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2025 월요일

가족사

by 윤준희


새벽 5시 즈음이였나, 형에게 연락이 왔다.


2011년 11월 3일.


엄마가 위독하니 병원으로 와야겠다고.


부천 집에서 차를 몰고 잠실 아산병원까지 간다.


그 이른 새벽에 깜깜한 올림픽대로를 메우고 있는 차들 사이에 낑겨서,


마음의 준비를 한다. 준비하나마나, 이미 아무 생각도 할 여력이 없다.


엄마는 간이식 후 대략 1년 7개월 정도를 더 사셨다.


그중에 7개월은 병원에서, 그 중에 2개월 가량은 혼수상태로 계셨다.


박사과정이 마무리되던 2008년, 형에게 연락이 왔다.


엄마가 피를 토했다고. 형이 없는 사이에, 엄마 혼자서. 식도 정맥류라 하나.


사망률이 40%라고 하는데, 다행히도 그 고비는 넘기신 셈이였다.


부랴부랴 한국에 갔다. 간 이식을 받으셔야 한다고 한다.


형은 간염 보균자라 기증이 안된단다. 난 그때 1차 간기증 가능 검사를 받았다.


그 간에 직점 꽂아서 하는 샘플검사가 아직도 짜릿하게 기억이 난다. 얼굴이 반사적으로 찡그려지는.


아주 보기좋게 통과했다.


엄마는 거부했다. 당신은 건강하니 얼른 돌아가서 박사 마무리 하라고.


그때 기증 받았으면 지금 엄마는 아주 멀쩡하실 확률이 크다. 76세로서.


2009년. 디펜스 며칠 전부터, 형에게 새벽 4시에 전화가 오기 시작했다.


형은 형대로 지치고 다급한 목소리. 의사가 이제 늦었다고 요양하시다 가시라 했단다.


엄마는 그때도 간기증을 거부했다.


그때부터는 혼란의 시작이였다. 미국에 남아서 박사 마무리하고 취직준비를 해야하는지, 한국에 가서 간기증을 해야하는지, 아니 한국에 다시 가서 정착해야 하는지, 이번에 가면 돌아올 수 있는 비자도 돈도 없는데 어쩌나.


거기서 2010년 1월까지 또 6개월을 끌었다.


금융위기 한참때였다. 취직은 개뿔. 학교에서 무급 리서쳐 자리 만드는것도 불가능하다.


형에게 다시 전화가 왔다. 이젠 정말 돌아와야 한다. 엄마 끌고가서라도 아무리 늦었더라도 간이식을 해야한다고.


그래서 짐을 쌌다. 아파트, 차, 남은 가재도구까지 다 후배에게 넘기고.


그 구두약 냄새, 강아지 응차냄새가 뒤섞인 부천 아파트 현관에서 엄마를 다시 봤다.


복수가 차서 부어오른 배, 황달과 단백질 부족으로 쭈그러진 얼굴, 그리고 잇몸에서 배어나오는 피.


그래도 엄마는 엄마였다. 근 8년간을 미국과 한국을 오고가는 나를 여느때처럼 맞이했다.


그날 바로 얘기했다. 간기증 하러 왔다고. 엄마는 바로 흐느꼈다.


그 이후부터는 일사천리로 진행됬다. 나는 다행히도 기증엔 문제 없었고.


간이식 수술은 성공적이였다.


8시간동안 했다던데, 난 그 시간이 어떻게 갔는지 전혀 모른다. 아마도 임사체험이랑 가장 비슷한것 아닐까.


쭉 갈라진 배를 스테이플러로 프랑켄슈타인마냥 박아놓았다. 줄줄이 걸려있는 몰핀과 수액들.


처음 며칠은 좀 아팠으나, 어떻게 버티면서 넘어갔다.


나중에 형이 수술때 꺼낸 엄마의 간 사진을 보여줬다. 이게 간인지 뭔지 알수 없을정도로 말라 비틀어진 간에 여기저기 붙어있는 암덩어리들.


놀라운건 엄마였다. 중환자실에서 옮겨지자마자 갑자기 멀쩡해지신 분.


못하던 식사를 거의 흡입하시고.


회사 운영은 무리시라, 그 전부터 그랬지만 이제 형이 회사를 맡아서 운영한다.


1992년 10월 7일.


아직은 후덥지근한 날이였다. 고등학교 2학년이였다.


저녁 8시 즈음이였던듯 하다. 열어놓은 창문과 매캐한 담배냄새가 배어있는 재떨이 쟁반 옆에서,


엄마가 갑자기 형이랑 나를 나와보라고 한다.


아빠가 찬물로 샤워를 하고 나서 갑자기 아프다고 한다.


아빠의 짧고 뭉툭한 손가락이 차다. 약간 보라색 빛이기도.


그때로 여느때처럼, 아빠는 병원에 가기를 거부했다. 병원 안 가고 약 안먹는게 건강의 상징으로 생각하시던 분.


아빠에게 말했다. 지금은 참으시더라도 꼭 내일 병원에 가 보시라고. 그게 아빠에게 내가 말한 마지막 문장이였다.


거실에서 웅크리고 계시다가 안방 침대로 가셨다. 거기서 끙끙 앓으시더니 더이상 못 참겠다고 외삼촌을 불러달라고 한다. 그냥 앰뷸런스를 부르면 되는데.


바로 심근경색이 왔다. 컥 하면서.


보라색으로 부풀어오르는 얼굴, 방금 드신 건빵이 입에서 줄줄 점액이되어 새어나오는.


엄마는 묵주를 들고 성수를 뿌리며 옆에서 통곡하고 있고, 형은 119에 전화를 걸어 앰뷸런스를 부른다.


동네 응급실로 갔다. 의사가 말하기를 이미 운명하셨습니다.


샤워 전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양반이.


아무런 준비도 없이, 한순간에 가셨다. 향년 50세. 지금 내 나이다.


자 이제 우리는 어떡하나.


아빠는 1.4 후퇴때 흥남철수에서 미군 밀가루 수송선을 타고 내려오셨다. 9살때. 이북내기다.


아침에 일어나면 배 바닥에 깔려있던 밀가루 덕분에 사람들 얼굴이 다 허얬다고 한다.


이북에서 빨간 지폐를 들고 오셨다는데, 남한에서 안 쓰인다는걸 알고 부산 앞바다에 쏟아버렸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7형제인가 이였는데 피난가는 와중에 폭격맞아 여러분 가시고 아빠, 고모, 그리고 할머니만 남았단다.


할머니께서 국제시장에서 장사를 하셨다 한다. 아빠는 경남고를 다니셨다. 지금은 어디 있는지 모르겠는데, 아빠 고등학교 졸업앨범을 봤다. 그때나 이때나 인상은 강렬하신 분.


국제시장 화재가 나서 다시 한번 가산은 날아갔고, 그 얼마 후에 할머니는 돌아가셨다 한다. 아빠 고등학교 1학년 때. 아빠 친구랑 같이 엄마를 뒷산에 매장했다고 한다.


그리고 졸업 후 혈혈단신 서울로 올라와 세운상가 마찌꼬바에서 선반 하나 갖다놓고 기계 가공 시작한 것이 지금 우리 패밀리 비즈니스의 시작이다.


1986년. 아마도 아빠 인생 최고의 년도.


목동 신시가지 아파트에 당첨됬다. 하루에 열몇번씩 전화오는 부동산 직원들. 집 팔라고. 거의 같은시기에, 드디어 남의 공장 건물에 몇 평 임대해서 기계 몇대 갖다놓고 작업하던 아빠 회사가 사옥을 구매했다. 부천에. 그때 살던 당산동 아파트에서 줄자 갖고 여기저기 길이 재며 새 아파트가 지금것에 비해 얼마나 큰지 감탄하던 엄마 아빠.


그리고 아마도 90년이였나, 새로운 기계부품 개발을 시작했다. 설비를 도입했다. 그리고 중국산이 밀려들어왔다. 중국산 이전에 설비를 운영할 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사기라면 사기다. 그 때 빚이 6억이였다. 지금돈으로 22억 가량 될거다.


그때 전후로 아빠 안색이 급격히 굳어지기 시작했다. 아빠의 전성기는 그렇게 빨리 저물수가 있나. 이렇게 아빠는 가시고, 6억의 빚과 쓸모없는 설비를 떠안고 엄마는 그 회사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엄마의 영웅담 시작이다.


먼저 쓸모없는 설비를 처분했다. 얼마나 환불받았는지는 모른다. 그 설비 공급 사장이랑 몇달동안 싸운건 기억난다.


중장비 제조 대기업에 영업을 뚫기 시작했다. 주로 임원 부인들에게 판화를 선물해가며.


집에와서 울던 엄마는 꽤 여러번 봤다.


과장 이상 간부급을 16년 기간동안 세네번 물갈이 한것 같다.


기대, 실망, 배신, 분노의 무한 반복.


영원히 안 끝날것 같던 고난. 목동 아파트도 팔아서 빚을 갚아야 했다. 엄마의 인생 최대 자존심이였는데.


그러나 때가 왔다. 2006년이였나. 어느 순간 빚을 다 갚았다는 얘길 들었다. 그것도 한참 나중에. 난 미국에 있었으니 집 돌아가는건 잘 몰랐다. 어떻게 공급망을 구성을 했는지 중국산 물건을 한국 대기업에 납품하며 마진을 확보했던듯.


더 큰 집으로 다시 이사가고, 회사는 진짜로 돈을 벌기 시작하며, 열린우리당 전국구 국회의원 명단에 오르니 마니 하다가, 부천 지방법원 조정위원을 하더니, 중소기업인 대통령상을 받았다.


엄마의 전성시대가 온 것이다.


그러더니 곧 간암이 왔다.


엄마의 간이식은 대략 1년 가량 유효했던 것 같다.


이미 온 몸에 퍼진 암세포는 간만 갈아끼운다고 사라지는게 아니다.


외려 면역억제제 때문에 더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기억하고 싶지도 않은 어느날 엄마가 갑자기 음식을 못 삼킨다. 막 짜증을 내신다.


형과 나는 부랴부랴 짐을 챙겨서 간이식 수술을 한 아산병원으로 엄마를 모셔간다.


의사들의 표정이 어둡다. 아니 어두움을 감추려는 의도적 무표정.


재발이 시작됬다.


1인실을 잡는다.


이제 우리는 결말이 뭔지를 안다. 듣고 또 들었던 예후가 안좋다는 말.


7개월동안 병원에서 살았다. 엄마가 다시 죽어가는걸 보며.


형하고 나하고 하루씩 번갈아가며, 하루는 집에서 자고 출근, 병원으로 퇴근. 그리고 병원에서 출근, 집으로 퇴근.


처음 4개월간은 그나마 괜챦았다.


엄마도 형도 나도 더이상 앞을 얘기해지 않는다. 그냥 이 순간을 붙잡고 싶을 뿐.


갑자기 내 회사에서 외국 출장을 갈 일이 생겼다. 진지하게 고민했다. 갈지말지. 엄마는 가랜다.


떠나기 직전에 엄마가 날 이상하리만치 사랑이 가득한 표정으로 가만히 바라본다.


엄마는 그때 62세. 남편 없는 과부로서 이제 살만큼 살았다. 후회는 없다 하신다.


그게 엄마가 의식이 있을때 나를 본 마지막이였다.


외국에 있을때 형에게 연락이 왔다. 엄마가 쓰러졌다고. 간성혼수가 오기 시작했다.


퇴근 때 잠실나루 역에서 아산병원으로 가는 보행자 다리에서 뉘엿뉘엿 지는 해를 본다.


삶이라는게 이렇게 저주스러울 수가 없다.


고생하다 살만하면 병들어 죽는게 인생이구나.


도우미 아줌마와 더불어 복수에 물 빼고, 배변 닦아내고, 정기적으로 몸 돌려가며 욕창을 막는다.


우리 옆 방엔 전직 통일부 장관이 있었다.


가끔 문이 열려있을때 안을 보면, 그 아저씨랑 아내 딱 둘만 있다. 엄마보다 이틀 먼저 가셔서, 장례식장에서 그분이 통일부 장관이였음을 알았다. 살아서 얼마나 위세를 펼치던 죽을때는 사랑하는 사람만 곁에 남는다.


7개월간의 암 병동 생활.


코드 블루. 주로 새벽에 울린다. 또 한명 가는구나.


옆옆방에 72년생 아줌마가 왔다. 그때 나이로는 40세인데, 아주 어려보인다. 방 입구에 이름이랑 나이가 써져있어서 금방 파악이 된다. 왜 들어왔는지 이해가 안갈 정도로 멀쩡한 사람이 환자복 입고 다닌다.


남편이 저녁에 회사에서 오는지 책가방 매고 그 방으로 들락날락 한다. 폐암이란다.


들어온지 한달 남짓. 울음소리가 들린다. 또 한명 갔구나.


아산병원은 겉에서 보면 모르겠지만 거의 하나의 도시다.


안에 술집 빼고 다 있다. 문자 그대로.


여자들이 월등히 많은 도시.


암 병동에서 살아 나가는 사람 7개월동안 한명 봤다. 대략 20대로 보이는 남자애 하나. 잘 살고 있을라나.


엿튼 11월 3일.


엄마 병실 문을 연다.


형이랑 도우미 아줌마가 나를 물끄러미 본다.


이미 돌아가셨다.


이미 바이털 사인 나오는 그 기계는 꺼져 있다.


엄마는 눈을 약간 게슴치레하게 뜰락말락 하면서 누워있다.


이제 다 끝났구나.


기도를 드린다. 도우미 아주머니도.


간호사가 시신 운반용 들것을 끌고 왔다.


이상하리만치 폭이 좁다.


엄마를 침대보 같은 천으로 몇겹 둘러싸서 그 들것 위에 꽁꽁 묶는다.


평소에 매일 보던 병원 내부지만, 이상하리만치 생소한 복도를 통해 장례식장으로 간다.


그게 14년전 오늘.


모든 패밀리 레거시가 마무리된 날.


그리고 새로운 세계가 시작된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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