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동포루는 왜 안팎 지붕 모양이 다를까?-전편
포루(砲樓)는 포를 쏘는 곳으로 시설물 중 최강의 요새다. 화성에는 동, 서, 남, 그리고 북동, 북서포루 5개 포루가 있다. "북동"은 "북동쪽"을 말하는 게 아니고, "북문의 동쪽"이라 "북동"이라 한 것이다.
각 방위에 한 곳씩 설치하였는데 북쪽에만 포루가 2곳이다. 1곳이 더 많은 이유는 화홍문 때문이다. 방어에 가장 취약한 수문인 화홍문을 방어하라고 특별히 북동포루를 전진 배치한 것이다.
그런데 북동포루와 북서포루의 지붕 형식은 아직도 풀지 못한 화성 최대 미스터리다. 같은 건물, 같은 지붕인데 바깥쪽은 우진각 지붕이고, 안쪽은 맞배지붕이기 때문이다. 매우 특이한 이형(異形) 형태의 지붕이다. 왜 북동포루와 북서포루만 이런 특이한 형식일까?
이유를 찾아 떠나보자. 지붕에서 생긴 것이므로, 우선 당시의 "건축"과 "지붕"에 대한 특성을 알아보자.
먼저, "지붕"은 목조건축에서 중요한 부분이다. 햇빛, 비, 눈 등 자연현상을 막아주거나, 채광, 바람, 실내온도를 조절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지붕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아름다움의 표현이나 위계를 구분하는 역할도 하고 있다.
이런 표현과 구분을 위한 요소는 맛배, 우진각, 팔작 등 지붕 형식과, 지붕을 떠받드는 공포 형식, 길이와 앙곡(仰曲) 등 처마와 추녀 형식, 잡상(雜像) 형식, 회 바름(塗灰) 여부 등이다.
다음, "조선 건축"은 영조(營造) 규범을 엄격히 따랐다. 규범은 법이다. 규(規)나 범(範)은 모두 법(法)을 의미한다. 지금의 건축법은 환경, 안전, 도시 내 조화를 위한 수단이라면, 당시 규범은 안전, 계율, 위계를 위한 수단이었다.
당시에는 위계는 꼭 지켜야 할 디자인 요소였다. 궁궐건축, 서원건축, 사찰건축, 민가건축 간의 위계나, 같은 카테고리 안에서 건물 간 위계는 지켜져야 할 법이었다.
이와 같이 지붕의 비중과 당시 건축 규범을 놓고 보면, 북동포루의 지붕 형식은 법을 어긴 것이다. 같은 지붕에 한쪽은 맞배 형식이고 반대편은 우진각 형식은 비정상이다. 만일 원칙대로 지었으면 어느 형식이 맞을까?
당연히 양쪽 다 우진각 지붕이다. 포루는 전쟁 시설물로, 가능한 목구조를 노출시키면 안 되기 때문이다. 또한 서포루, 남포루, 동포루 모두 우진각인 것을 보아도 우진각 지붕이 원칙이다. 화성 전체에 맞배지붕은 없다. 그러면 실수일까? 의도일까?
실수는 당시 건축 규범으로 보면 이유가 될 수 없다. 의도적으로 한 것이다. 그렇다면 당초부터 맞배지붕으로 설계한 것일까? 아니면 어떤 상황 때문에 중도에 맞배로 바꾼 것일까? 필자는 원래 우진각 지붕을 "어떤 상황에 의해" 맞배지붕으로 바꾸었다고 보고 있다. 과연 어떤 상황이었을까?
자재 중에서 기와 공급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자재 조달"이 원인이지만, 배경에는 "을묘원행(乙卯園幸)"이 있다. 또 을묘원행 배경에는 "파일럿 프로젝트"가 있다. 파일럿 프로젝트와 을묘원행과 기와 공급은 어떤 연관이 있을까 차례로 살펴보자.
첫째, "파일럿 프로젝트"에 대해 살펴보자.
파일럿 프로젝트란 대규모 공사, 반복 공사, 장기 공사, 최초로 시도하는 프로젝트에 적용하는 일종의 선행공사(先行工事)이다. 주요 대상을, 사업 초기에, 단기간 내 완공하여, 나타난 문제를 파악하고, 대책을 강구하여, 시행착오를 없애는 것이 목적이다.
정조는 화성성역에 파일럿 프로젝트를 적용하였다. 착공 1년 전 정조는 "경(卿)은 화성 성역에 대한 좋은 의견이 있는가?"라고 후에 화성성역 총책임자가 될 채제공(蔡濟恭)에게 물었다.
이에 "성역은 마땅히 먼저 어렵고 쉬움을 잘 가려서 그중 어려운 것을 먼저 하고 쉬운 것을 뒤에 하여야 모두 실마리가 잡힐 것입니다"라 답하였다. 여기서 "선기난(先其難), 즉 어려운 것을 먼저 하고"가 파일럿 프로젝트의 개념이고, "심탁난이(審度難易), 즉 어렵고 쉬움을 잘 가려서"가 대상 선정이다.
취지에 맞춰 대상을 정하였다. 북성과 남성은 평지성으로 성 높이가 높고, 대규모 내탁이 있는 화성 최대 핵심공사여서 대상으로 삼았다. 장안문과 팔달문은 높은 인공지반 육축, 2층 문루, 옹성 때문에 대상에 올렸고, 화홍문과 남수문은 교량을 겸한 수문 건축이어서 대상이 되었다.
포루(砲樓)는 왜 포함시켰을까? 포루는 두 가지가 처음 시도되는 시설물이다. 전체를 벽돌로 짓는 조선 최초의 건축이고, 지면부터 성 높이까지 사이를 사용하는 화성 유일의 건축이기 때문이다. 3 면벽에 수많은 포혈을 모두 다른 각도로 내는 것도 한 특징이다.
둘째, "을묘원행"과의 관계를 살펴보자.
"을묘원행"은 정조가 1795년 을묘년 윤 2월 19일부터 수원을 방문하는 것을 말한다. 어머니 혜경궁과 함께 사도세자의 능을 참배하고 화성행궁과 화성에서 여러 행사를 치르는 일정이다.
향교 제례인 화성 성묘(聖廟) 전배(展拜), 현지 과거시험과 합격자 발표인 낙남헌 방방(放榜), 군사훈련인 서장대 성조와 야조(城操夜操), 어머니 회갑연인 봉수당 진찬연(進饌宴), 노인잔치인 낙남헌 양로연(養老宴), 활쏘기와 불꽃놀이인 득중정 어사(御射) 등 행사이다.
을묘원행은 다른 원행과 달리 화성 성역에 중대한 영향을 끼친다. 을묘년은 1795년으로 성역 착수 후 만 1년이 되는 해이다. 즉 파일럿 프로젝트의 기간을 1년으로 한 것이다.
왜 1년일까? 총 예상 공기 10년의 10분의 1이기 때문이다. 1년 이내에 10년 공사 전체의 문제점을 파악하겠다는 것이 정조의 의도였다. 1년 후가 을묘년 2월이고, 이 시점에 "을묘원행"을 맞춘 것이다.
지금까지 당시의 "건축" 규범과 "지붕"의 중요성에 대해 살펴보았고, "파일럿 프로젝트"의 목적, 대상, 기간과 "을묘원행"이 잡힌 날에 대해 알아보았다. 맞배지붕으로 바뀐 "기와 공급 문제"는 다음 편에 계속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