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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숲지기 마야 Jul 05. 2021

시급 8,720원과 30만 원의 간극

직장인 생활을 접고 개인저서 계약을 한 작가이자 창업 준비를 하고 지낸 지 4개월이 지났다. 대책 없이 저지른 일이었지만 희망은 있었다. 분명히 잘 될 거라는 믿음은 변함없다. 하지만 통장의 잔고가 점점 줄어들자 덜컥 겁이 났다.


'나 정말 이대로 괜찮을까?'


1인 가구라 해도 고정비 지출은 만만치 않다. 고정 수입이 없는 상태에서 지출만 있으니 너무 뻔한 결과인데도 불구하고 안일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그냥 버티기는 힘들 것 같다고 느껴지자 걱정이 되었다.


준비하던 사업 계획서를 제출하고 시간이 조금 생겼다. 휴식이 필요했지만 불안한 마음이 들어 아르바이트라도 하며 결과를 기다리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대기 상황에서 장기간의 아르바이트는 할 수 없었다. 단기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봤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무엇보다 나이 제한에 걸려서 지원 자격에서부터 미달인 곳이 많았다. 그나마 자격과 나이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택배 물류 센터는 한 번 도전해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일로 알려져서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도 있었지만 궁금했다. 한 번 해보고 아니다 싶으면 그때 그만둬도 될 것 같았다. 고민 끝에 문자로 업무 지원을 했고, 그날 오후에 다음 날 근무 통보를 문자로 받았다. 거부가 아닌 합격은 그게 무엇이든지 일단 감사하다.


하지만 출근부터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아침 6시 30분 셔틀을 타야 하는데 픽업 장소에 늦지 않게 도착하려면 우리 집에서 5시 30분에는 출발해야 했다. 버스 타고 지하철을 갈아타야 했다. 혹시라도 못 일어나면 어떡하나 싶었다. 못 일어나는 것을 핑계로 첫 도전부터 실패하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아침잠이 많은 나였기에 새벽 4시 30분부터 10분 간격으로 알람을 맞춰 놓고 눈을 붙였다. 긴장한 채로 잠들어서인지 몇 번을 깨다가 4시 50분에 일어났다. 씻고 커피를 마시고 준비물을 챙겨서 집을 나섰다. 바깥은 벌써 훤했다. 직장 다닐 때도 나서지 않았던 이른 새벽 시간에 일용직 아르바이트를 위해 길을 나선 게 우스웠다. 버스에 몸을 실자 무사히 하루를 보냈으면 하는 마음만 들었다.


셔틀 픽업 장소에는 15분 일찍 도착했다. 첫날이니 모든 것이 낯설고 어색했다. 픽업 장소로 안내받은 버스 정류장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50m 정도 떨어진 곳에 사람들이 줄을 서 있는 게 보였다. '혹시 저기서 타는 건가?' 싶어 가볼까 하다가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았다. 눈은 계속 그쪽을 향하며 시간을 확인했다. 정확히 6시 30분에 관광버스 한 대가 사람들이 줄 서 있는 곳에 정차했다. 그제야 나는 종종걸음으로 버스를 향해 갔다. 탑승하기 위해서는 휴대전화 앱으로 체크인을 해야 하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나는 로그인이 되지 않았다. 앞에 줄 서 있던 여자분에게 방법을 물어봤지만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부끄러웠다. 일단 수기로 작성을 하고 자리에 앉으라는 기사님의 말씀을 듣고 시키는 대로 했다. 그때부터였다. 단단했던 나의 사고의 껍질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이.


물류 센터에 도착해서도 나는 어리바리했다. 직원으로 보이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물어봐야 했고, 그들의 지시에 따라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날 비도 추적추적 내려서 우산도 없던 나는 아침부터 비에 젖어야 했다. 눈치껏 겨우 출근 체크를 하고 교육을 받았다. 교육 후에 업무를 배정받았는데, 처음 가본 물류 센터는 마치 미로 같았다. 앞서 가는 담당자의 빠른 걸음 속도에 맞추지 않으면 미아가 될 것 같았다. 그곳에서 나는 그냥 초짜 아르바이트생일 뿐이었다.


오랜만에 몸으로 하는 단순 노동이 고단하기도 했지만 머리를 비우는 데는 도움이 되었다. 무엇보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는 생각이 나를 지배했다. 시끄럽게 돌아가는 컨베이어 벨트와 쉴 새 없이 움직이는 택배 박스와 포장 사이에서 나는 기계적으로 몸을 움직이는 단순 노동자일 뿐이었다. 글을 쓰는 작가도 아니고, 선생님도 아니며, 강사도 아니었다. 컴퓨터와 휴대전화 속 SNS 세상과도 단절되었다. 그저 부지런히 팔다리를 움직여야 일당을 받을 수 있다는 것 말고는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렇게 하루가 지났다.


업무를 마치자 온 몸이 땀에 젖어 있었고, 팔다리가 후들거렸다. 사물함에 보관해 두었던 휴대전화를 켜보니 부재중 전화가 6통이나 와 있었다. 여러 단톡 방에서는 읽지 못한 메시지가 수두룩 했다. 다음 날 미팅이 잡혀 있던 출판사 에디터님의 문자 메시지도 있었다. 에디터님은 항상 '선생님'이라는 호칭으로 나를 대했다. 그날따라 '선생님'이라는 호칭이 낯설고 부끄러웠다.


'내가 혹시라도 너무 쉽게 글을 쓰려했던 건 아니었을까?'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내가 들어도 되나?'


이런 의문이 들었다.


익숙한 장소가 아닌 낯선 공간과 업무에서 내가 그동안 지녔던 태도와 생각을 되짚어 보았다. 손가락으로 움직이는 세상에 갇혀 너무 쉽게 생각하고 살아온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았다. 그동안 내 말과 행동과 글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퇴근길 셔틀버스에서 이메일을 열어보았다. 강의 제안이 와 있었다. 강의 주제와 날짜 등의 정보와 함께 그쪽에서 제안한 강사료가 적혀 있었다. 시간당 30만 원에 해당하는 강사료였다. 그날 하루, 나는 8,720원의 최저시급으로 아침부터 늦은 오후까지 수많은 택배 봉투와 상자를 나르며 땀을 흘렸다. 강사료로 제안받은 금액은 최저시급의 34배가 넘었고, 단 두 시간 강의로 물류센터에서 일주일을 꼬박 일해야 벌 수 있는 금액과 같았다.


시급 8,720원을 받고 일하는 사람과 30만 원을 받고 일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다. 그 둘 다 '나'라는 같은 사람인데 무엇이 그 차이를 만드는 것일까?


이메일을 읽으면서 '이제 물류센터 알바는 안 해도 되겠다.'는 가벼운 마음은 들지 않았다. 돈보다 더 큰 무언가가 내 마음을 흔들고 있었다. 몸을 쓰든 글을 쓰든 사람들 앞에서 강의를 하든, '나'라는 사람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그 본질이 나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자만하지 않도록 더 내려놓고 다듬어가야 한다는 것을 그날 배웠다. 아직 갈 길이 멀다는 것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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