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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소장 Nov 29. 2023

6. 단종은 왜 영월에서 죽었을까?

조선 왕에 관한 27가지 궁금증 

17세, 조선의 왕 중 가장 어린 나이에 죽은 단종은 왜 안타까운 비극의 주인공이 되어야만 했을까요?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닮아 가능성이 충분했던 어린 왕 단종의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 정통성을 가진 단종의 탄생    

 

 단종은 할아버지는 세종 할머니는 소헌왕후 아버지는 문종 어머니는 세자빈 상황에서 돌아가시지만 나중에 현덕왕후가 되셨고 조선에서 원손 세손 세자 왕을 모두 거친 유일한 왕이었습니다. 그야말로 누구도 가질 수 없었던 정통성을 가지고 태어났었던 거죠. 그러나 그토록 기다리던 아이였던 단종이 태어나 모두가 기뻐하던 그때 불길한 느낌을 주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원손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세종이 직접 죄인을 사면한다는 발표하는 순간 큰 초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얼마 후 단종을 낳은 세자빈이 죽게 되자 슬퍼하던 문종은 더 이상 결혼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게 되었죠.     


 왕이 될 운명으로 태어난 단종은 어린 시절부터 차근차근 제왕 교육을 받았습니다. 최고의 학자들이 단종의 교육을 위해 힘썼고 단종 또한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원손에서 세손이 되고 세자로 책봉되면서 흠잡을 곳 없이 뛰어난 자질을 보여주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후대 사람들은 단종이 12살에 왕이 되었지만 조금만 더 성장하기를 기다려 주었다면 분명 세종과 문종을 잇는 성군이 되었을 거라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세상이 그 시간을 기다려 주지 못했죠.      


-12살에 왕이 된 단종     


 어머니가 단종을 낳고 산후후유증으로 죽게 되자 단종을 키운 것은 세종의 후궁인 혜빈 양씨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유모로서 역할만 하고 단종을 보호할 만한 힘을 가지고 있지는 못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할머니인 소헌왕후마저 돌아가시게 되자 세종은 어린 단종이 걱정되기 시작했습니다. 아들 문종도 몸이 좋지 않아 자주 아팠거든요. 그래서 세종은 평생을 함께한 집현전 학사들을 불러 자기가 죽고 난 후 단종을 잘 부탁한다고 이야기했다고도 합니다. 그리고 소헌왕후의 삼년상이 끝나고 얼마 안 되어 세종도 죽게 되었죠. 그리고 문종 역시 세자 시절부터 잦은 과로로 인해 몸이 쇠약해졌는데 연이은 삼년상을 치르고 나니 더 안 좋아져서 자기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느끼고 믿을 만한 신하들을 부르게 되죠.     


 문종은 김종서와 황보인 등 원로대신들을 불러 어린 단종을 잘 보필해 주기를 부탁합니다. 단종의 왕위를 빼앗아 왕이 된 세조가 만든 실록에는 김종서가 어린 왕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대신들이 중요한 결정을 해서 왕권이 약해졌기 때문에 자기가 왕이 될 수밖에 없었다고 기록했지만 실제로 김종서와 원로대신들은 그럴 의도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왕의 중요한 역할인 인사권을 행사하기에 단종은 아직 모르는 신하들이 많아 김종서와 대신들이 최종 3인의 이름 위에 점을 찍어두고 선택하게 하는 황표 정사를 문제 삼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임시로 진행된 일이었고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일이었습니다. 단지 수양대군의 욕심으로 왕위를 빼앗고 억지로 가져다 붙인 핑계에 불과했지요. 김종서가 안평대군과 친하게 지낸 것은 사실이지만 단종의 신임을 받고 있던 상황에서 역모를 일으키려고 했다는 것도 말도 안 되는 주장입니다.   

   

 수양대군은 무인들과 친하게 지내며 몰려다니자 안 좋은 소문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소문이 신경 쓰였는지 자진해서 명나라에 가서 단종이 왕이 되었다는 직책을 받아오는 고명 사은사 길에 나서기도 하고, 단종의 국혼을 추진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나라를 잘 다스리는 치세법을 올리기도 하자 단종은 수양대군을 감싸며 다시는 수양에 관한 마음을 의심하지 말라는 명을 내리기도 했지요.      


-계유정난(1453)     


 그러나 그 명을 내린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계유정난이 일어납니다. 단종이 가장 믿고 있던 김종서를 죽이고 난 후 비상사태를 선언하며 궁궐로 신하들을 소집한 수양대군과 한명회는 살생부를 들고 그들과 뜻을 함께하기로 한 인물들은 남기고 반대하는 인물들은 모두 죽이는 일을 벌인 후 조정의 주요 관직을 차지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후 단종의 보호자, 지지자 대부분이 살해당하거나 유배를 당하게 되자 자신의 세력을 모두 잃은 단종은 2년 후인 1455년 수양대군에게 양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나게 되었죠.     

 

-비극의 주인공     


 그러나 단종의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1456년 (세조 2년) 그를 복위시키려던 성삼문의 계획이 실패하자 이 사건에 연루된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강원도 영월로 유배를 가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목숨을 잃은 신하들은 사육신 관직을 잃은 신하들은 생육신으로 불렸지만 실제로 수많은 인재가 죽게 되었습니다. 단종의 유배길에는 백성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온통 눈물바다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합니다.  

    

 귀양을 가서도 여전히 존재 자체가 위협이었던 단종은 결국 금성대군의 복위 시도가 실패로 이어지며 사약을 받게 되는데 이 부분에서는 여러 기록이 달라 논란이 있습니다. 사약을 들고 가던 이가 차마 올리지 못해 목을 매어 자결했다는 이야기, 사약을 거부했다는 이야기 등 하나같이 비극적인 이야기들이 전해집니다. 그리고 시신을 수습하지 못하게 했는데 엄흥도와 가족이 목숨을 걸고 시신 수습을 한 후 마을을 떠났다는 이야기나 태백산 산신이 되었다는 이야기, 억울한 죽음에 귀신이 되어 고을에 부임하는 수령이 죽었다는 이야기 등 영월 지역에서 많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모두 안타까운 죽음이 만들어 낸 이야기들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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