둔촌 백일장 입상 실패 후기
시는 써본 적이 없으니, 일단 산문으로 ㄱㄱ
언론사 입사 지망생이었던 시절이 1년 남짓이었고, 나름대로 사람들과 작문 연습도 꽤 했었다.
몇 번이나 필기시험을 봤던 경험도 있고 떨어지기도, 붙기도 했으나,
어쨌거나 어떤 장소에 어떤 시간에 어떤 누군가들과 함께 모여 종이에 글씨를 쓰는 일은 나에게 딱히 낯선 일은 아니었다.
무려 10년이나 지난 일이라는 게 함정이지만..
자신 있었다.
무엇보다 이 자신감의 원천은 딱 두 에피소드가 있는데
하나는
회사 동기가 심각한 이별의 위기에 처했을 때 연애편지를 대필해 줘서 그 위기를 극복하고 결혼까지 골인한 러브스토리였으며,
또 하나는
계약직으로 일하던 후배의 자소서와 면접 대본을 써줘서 정규직까지 합격한 성공스토리였다.
그 두 번의 경험은 내 양 어깨의 한쪽 씩을 관우와 장비마냥 차지하고 있었다.
백일장 당일에 집을 나서며 딸에게 호기롭게 외쳤다.
"딸! 아빠가 글 써서 100만원 타올게!!"
그렇게 처음 참가한 둔촌백일장은 생각보다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일단 강동 지역의 백일장인줄만 알았는데 생각 외로 전국에서 사람들이 모였다. 저 멀리 창원에서, 제주에서.
그리고 참가하는 모두는 진심이었다. 내 앞의 노신사분은 손수 제작하신 휴대용 책상까지 들고 오셨다. 그야말로 낭만을 아는 사람들의 소리 없는 파티 같았달까.
제시된 글제는 총 5개였다.
혼밥, 의자, 인공지능, 생명의 땅, 갈등
서걱서걱
저마다 글 쓰는 소리들로 강당이 꽉 찼다. 나도 참 오랜만에 재밌게 글을 써냈다. (왠지 의자는 인기가 없을 거 같아서 의자로 써서 냄)
그리고 며칠이 지나 입상작 발표날이 되었다.
결과는?
떙!
없었다.
아 요즘 렌즈가 자꾸 뿌옇긴 하네 ㅎㅎㅎ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없었다.
그리고 떠오르는 딸의 얼굴.. 나는 딸에게 아빠가 탈락한 사실을 감추기로 했다. 그리고 그날 와이프에게는 슬쩍 덤덤하게 말했다.
"오늘 발표 났는데~ 떨어졌더라고 ㅎㅎㅎㅎ 덕분에 재밌었어~"
그렇게 와이프도 나도 둔촌백일장을 잊고 살던 어느 날이었다.
"아빠, 저번에 글쓰기 대회 나간 거 언제 상 타와??"
아빠가 상을 타오는 건 일단 기정사실로 정해둔 채 언제 가져오는지를 묻는 우리 딸.
당황한 나는 대충 얼버무리고 말았다.
"아 그거 아직 발표가 안 났네. 좀 기다려 보자~"
고민했다.
아빠가 타오는 상이 무슨 모양일지 잔뜩 기대하고 있는 딸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사실대로 말하는 수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딸에게는 항상 결과보다 과정을 칭찬하고 성공보다 노력을 칭찬했던 날을 떠올렸다.
자신이 못하는 건 금방 흥미를 잃고, 이기지 못하면 다른 게임을 하려고 하는 다람이에게는
아빠가 실패하는 모습을 자랑스럽게 얘기하는 것이 어쩌면 가장 필요한 교육 아닐까 생각했다.
실패, 그리고 더 큰 실패를 앞으로 수도 없이 마주하게 될 딸이 그 안에서 배우고 성장했으면 좋겠다. 넘어졌을 때 실망하기보다 툭툭 털고 앞으로 나아가길 바란다.
다음날 나는 다람이에게 사실대로 말해줬다.
"아빠 이번에는 상을 못 받았어. 근데 아빠는 도전한 것만으로도 너무 재밌었어. 내년에 아빠는 또 나가볼 거야. 그리고 상을 못 받아도 괜찮았어. 내후년에 다람이 초등학교 가면 아빠랑 같이 나가자!"
실망한 듯 아닌 듯 금세 다른 얘기를 하는 다람이.
실패를 마주한다면 꼭 옆에서 축하해 줘야지.
도전했으면 됐어. 그게 너무 멋있었어.
다음에 다시 도전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고 축하해 줘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