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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tgreen Nov 09. 2020

[연극] <나, 혜석>이 보여준 나혜석의 삶

연극 <나, 혜석> 포스터

지난 9월 세종문화회관 세종M씨어터에서 선보일 예정이었던 연극 <나, 혜석>이 코로나19 확산으로 취소된 이후, 10월 26일 온라인 송출되었습니다. <나, 혜석>은 세종문화회관 산하 서울시극단의 제48회 정기공연으로, 박무영-최나라-정새별 배우가 각각 노년-중년-청년의 나혜석 역할을 맡아 훌륭한 연기를 보여주었습니다. 


한국 근대 여성미술은 나혜석이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1918)하여 첫 개인전을 가진 1921년을 기점으로 설명될 정도로, 나혜석은 근대미술사에서 중요하게 언급되는 화가입니다. 그런데 나혜석의 초기 활동은 미술보다 문학을 통한 여성계몽운동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1913년 동경여자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한 나혜석은 동경 유학생들의 동인지 「학지광」에 여성주의자로서의 면모를 드러내는 글들을 기고하기도 했습니다. 1914년에 발표한 ‘이상적 부인’에서는 ‘양부현부(良夫賢父)’는 없고 ‘양처현모(良妻賢母)’만을 요구하는 조선사회를 비판하며 온양유순한 여성이 아니라 개성 있고 자각 있는 여성, 현대를 이해하는 실력을 겸비한 여성이야말로 이상적 부인이라는, 그 당시로서는 가히 파격적이라 할 수 있는 주장을 펼칩니다. 1917년의 ‘잡감(雜感)’에서는 이성과 철학을 지닌 미국 여자, 과학과 예술을 이해하는 프랑스 여자, 용기와 노동력을 갖춘 독일 여자와 같이 조선 여자들도 말 없고 생각 없는 여자가 아니라 사람다운 여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문인으로서의 활동은 귀국 후에도 계속 이어져, 1920년에는 여성 문인 김일엽과 함께 여성을 위한 잡지 「신여자」를 창간하기도 합니다.


나혜석, <김일엽의 하루>, 1920; <저것이 무엇인고>, 1920

「신여성」에 게재한 나혜석의 삽화 두 점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김일엽의 하루>는 친구이자 동지였던 김일엽의 일상생활을 보여주는 네 개의 장면과 그것을 설명하는 텍스트로 이루어진 작품입니다. 각각 밤 12시까지 독서하는 여성/ 부글부글 푸푸, 하는 냄비 앞에서 시를 짓는 여성/ 손으로는 바느질을 하며 머리로는 신여자 잘 살릴 생각에 잠긴 여성/ 새벽에 원고를 작성하는 여성의 모습을 담고 있지요. 가사 노동과 작품 활동을 동시에 수행해야만 하는 여성의 현실을 보여주는 작업이라 하겠습니다. <저것이 무엇인고>는 당대 신여성에 대한 동시대 남성들의 반응을 보여줍니다. 한복 차림의 두 노인은 “저것이 무엇인가, 그 기집애 건방지다, 저것을 누가 데려가나”라며 혀를 차고 있고, 앞의 한 청년은 “고것 참 이쁘다, 쳐다봐야 인사나 하지” 합니다. 가정을 벗어나 독자적인 자신의 일을 가진 여성을 바라보는 남성들의 시각은 그녀를 경시하거나 혹은 농을 던지기 위한 대상일 뿐, 그녀의 사회 활동을 공식적으로 인정해주려는 태도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나혜석은 여성에 대한 사회적 편견, 그리고 여성을 대상화하는 남성중심적 시각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지요.


나혜석, <농가>, 1922; <농촌풍경>, 연대미상; <봄의 오후>, 1927

앞서 언급했던 1921년의 개인전은 경성에서 열린 최초의 서양화 전시였을 뿐만 아니라 한국 근대 여성미술의 역사가 시작되는 의미 있는 전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5천여명의 관객이 방문했을 정도로 화제가 되었습니다. 이후 나혜석의 작품 활동은 1922년에 시작된 조선미술전람회(조선미전)를 중심으로 소개됩니다. 조선미전은 조선총독부 주관으로 창설된 미술공모전으로, 나혜석은 제1회전부터 1932년에 개최된 제11회전까지 총 18점을 출품하였습니다. 1920년대에 그려진 농촌풍경화들은 거의 대부분이 망실되어 현재 사진으로만 나혜석의 화풍을 확인할 수 있는 안타까운 상황입니다. 


나혜석, <자화상>, 1928; <스페인 해수욕장>, 1928

나혜석은 1927년, 경도제국대학(현재 교토대학) 법과 출신의 변호사이자 일본 외무성 관리를 지냈던 남편 김우영과 유럽 여행을 시작합니다. (나혜석과 김우영은 1920년 정동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는데, 이미 당시에 거물급 인사였던 김우영과 신여성 나혜석의 결혼은 장안의 화제였습니다. 지인들에게 청첩장을 보내는 대신 청첩의 내용을 신문 광고로 알린 일보다 더 사람들을 놀라게 했던 것은 나혜석이 김우영에게 제시한 결혼 조건이었어요. 첫째, 평생 지금처럼 사랑해줄 것. 둘째,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하지 말 것. 셋째, 전처가 낳은 딸, 시어머니와 함께 살지 않을 것. 넷째, 동경 유학 시절 애인이었던 최승구의 묘지에 비석을 세워줄 것. 2020년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상당히 놀라운 제안이지요? 하지만 김우영은 나혜석의 조건을 모두 수락하는 동시에, 신혼여행을 최승구의 묘지가 있는 전라남도 고흥으로 다녀와 주변인들을 아연실색하게 만들었습니다.) 프랑스에 약 8개월간 체류하며 미술연구소에서 수업을 받았고, 남편과 함께 미국 여행까지 끝마친 후 1년 반 만에 귀국한 나혜석은 <자화상>과 <스페인 해수욕장> 등의 작품을 통해 파리에서 습득한 야수파의 화풍을 보여주었습니다.


그야말로 파격적인 행보를 이어갔던 나혜석의 삶은 순탄하게 흘러가지 않았습니다. 프랑스 체류 기간 당시 파리에서 외교관으로 주재하고 있던 (남편의 친구이기도 한) 최린과의 염문설이 발단이 되어, 나혜석은 1930년 김우영과 이혼하게 됩니다. 아이들을 생각해 남편의 마음을 돌리고자 했지만 김우영은 끝까지 나혜석의 간청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이후 재기를 위해 작품 활동과 전시, 후학 양성에 힘을 쏟았습니다. 하지만 나혜석의 모든 노력들은 세간의 냉소와 질타를 받았을 뿐,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기본적인 생활마저 불가능한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는 와중에 김우영의 지속적인 방해로 성인이 된 자녀들을 만나지도 못하게 된 나혜석은 점점 병들어가다 1948년 12월, 서울의 무연고자 병동에서 사망합니다. 53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 국내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의 사망은 “신원 미상, 무연고자… 사망원인 영양실조, 실어증, 중풍… 추정연령 65~66세”라는 비극적인 내용의 관보를 통해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연극 <나, 혜석>의 주인공 나혜석은 스스로에게 말합니다. “내 탓이 아니야, 내 잘못이 아니야.” 할 수만 있다면, 시대를 너무 앞서나간 탓에 외로웠던 그녀의 곁에 앉아 가만히 등을 토닥여주고 싶은 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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