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살 소년의 전쟁에 대한 관심이 일으킨 질문들
애국심, 전쟁, 조국, 희생. 나에게는 고리타분한 단어들이 되었다. 누군가 이런 단어에 가슴이 뛴다고 면, 친하게 지내고 싶지 않다. 국가에 대한 소속감을 느낄 땐 올림픽과 같은 국제 스포츠 경기를 할 때 뿐이다. 그마저도 예전보다 훨씬 옅어졌다. 우리나라와 다른 나라의 경쟁이라기 보다는 선수들끼리 실력을 겨누는 장 정도로 인식하고 있다. 우리나라 선수에 더 친근감을 가지고 응원하기는 하지만.
‘전쟁’이라는 단어 자체에 반감이 앞서는 나와 달리 여덟 살 남자 아이에게는 매력적인 주제다. 이준이와 또래 친구들을 보면 자기의 작은 체구와 약한 힘을 대체해줄 수 있어 보이는 존재들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공룡, 자동차, 총과 칼, 슈퍼 히어로, 괴물, 사나운 동물들을 무서워하면서도 동시에 선망한다. 두려움의 크기 만큼 매력을 느끼는 듯 하다.
이기고 지는 힘의 경쟁 세계를 아직은, 아니 앞으로도 아예 몰랐으면 하는 터무니 없는 내 희망사항을 알 리 없는 이준이는 종종 자신이 만든 무기를 들고 나에게 덤벼든다. ‘싸우자!’ 레고 블록으로도 전투기, 탱크 등 전쟁용 이동 수단을 주로 만든다. 자기가 개발한 새로운 기술을 적용해 전투력을 높이면서.
첫번째 전시를 준비하면서 이준이가 불러준 대로 타이핑한 서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대표적인 큰 전쟁은 세계대전입니다. 세계대전 이후로 나라들이 많은 게 바뀌었습니다. 여러분은 탱크와 잠수함과 배 같은 움직이는 것들을 무기로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전쟁하면서 발전한 현대 무기입니다.” 전쟁을 통해 진보한 기술들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전쟁과 싸움의 요소는 이준의 하루 곳곳에도 깃들어 있다. 뭐든 더 크고 높게 만들고 싶어 하고, 게임에서 지기 싫어하고, 학교에서 받는 칭찬 스티커 개수로 친구들과 비교하며 뿌듯해하는 이준이의 모습들. 나는 일순간 불편해진다.
여덟 살 소년의 이런 호전적인 특성은 사회화가 덜 된 인간의 본능적인 모습인 걸까, 오히려 자신이 속한 경쟁 사회의 속성을 온몸으로 흡수한 결과일까.
나에게도 그런 때가 있었을려나. 보통 사람들에 비해 어린 시절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편이라서 내가 뭐를 좋아했었는지 떠올리지 못한다. 이준만큼 뚜렷한 취향을 가지지 못했던 탓일지도 모른다. 사촌 언니에게 물려받은 바비 인형, 그리고 요샛말로 ‘얼리어답터’이자 ‘키덜트’였던 아빠가 선물해준 닌텐도 게임기, 무선 조종 자동차를 가지고 놀았던 기억만 남아있다.
전쟁에 직접적으로 관련된 놀이를 즐긴 기억은 거의 없다. 기껏해야 전쟁과 무관한 고무줄 뛰기 놀이를 하면서 ‘전후의 시체를 넘고 넘어’라는 무시무시한 노래를 아무렇지 않게 부른 것 밖에. 놀이터 모래밭에서 주운 비비탄 총알을 소꿉놀이 재료 삼아 놀았고, 학교 운동회에서 전교생이 참여해야 했던 기마전이 전쟁의 흔적이 가장 많이 남아있던 놀이였다. 이제는 더이상 필수 종목이 아니지 않았을까.
전쟁 세대의 손주 격인 나는 자라면서 전쟁 속 영웅담 보다는 전쟁을 겪은 보통 사람들의 고통과 슬픔을 담은 이야기를 더 많이 접하면서 자랐다. 청소년용으로 편집된 <안네의 일기>와 <전쟁과 평화>를 읽었고,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를 봤다. 무슨 의미를 지닌 작품인지 제대로 이해는 못했지만, 작품 이면에 흐르는 암울한 분위기는 감지했던 기억은 어렴풋이 난다.
다른 한편으로는 위인전도 읽었다. 우리나라를 위해 한몸 기꺼이 희생했던 위인들, 학문적인 업적을 남긴 위인들. 전쟁에서 승리한 위인들. 나라를 훌륭하게 다스렸던 위인들. 책장 두 칸을 빼곡히 차지했던 국내외 위인전을 여러 번 반복해서 읽으면서 자연스레 나도 ‘위인’이 되는 꿈을 꿨다.
그중에서도 유난히 좋아했던 위인은 유관순. 나와 같은 성씨를 가진 데다 여성 위인이 많지 않아서 그랬다. 업적을 이룬 나이와 그 당시 내 나이 차가 적어서 더 가깝게 느껴지기도 했다. 열 일곱 살이 되면, 나라를 위해 용기 있게 나설 수 있는 여고생이 되리라 생각했던 것 같다.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일 줄 모르고서.
나의 열 여덟살은 투쟁이나 용기보다는 수능 성적을 잘 받기 위한 노력이 중요했다. 수업 시간에 위안부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접하고서 분노하는 정도에 그쳤고, 국력을 키워야 된다며 외교관이 되겠다는 꿈을 동력 삼아 공부를 열심히 했다. 그 연장선으로 대학교에서 국제 관계학 전공을 선택하면서 국제 기구에서 활약하는 꿈으로 이어졌다.
꿈의 기저에 흐르고 있던 욕망을 그때는 알지 못했지만, 지금와서 돌이켜보면 세상을 바꾸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 같다. 우리나라를 너머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는 영향력 있는 사람. 위인전에 남을 만한 위대한 사람. 이준이처럼 전쟁과 싸움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내가 얻고 싶었던 것 역시 강한 힘이었다. 나를, 우리나라를 더 강하게 해줄 수 있는 힘.
전쟁의 잔재는 시간이 흘러도 대물림 된다. 전쟁 세대의 증손주 격인 이준이가 ‘전쟁’이라늦 주제 안에서 가장 주목하는 대목 역시 일제 시대의 독립전쟁이다. 등하교 전후로 들르는 돌봄교실에서 읽기 시작한 <독립운동가 100인 만화> 시리즈에 푹 빠져 나는 들어본 적 없었던 독립군의 장군들 이름을 줄줄이 왼다.
일본 선수와 경쟁하는 운동 경기에 더 몰입해서 응원하고, 일장기에 들어간 붉은 색은 보드게임 말을 선택할 때 거르고, 우리나라가 일본의 경제를 앞질렀다는 기사에 안도하는 여덟 살의 모습을 보면, 역사가 한 인간의 마음에 스며드는 과정이 기묘하다. 며칠 전 아베 전 총리의 암살 사건 소식을 듣고는 ‘오예!’를 외치는 이준의 반응이 어린 아이 것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내가 딱 이준이 만할 때 김일성 사망 소식을 텔레비전 뉴스에서 보고도 비슷한 마음이었던 기억이 난다. ‘이제 통일이 되는구나’ 생각했지만, 30년이 지난 지금도 통일은 요원하다. 두차례의 세계대전이 끝나고, 소련이 해체되었을 때에도 ‘세계 평화가 찾아왔구나’ 생각했을 것이다. 지금 이시각에도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상대로 공격을 퍼붓고 있다.
이제는 국가와 개인을 동일시하는 반응을 당연시 여기지는 않는다. 이번 우크라이나 전쟁 초기부터 두달 동안 한 가족이 경험한 일련의 일들을 생생하게 기록한 <전쟁일기>의 저자 올가 그레벤니크는 피난하며 폴란드에서 만난 러시아 여자를 향한 사람들의 비난을 타당하지 않다고 여긴다.
폴란드에서 30년째 살고 있는 러시아 여자가 표 끊는 걸 도와줬다. 홈페이지상에서 강아지 동반 표 예매가 안 되어서 전화로 예약해야만 했다. 그녀는 폴란드에서 러시아어를 가르친다. 전쟁이 터진 이후 여러 친구가 그녀에게서 등을 돌렸다. 이건 옳지 않아. 사람은 ‘민족 소속’이 아닌데. 어제 난 그녀의 얼굴에서 ‘수호천사를 보았다.
이준에게도 타일렀다. 아무리 악행을 저지른 나라의 사람이라도 죽음을 기뻐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도시락 폭탄을 던진 윤봉길 의사, 이도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의 영웅담을 좋아하는 이준이는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나도 헷갈린다. 만일 지금 이 시대에 윤봉길, 안중근이 나타난다면, 위인으로 추앙받을 수 있을까.
세계대전을 겪은 여성들의 목소리를 담은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속에서는 적에 대한 반감이 곳곳에 드러나있다. 적군의 죽음과 고통에 희열을 느꼈던 노골적인 증언들.
우리는 포로를 붙잡아 부대로 끌고 갔어... 우리는 놈들을 쏘지 않았어. 그건 놈들에게 너무 쉬운 죽음이 될 테니까. 우리는 놈들에게 총을 꽂을 수 있는 만큼 마구 꽂고 돼지처럼 조각조각 썰어버렸어. 나는 그걸 다 지켜봤어... 아, 얼마나 기다려온 순간이었는지! 정말 오래도 기다렸지. 고통에 못 이긴 놈들의 눈이 튀어나오고... 눈알이 터지는 그 순간을.
하지만 나는 아직 아무것도 용서하지 않았어. 용서가 안 돼... 포로로 잡힌 독일군들을 봤을 때 정말 기뻤지. 놈들이 처량한 신세가 된 게 너무 좋았어. 발엔 군화도 없이 발싸개만 감고, 머리에도 머릿수건만 두르고 있는 꼴이 보기만 해도 좋더라고...
전쟁을 직접 경험하지 못한 나로서는 그들을 향해 인류애란 찾아볼 수 없다며 잔인성을 비난할 수만은 없다. 오히려 전쟁이 한 인간에게 남기는 참혹한 결과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소중한 증언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나의 의문점은 여기에 있다. 한 세기 만에도 시대 정신이 이렇게 바뀌는데, 역사로부터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게 있을까.
역사가 제러미 블랙는 자신의 저서 <거의 모든 전쟁의 역사>에서 전쟁사가 지금까지 서구 중심으로 조명되어온 탓에 인류가 전쟁을 일으키는 다양한 요소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다고 짚는다. 물질 문화, 무기의 기술력에 관심이 치우쳐 있는 전쟁사의 ‘탈중심화’를 시도하면서 “전쟁을 단일하거나 ‘참’되거나 본질적인 상태가 아니라 경험의 연속체로서 다루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 요점은 —다른 생물종을 상대할 때와 달리, 한 생물종 내에서는 확실히— 군사 역량에서 뚜렷한 위계가 없다는 것이다. 그보다는 판이한 과업과 자연・인문 환경에 의해 제시된 다양한 도전과 응전이 존재하는 만큼 전쟁은 질문의 매개체이지 답안은 아닌 것이다.
세대를 거쳐 물려받으며 간접적으로 경험한 전쟁이 우리에게 명쾌한 ‘답’을 주지는 못한다. 그런 관점에서 확신에 찬 혐오감이나 적대감은 경계해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 특히 한 개인에게 적대감을 쏟아붓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는 윤리의식을 갖게된 것은 전쟁을 겪은 앞 세대가 던진 수많은 질문 덕분에 물려받은 유산이다.
이준이는 우주 건축가를 꿈꾼다. 그전에는 경찰, 군인이 되고 싶다고 했다. 제복을 입고 무기를 지닌 강력한 존재가 되고 싶었던 욕망은 새로운 세계를 개척하는 욕망으로 옮겨갔다. 우주에 건물과 도시를 짓고 싶은 이유는 기후 온난화, 전염병 등으로 점점 위태로워지는 지구를 벗어나고 싶어서다. 비슷한 욕망을 아이들이 많다면, 머지않아 ‘우주 전쟁’을 준비해야 할지도 모른다.
강한 힘을 선망하고 전쟁에 매력을 느끼며 역사로부터 적대감을 물려받은 이준이의 지금 이시간이 무용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인간이 가진 결핍을 채우고자 하는 욕망이 과거와 미래를 우리가 지금 승차해 있는 ‘현재’라는 기차칸과 이어주는 강력한 연결고리가 될 수 있다. 다만, 과거-현재-미래가 연결된 이준이의 기차가 멈추지 않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게 해줄 질문들이 필요하다. 나에게도 마찬가지다.
내가 읽은 책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저
<전쟁일기>, 올가 그레벤니크 저
<거의 모든 전쟁의 역사>, 제러미 블랙 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