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화가 있는 밤 Sep 19. 2020

더는 초록지붕집의 앤이 아니야Anne with an E

'Unusual'해서 특별한 앤, 그녀가 불어넣은 용기의 이야기 

앞서 세 가지 전채 요리를 맛보며 '요리를 통해 보는 인생'을 음미했다. 이제 메인 디쉬를 먹어볼 차례이다. '어렸을 적 보았던 삶의 색깔'이 어땠는지 떠올리며 첫 번째 메인 디쉬를 맛보자. '성장기'를 담은 요리들을 통해 잊고 살았던 삶의 색채가 톡톡 터트려지듯 떠오를 것이다. 



 초록 지붕 집의 '빨간 머리 앤.' 특히 어린 소녀들이라면 설렘을 가득 안고 읽었을 소설이다. 1900년대 초반 캐나다의 루시 모드 몽고메리 작가가 쓴 이 시리즈는 100여 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있다. 그리고 2017년, 넷플릭스에 의해 '빨간 머리 앤'이 재탄생했다. 소설의 원제인 '초록 지붕 집의 앤(Anne of Green Gables)'과는 차이가 있지만 'Anne with an E'라는 제목으로 21세기에 앤은 다시 살아 숨 쉬게 되었다.


커스버트네에 처음 온 앤의 모습 ㅣ CBC 방송국 'Anne with an E' 캐릭터 소개


 앤은 소설의 내용처럼 고아원에서 커스버트네 집으로 입양된다. 커스버트 남매는 농장에 일꾼이 필요하여 남자아이를 고용하고 싶어 했지만 고아원 원장님의 실수로 앤이 커스버트 집안에 들어간다. 원리원칙을 중시하고 칼 같은 성품의 마릴라는 앤을 되돌려 보내려고 하지만, 고아원에서부터 함께 마차를 타며 수다쟁이 앤의 밝음을 느낀 매튜는 그녀를 키우기로 결심한다. 


 위의 설정이나 핵심 등장인물들을 제외하고 'Anne with an E' 시리즈는 많은 부분을 각색했다. 극 중에서 시즌 3으로 구성된 '빨간 머리 앤'은 긴 스토리를 통해 원작보다 더 당차고 주체적인 앤의 모습을 그렸다. 그래서 더 풍요롭고 다채로운 앤의 성장기를 엿볼 수 있다. 


앤과 함께 포도주를 마시는 다이애나 ㅣ CBC 'Anne with an E' 캐릭터 소개


 '앤 셜리 커스버트'라는 이름을 받아 커스버트 가족의 일원이 된 앤은 처음부터 여러 사고를 친다. 그녀는 다이애나 배리에게 실수로 포도주를 먹이고, 린드 부인이 어릴 적 콤플렉스였던 빨간 머리에 대해 안 좋은 말을 하자 성미를 참지 못해 화를 내기도 한다. 또 앤은 학교에 간 첫날에 자신을 홍당무라 부르는 길버트에게 석판을 내리치고 머리카락을 초록색으로 염색하다 울면서 잘라내기도 한다. 이렇게 앤은 사고뭉치였지만 그녀는 점점 자신만의 가치를 입증해 나간다. 


 먼저 앤은 누구든지 친구를 소중히 아끼는, 열린 마음을 지녔다. 그녀는 단짝인 다이애나뿐 아니라 나이를 초월하여 린드 부인, 마릴라, 매튜와도 진심을 나눈다. 뿐만 아니라 마을에 새로 오신 스테이시 선생님과도 소울메이트가 되고 화가 친구 콜과도 우정을 나눈다. 이처럼 특유의 사교성과 재치로 앤은 배리 가문의 조세핀 할머니가 여는 성대한 파티에 초대받고, 친구 콜에게 예술성을 발휘할 문을 열어 준다. 


길버트ㅣ CBC 'Anne with an E' 캐릭터 소개


 그렇게 앤이 세상에 오픈된 마음가짐을 지니고 있기에 그녀는 더 많은 것을 경험하고 느꼈다. 그녀는 사랑에서도 주체적인 모습을 보이고 자신의 인생을 개척해 나간다. 앤도 학창 시절부터 쭉 그녀를 좋아하던 길버트에게 마음이 동했지만 '선생님'이라는 꿈을 찾기까지 그와 친구 사이를 유지한다. 어찌 보면 앤이 길버트를 향한 자신의 마음을 몰라서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녀가 크리스마스 연회에서 길버트에게 받은 백과사전을 소중히 여기는 것을 보면 앤은 꿈이 있는 사람으로 성장한 후 당당히 연인을 마주하고 싶었던 것 같다. 


 앤은 길버트가 의대에 진학하겠다는 꿈을 품고 나서도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진지하게 고민한다. 성장기에 앞으로 무슨 일을 할지 고민하고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녀는 그 자람의 시간을 허투루 흘려보내지 않았다. 길버트보다 더디더라도 앤은 스테이시처럼 아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선생님이 되겠다는 꿈을 구체화한다.   


 어린 청소년이었지만 앤은 숱한 고민의 시간을 거치며 앞으로의 삶에서 열매를 맺기 위해 필요한 거름을 마련한다. 그리고 대학에 가서 성인이 되었을 때 그녀는 비로소 인생을 윤택하게 만들 단단한 토양을 마주한다. 학창시절 동안 앤은 그녀와 닮은 콜이라는 친구를 만난다. 그는 당시 농업과 사업 등에 주로 종사했던 남학생들과 달리 그림을 좋아하는 소년이었다. 당대 시대상황을 고려하면 일반적이지 않았기에 그는 많은 편견을 겪었고 특히 빌리 앤드루스에게서 괴롭힘을 받았다. 그리고 콜은 빌리 때문에 손을 다치게 된다. 세상에 설 자리가 없다고 느끼며 방황하던 콜에게 친구들은 손을 내밀었다. 


콜을 응원하는 앤 ㅣ 넷플릭스


 외롭던 그의 곁에 앤과 다이애나, 길버트가 서 주었고 콜은 예술적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길을 찾는다. 콜은 앤, 다이애나와 함께 조세핀 할머니의 파티에 가서 자신의 재능이 잘못된 것이 아니며 소중히 갈고닦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때부터 그는 손이 서툴러도 할 수 있는 조각의 길로 들어선다. 그리고 다양한 재능을 가진 예술인들과 교류하며 아트 스쿨에 다닐 기회를 얻는다.


 콜이 꿈을 찾는 시간 동안 앤은 그가 재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곁에서 격려했다. 그리고 앤은 친구의 재능에만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자신의 예술성도 십분 발휘한다. 바로 글쓰기였다. 조세핀 할머니의 파티에서 앤은 시를 낭독한다. 염색약 때문에 짧아진 머리스타일에 작은 원피스를  입은 앤은 다이애나처럼 우아하지는 않았다. 


조세핀 할머니의 파티에서 시를 낭독하는 앤 ㅣ 넷플릭스


 하지만 앤은 외적 가치보다 자신의 내적 가치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스타일이나 외모 등이 아닌, 지식을 탐구하는 철학적 면모와 문예가로서의 실력이 자신의 진짜 자산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앤은 다채로운 예술인들의 틈 속에서 자유롭게 시를 낭독한다. 고아원에서 괴짜, 공상가라며 놀림을 받던 그녀가 문학적 재능을 발휘해 쓴 글을 사람들 앞에서 보였을 때, 앤은 자유를 느꼈다. 

 

 그러게 앤은 남들이 요구하는 모습, 당시 일반적으로 좋다고 여겨졌던 기준에서 벗어나 자신의 능력을 한껏 펼친다. 사람들이 여전히 그녀를 곱지 않게 보아도 앤은 상처 받지 않고 상상력의 나래를 펼친다. 그렇게 그녀는 자신의 '특별함'을 증명하며 세상 어디에도 없는 '앤 셜리'로 성장해 간다. 


스테이시 선생님과 아이들 ㅣ 넷플릭스


 앤은 자신의 글쓰기 실력을 활용해 신문 동아리에서도 두각을 나타낸다. 그녀는 스테이시 선생님과 프린팅 기계를 새로 들여오고, 말하고픈 이야기들을 글로 쓰며 길버트, 다이애나의 지지를 받는다. 특히 그녀는 스테이시 선생님을 위해 자신의 의견을 '표현'한다. 

 

 당시 마을 사람들은 스테이시 선생님의 교육방식에 회의를 느꼈다. 스테이시 선생님의 수업에서 아이들이 다쳤기 때문이다. 당시 선생님은 이론이 아닌 실습과 참여 중심의 수업으로 아이들을 고무시키길 바라셨다. 그래서 전기가 만들어지는 것을 가르치고자 감자에 전구를 꽂는 수업을 했는데, 한 학생의 부주의로 인해 전구가 깨져 다친 학생들이 생겼다. 이때 선생님의 수업에서 영감을 받아 그녀를 지키고자 결심한 앤은 아이들이 쉽게 생각하지 못한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바로 '전구'였다. 


스테이시 선생님의 수업을 몸소 표현하는 아이들 ㅣ 넷플릭스


 지금은 참여형 수업이 아이들의 창의력을 증진한다는 것이 알려져 있지만, 당시 학생들에게는 산수와 연산을 배워 고등 교육 기관에 진학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래서 스테이시 선생님의 교육 방식에 마을 사람들은 매우 회의적이었다. 그들과 달리 활발한 교육에 깨어 있었던 앤과 길버트는 선생님을 지키고자 머리를 모은다. 스테이시를 쫓아 내려는 마을 사람들 앞에 '전구'를 들고 나타나는 것이었다. 


 앤과 길버트는 학생들이 직접 배운 것을 증명하며, 열린 교육이 얼마나 큰 학습이 되는지 보여주었다. 마을 사람들은 학생들이 2차원적 배움이 아닌 3차원의 입체적인 학습을 했음을 알게 된다. 이때 앤이 말한 대사가 인상적이다. '한 번 들으면 금세 잊어버리지만 직접 보여주고 참여하게 하면 우리는 그것을 기억하고 배운다.'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며 글쓰기와 말하기를 계속하는 앤 ㅣ 넷플릭스


 사람들은 보통 새로운 것에 경계심을 갖기 마련이다. 마을에 처음 온 앤에게도 그러했고 붓을 쥐던 콜에게도, 바지를 입고 자전거를 타던 스테이시 선생님에게도 그랬다. 그런 그들은 마을 사람들에게 'Most Unusual'한 존재들이었다. 그들에게는 '가장 별난'이라는 수식어가 항상 붙었다.


 하지만 그들은 별나다는 것이 나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특히 앤은 남들보다 더 넓은 관점으로 세상을 보았고 다른 사람들이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소중한 것을 지켰다. 그녀는 세기에 이름을 남길 조각가를 격려했고 아이들이 배움을 체득하도록 도운 선생님을 지켰다. 또한 앤은 당당하게 사랑을 고백함으로써 멋진 동료인 길버트의 곁에 남았다. 


별남이 뛰어나고 비범한 것을 뜻한다고 믿었던 앤 ㅣ 넷플릭스


 이런 앤은 별나거나 독특한 것이 아니라 특별한 소녀였다. 'Open-minded'와 'Free-spirited'의 앤은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모두 변화시킨다. 그래서 'Anne Shirley'는 단순히 초록 지붕 집의 앤이 아니라 이름에 'E'가 붙은, 세상에 단 하나뿐인 앤 이다. 'Anne with an E'라는 제목이 보여주는 것은 더 이상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자란 소녀만이 아니다. 그 제목이 21세기에 새롭게 보여주는 것은 'Anne'이라는 소녀가 'E'토록 놀랍게 사람들을 고무시키며, 자신의 고유한 가치를 찾아나가는 용기의 이야기이다. 






 

  


  


 


 

이전 05화 인생이라는 배를 비추는 등대, 《줄리 앤 줄리아》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