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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샘 Mar 29. 2021

개팔자가 상팔자

 ‘하나님이 늘 지켜주신다’


연희동 단독주택에서 살 때의 일이다. 어느 순간 3마리의 개가 새끼를 낳다 보니 한 순간 우리 마당에 개가 11마리가 되었다. 말 그대로 개판이라고나 할까? 사람 수보다 개의 마리 수가 더 컸었다. 처음 그 지역으로 이사 갔을 때 나는 두 번 놀랐다. 처음에는 사람 사는 골목이 너무 한적해서 놀랬고, 두 번째는 어느 집의 개가 짖기 시작하면 적막하던 골목에 모든 개들이 짖기 시작하여 골목이 너무나 시끄러워짐에 놀랐었다. 그러던 골목에 우리 집이 어느 순간 이렇게 많은 개가 살게 되니 그 골목은 한순간도 조용해질 틈이 없었다.

그렇게 10여 년을 살다가 어찌어찌하여 우리는 아파트로 이사를 오게 되었고, 모든 강아지들은 제각각 새로운 주인을 찾아서 갈 길을 떠났다. 주택에 살 때는 조롱박을 키워서 수세미를 만들기도 하면서 이런저런 재미가 있었다. 아파트로 이사 오고 나니 늘 허전한 마음이 드는 것은 당연하고, 아이들은 개를 키우고 싶다고 하소연하기 시작했다. 사실 나는 어려서도 개를 집에서 키워본 적이 없어서 개를 만지는 것을 싫어한다. 아니 싫어하는 게 아니라 무서워서 못 만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가족의 성화에 못 이겨 동물병원에서 개 한 마리를 입양해왔다. 훗날 누군가가 이러한 결단은 엄청난 모성애의 발현이라는 말을 하였을 때 뒤늦은 거지만 ‘아, 이게 그런 거였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싫어하지만 아이들을 위하여 나의 모든 생활의 불편함을 감수하였다는 것이 정말 대단한 희생이었던 거 같기는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늘이!!!’


‘하나님이 늘 지켜주신다’ 이름도 아이들이 작명하였다. 그 하늘이가 이제 14살. 사람 수명으로는 80에 가까운 나이라고 한다. 지금까지는 크게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잘 살아왔는데~~~

며칠 전의 일이다.


하늘이에게 1순위는 우리 딸, 그 다음이 아들, 그리고 남편, 나는 투명인간. 딸이 휴가를 맞이하여 잠시 부산으로 여행을 떠났다. 그날 아침에도 하늘이는 남편과 소파에서 재롱떨며 잘 놀았다고 했다. 그런데 퇴근해서 돌아오니 하늘이가 이상했다. 고개는 거의 90도 정도로 돌아갔고, 다리는 기운이 없어서, 몸의 균형을 잡지를 못하고 여기저기 머리를 박으면서 몇 걸음도 못 걸었다. 눈의 초점은 없고, 숨을 몰아쉬면서 마치 사람으로 치면 풍 맞은 증세랑 똑같았다. 이 밤을 과연 잘 넘길 수 있을는지 걱정되었다. 우리 부부는 할 수 없이 여행 떠난 딸에게 연락하여 상황을 알렸다. 호텔과 KTX를 모두 예매해 놓은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일정을 포기하고 아침에 달려왔다. 사랑하는 하늘이를 위해서. 그때부터 우리 온 가족의 하늘이 병간호가 시작되었다. 네 식구가 교대로 시간을 맞춰서 아침에 병원으로 데려다주고 저녁에 찾아오고 등등. X-RAY를 찍고, 피검사를 하고, 하루 종일 링거를 맞고, 과연 하늘이가 이전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에 대해서는 모두가 회의적이었다. 

우리는 졸지에 장애견의 견주가 되었다. 만약 이 상황이 지속된다면 과연 우리 가족은 어떤 선택과 결정을 하여야 하는지 매우 고민이 되기 시작하였다. 네 식구의 일상적인 삶의 모습이 일단 달라져야 하고, 경제적 비용도 만만치 않고(물론 하늘이의 모든 비용은 딸과 아들의 몫이지만), 또 옆에서 하늘이의 아픔을 지켜봐야 하는 내 딸의 고통과 그러한 딸을 지켜봐야 하는 엄마의 아픔 등등 수업 시간에 학생들과 토론하면서 나누었던 여러 가지 문제가 생각났다.

동물권은 지켜져야 하는가? 애완견, 애완묘는 누구의 행복과 쾌락을 위해 존재하는 건가? 동물의 안락사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그날 나는 이러한 딜레마 상황이 윤리학에서 매우 중요하게 다루는 주제와 관련되어서 수업 시간에 이러한 상황을 가지고 학생들과 생생한 토론을 했다. 학생들 중에는 자신도 이와 비슷한 경험을 했노라 하면서 그때의 상황에 몰입되어 울기도 하였고, 어떤 학생은 하늘이의 고통을 생각하면서 인간이 집착하고 있을 수도 있다고 하늘이를 편안하게 해주는 선택을 해야 한다고 이야기하기도 하였다. 정답은 없는, 하지만 매우 진지한 토론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리고 짧은 방학을 맞이하였다. 학생들에게는 개학 후에 “to be continue!!!!”를 약속하였다. 하지만 내심은 두려웠다. 어떤 결정을 내리더라도 그 결과는 슬픈 결말일 거 같아서.

온 가족이 정말 지극정성으로 하늘이를 간호했다. 정말 집 안에 환자 한 명이 있을 때의 상황과 거의 흡사했다. 퇴근길에는 누군가가 병원에서 하늘이를 찾아서 집에 데리고 오고, 하늘이 사료를 믹서에 곱게 갈아 통조림과 섞어서 먹였다. 우리 아이들 이유식 만들어 먹일 때 이후로 이게 몇십 년 만의 일인가 싶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늘이의 상태는 쉽게 호전되지 않았다. 누구도 말은 밖으로 안 뱉었지만 어느 날 밤에는 하늘이가 너무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렇게 하늘이는 하늘나라에 가는구나 싶은 생각을 모두가 하기도 하였다. 딸아이도 자고 있는 남동생을 깨워야 하는 거 아니냐고 마지막을 함께해야 하지 않냐고 조심스레 얘기하였다.

반전! 하늘이도 우리 가족의 정성에 감화받았는지 고개가 조금씩 돌아오고 있었다. 90도에서 55도, 45도 조금씩 조금씩 돌아오더니 이제는 약 5도 정도만 고개가 기울어져있다. 휴우~~~ 그리고 이제는 먹는 것도 정상이고 자연스러운 노화 현상만 있을 뿐이다. 다만 병치레 끝에 오는 어리광이라고나 할까? 어리광인지 치매인지 헷갈리는 ‘분별력 없음’만이 남아있다. 그 정도는 감수해야지. 이제 몸은 거의 정상이라고 봐야 할 것 같다.

오늘도 딸아이가 돌아올 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망부석처럼 현관에 꽈리 틀고 앉아있는 모습을 보면 이제 모든 것이 이전과 같아졌다.


하늘아~~~ 이 땅에 사는 날까지 아프지 말고 잘 지내자.

너와 우리 가족 모두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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