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amilo Sep 23. 2020

새벽 네 시

밤이 깊은 건지 날이 밝는 건지 모를 그 시간처럼

 9월 22일 오전 7시 반, 책상 앞에 앉는다. 스페인어 전공자의 고등학교 수학 문제 풀이가 시작된다. 영 속도가 나지 않아 답답하지만 여유 부릴 시간이 없다. 온갖 잡동사니가 담긴 상자에 무엇이 있었는지도 기억나지 않을 때쯤 문득 떠올라 온종일 상자를 뒤지듯 머릿속을 헤집어가며 숫자와 공식들을 조합해 보지만 역부족이다. 그렇게 출근 직전까지 점심 한 끼 챙겨 먹는 것을 제외하고는 문제만 풀다가 두 시 반이 되어서야 집을 나선다. 세 시 반부터 밤 열 시 반까지 물 한 잔 마시는 것도, 화장실 한 번 가는 것조차 쉽사리 허용되지 않는(자유를 박탈당한 것은 아니나 5분도 채 쉬지 못하며 빡빡하게 돌아가는 일정을 소화해야 하기에) 월급제 수학 강사의 일과가 시작된다. 아직 풀지 못한 문제의 질문이 나오지 않기를 바라며, 오늘만 무사히 넘어가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하루살이처럼 하루를 버티고 나면 곧바로 새로운 업무가 주어진다.

 퇴근 직전 주어지는 수 백개의 새로운 문제들, 당장 내일까지 준비해야 하는 문제들을 떠안고 부랴 부랴 집으로 돌아왔지만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나면 더 이상 움직일 힘이 없다. 그렇게 잠시 몸에 힘을 빼고 앉아 있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집에 들어가니 12시가 넘어 씻기를 포기하고 작업을 시작하기로 한다. 점점 짜증이 날 때쯤 고작 한 끼 먹고 먹은 게 없어 그런 것 같은 생각이 났으나 마땅히 챙겨 먹을 것도, 시간도 없어 끓여 먹는 것보다 부셔 먹는 일이 많게 된 라면을 입에 물고 계속 작업한다.



 두 시, 세 시, 네 시가 다 되어 가는데 아직 더디다. 겨우 또 하루 버틸 만큼의 분량만 준비됐을 뿐이다. 그것도 확신할 순 없다. 수업 당일, 수업 시간 직전에도 다른 내용으로 바뀌곤 하는 커리큘럼을 따라가는 것은 15년 이상 손 놓은 수학을 서른넷의 나이에 다시 시작하는 언어 전공자에게 있어서 쉬운 일은 아님이 분명하다.

 잠시 쉬기로 한다. 일요일마저 11시부터 6시까지 풀타임으로 보충을 하면서 일주일 내내 쉬는 날 없이 일만 하고 있는 것이 슬슬 화가 날 것 같아 일단 씻고 온다. 도대체 마음 편히 앉아서 책 한 소절 읽고, 글 한 편 쓸 시간은 언제 나는가 싶어서 다 접어두고 뭐라도 쓰려고 자리를 잡고 앉으니 이제야 조금 살 것 같다. 당장 몇 시간 후 지친 몸을 이끌고 출근해야 하고, 또 이번 주 일요일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일하러 가야 한다는 사실은 잊기로 하고 글에 집중해본다.


 새벽 네 시, 밤이 깊은 것인지 날이 밝는 것인지 모를 이 시간에도, 역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그 시간처럼 내게 다가와준 너였어. 깊어 가는 밤처럼 내 인생에 어둠이 짙어져 갈 무렵,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할지 모를 그때에 너를 만나 내 마음이 밝아오기 시작했지.

 내가 가장 환하게 웃은 것도, 가장 서럽게 울어본 것도, 가장 큰 다짐과 결심을 했던 것도, 시험 기간에도 절대 밤새워 공부하지 않던 내가 이렇게 밤을 새워 가며 일을 할 수 있는 것도, 일주일에 한 통 씩 네게 편지를 쓰는 것도, 77일째 매일 너를 생각하며 일기를 쓴 것도, 그리고 가장 행복한 것도 모두 너를 만나 가능한 것들이었어.

 그런 네게 일이 좀 힘들다고 푸념을 늘어놓은 것이 너를 걱정시키고 불안하게 했을까 너무 미안한 마음이 들었어. 그런데 힘든 하루 끝에 생각나는 유일한 사람이 너라서, 그저 네 목소리를 듣는 것이 위로가 될까 싶어서 결국은 너를 찾게 된 거야. 그럴 때마다 내 편이 되어 주고, 내게 큰 힘이 되어 주는 네가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 나도 네게 그런 사람이었으면 좋겠어.

 널 볼 때마다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왜 그렇게 귀여운 건지 도무지 풀리지 않는 수학 문제보다도 더 모르겠어. 깊어 가는 밤처럼 너를 향한 내 사랑도 깊어 가고, 또 날이 밝아 오듯 너를 담은 내 눈동자도 밝게 빛나. 밤이 깊은 건지 날이 밝은 건지 몰라도 상관없어. 이 시간 오롯이 너를 생각하고, 너를 그릴 수 있다는 것 하나 만으로도 내겐 소중한 시간이자 살아있음을 느끼는 시간이니까. 수 천 번, 수 만 번을 외쳐도 부족할 한 마디를 네게 말하기 위해서 나는 오늘 내게 주어진 일들도, 내가 해야 할 것들도 잘 해낼 거야. 그리고 하루의 시작과 끝에서 네게 고백할 거야. “사랑해.”


 새벽 6시, 그녀의 알람이 울리는 시간. 나의 9월 22일 끝자락에서 그녀의 9월 23일이 시작되고 있다. 나는 오늘도 알찬 하루를 보내기로 다짐한다. 오늘의 끝자락에서 우리 다시 만나기를 기대하며.

매거진의 이전글 나는 살아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