 부여해줄 마음의 훈장처럼 남은 게 아니었을까. 건강하게 잘 자라줘서 고맙다는 것과 그 자체로 애틋하고 소중하다는 마음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려고 했던 부모의 노력, 모순적이지만 나는 그 진하고도 지속적이었던 진심의 농도를 전혀 다른 이들을 통해 조금이나마 헤아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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