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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샘 Sep 20. 2023

내 생애 최고의 선물

***님께 아호를 지어드림에  붙이는 글’을 받고서

  아주 오래전 남편이 중국 출장길에 사다 준 작은 옥돌, 낙관을 새기는 돌이 있다. 인사동을 걸을 때마다 나도 누군가처럼 멋지게 호를 갖고 그것을 새긴 낙관이라는 것을 갖고 싶었다. 그러나 삶이 지극히 평범하고 뚜렷한 족적도 없는 나 같은 사람이 호를 갖는다는 것은 또 하나의 지적 사치라는 생각이 들면서 주저하곤 했었다. 낙관을 새길만한 명분이 없었다. 그렇다고 지어놓은 호도 없었다. 그저 새긴다면 나의 소장 도서에 ‘이 책은 제 것입니다.’ 정도의 의미로나 쓰일 수밖에 없었다. 책도 돌고 도는 것이지 영원한 나의 것은 아니지 싶어 별 의미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 나는 캘리그라피에 빠져들기 시작하여 글씨 쓰는 재미를 느끼고 있다. 소녀 시절 조금 맛보았던 붓글씨가 중년이 되어 새롭게 재탄생되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정형화된 누구누구의 글씨체를 따라 쓰는 것이 아니라, 어느 봄 날에는 소녀적 감성에 젖어, 어떨 때는 쉰 인생을 살아온 나름의 아줌마의 배짱으로 한 획 한 획 하얀 화선지의 공간을 넘나들면서 글씨를 써본다. 나의 지금까지의 삶의 면면이 녹아드는 것 같다고나 할까?

그래 이 참에 나도 다른 작가들처럼 호를 하나 가져보자. 저녁 산책길마다 좋은 글자 멋진 단어 많이 생각해보았지만 딱히~~~ 나의 창작 실력으로는 만족스럽지가 않았다. 누군가가 멋진 호를 지어주면 좋겠는데? 국어 선생님이자 시인이신 김 선생님께? 아님 주변에 요즘 소위 잘 나간다는 ‘블랜드 네이밍’하는 이 작가님께?


심리학 용어에 내 마음의 자아를 네 개의 창으로 설명하는 ‘죠하리의 창’이라는 이론이 있다. 나도 알고 상대도 아는 나, 나는 모르지만 남이 아는 나, 나는 알지만 상대방은 모르는 나, 나도 모르고 상대방도 모르는 나로 나에 대한 영역을 나누어 설명하는 이론이다. 건강한 자기 노출과 피드백을 통해 나와 남이 공유하는 영역이 넓어질수록 인간관계가 원만하다는 설명이다.

단발머리 어린 시절과 나의 교사로서의 삶, 그리고 지금의 삶까지 알고 있는 사람. 그런 분이 나의 호를 지어주면 정말 의미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맞다! 박인기 선생님. 중학교 때 은사님이고 내가 늦깎이 대학원생이 되어 논문을 써서 보내드렸을 때 가장 기뻐해 주시고 격려해주신 선생님. 최근에도 간간이 서로 소식 전하면서 그 옛날 풋내 나는 중학교 철부지 여학생과 사대를 갓 졸업하고 첫 발령받은 학교에서 초임교사로 누린 옛 추억을 회상하는 관계, 쉽지 않은 관계일 것 같기는 하다.

늙은 제자의 부탁에 그것도 카톡으로 남긴 부탁을 내가 느끼기에도 마치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조금도 망설임 없이 나의 이 어려운 청을 들어주신 나의 선생님!! 나는 너무 행복하다. 추석 전 날 이 일 저 일로 분주하던 참에 두 개의 호와 작호의 배경을 메일로 보내주시겠다는 말씀과 함께 날아온 메일 한통, 나는 흥분되어 쉽게 열어보지 못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몸과 맘을 정갈하게 하고 받아야 할 것 같아서~~~


‘*** 님께 아호를 지어드림에 붙이는 글’


국문과 교수님의 지적 향기가 전해져서라기보다 나에 대한 따뜻한 격려와 애정을 담은 사랑으로 느껴져 눈시울이 붉어졌다. 추석 전날에, 나는 지금까지 나의 삶에 있었던 추석 선물을 추억해본다. 종로 큰 아버지, 반포 할머니, 구로동 할머니, 우리 집안은 어르신들을 그렇게 호칭했다. 명절 때마다 인사 가서 빳빳한 새 돈을 받아 들고 좋아했던 기억들. 그 외 여러 가지 감사와 정을 나누던 선물이 종종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 이런 일이, 나에게 이런 일이, 이보다 더 큰 추석 선물이 있을까? 나의 중학교 시절을 나보다 더 상세히 기억하시면서 모교에서의 30년 교사 생활에서 겪었던 고뇌, 안타까움, 시아버님의 소천과 동시에 일어난 아들의 아픔과 대학 합격 등 최근의 기쁨과 고난도 함께 기뻐해 주시고 위로해주셨던 선생님. 이 모든 나의 삶의 궤적을 아시고 보내주신 글. 너무 감사합니다.


‘소향(小享)’ ‘추월(隹月)’


‘작을 소’ ‘누릴 향’. 

그래 나는 작다. 어린 시절부터 작은 키가 나에게는 커다란 콤플렉스였다. 선생님도 잘 아시는 중학교 시절 나의 친구들은 모두 키가 170을 훌쩍 넘는 아이들이다. 그 속에서 나는 더더욱 너무나 작은 아이일 수밖에 없었다. 나는 프로이드의 방어기제를 발동하여 무의식적으로 ‘작은 키, 넓은 맘’을 되뇌며 산건 아닌지. 조그만 아이가 맘 쓰는 게 달라, 공부도 쫌 하네? 또한 그 속에서 나는 정말 선생님의 말씀대로 안분지족의 삶을 체득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 나는 모든 게 감사하다. 지난 일들을 모두 웃으며 감사하면서 추억할 수 있는 나, 지금 이대로의 나. 오늘도 성묫길 차 안에서 나눈 이야기 “엄마는 그래도 행복해,” 우리 아들이 선생님께서 보내주신 글을 읽고 이야기한다. “엄마, 아까 차 안에서 나눈 그 이야기잖아?” 그래 나의 지금의 감사를 선생님이 이렇게 꿰뚫어 보셨지? “소향” 너무 감사하다. 딱 나의 맘과 생각의 결정체이다.


‘새 추’ ‘달 월’ 

내가 30년 간 몸 담고 있는 나의 모교 이름. 나의 모교에 대한 애증을 누구보다 공감해주셨던 선생님, 나의 모교에 대한 사랑을 담아서 모교의 교명의 한자를 파자(破字)하여 추(隹), 월(月). 

학생으로서 3년, 교사로서 30년을 담아내 세상에 없는 단어 ‘추월’을 만들어주셨다. 꼬리가 작은 꾀꼬리나 종달새 같은 새, 그래 나의 이미지도 공작이나 두루미같은 큰 새는 아니지 (흑흑 부정할 수 없는 현상이니~~) 그런 작은 새가 달을 스치며 날아가는 이미지라? 너무 멋지다. 나의 모교 교표는 바다를 끝없이 항해하며 나아가는 돛단배의 이미지를 형상화한 것인데, 이제는 나의 모교가 바다뿐만 아니라 하늘도 꿰차고 비상하는 학교가 되었으면 하는 맘을 더해본다. 

학생들에게도 말하고 싶다. 바다를 끝없이 항해하며 나아가는 우리 학교는 이제 개교 110주년까지의 학교이고, 이제 하늘을 나는 작은 새 4만여 동문이 달을 스치듯 날아가며 만드는 학교는 너희들의 몫이라고~~~


이 감동, 이 감사 어찌 나의 짧은 언어로 표현할 수 있을까? 중언부언일 뿐이다. 오직 부족한 제자의 글솜씨를 헤아리며 오직 이 마음이 이심전심으로 선생님께 온전하게 다가가길 기대하면서~~~ 오늘은 교수님을 대신해서 남편과 막걸리 잔이라도 부딪치며 이 감동을 느끼러... 고고 씽!

외치고 싶다. 나보다 더 행복한 사람 있냐고?

선생님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열심히 살겠습니다.

 

2015년 한가위에 곰배령에서 ***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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